〈 355화 〉 복귀
* * *
이틀.
남아있는 마계의 혼란을 잠재운 시간이었다.
현재 반란은 순조롭게 진압되었다.
자기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군주를 둔 나라는 쇄락하기 마련.
더군다나 후계도 없는 군주가 뒈졌다면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말파스가 마물들을 이끌어주기는커녕 자기 무력을 증대시키느라 바빴고, 첫 출정식에서 뒈져버려 손쉽게 서부를 수복할 수 있었다.
놈에게 붙었던 대다수의 고위급 마물들이 명을 달리하거나 잡혔고, 살아남은 하급 마물들은 내 수하들에게 통제를 받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발록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지하감옥에 와있었다.
크흐흐흐...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입에서 침... 아니, 불똥을 뚝뚝 떨어뜨리는 발록의 욕망 가득한 말에, 그의 앞에 나체로 있던 아리따운 여인이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바, 발록... 왜 그래... 마왕님...! 마왕님!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날 향해 용서를 구하는 이년의 이름은 세이렌.
뭍에선 반인반조, 물에선 반인반어로 살아가는 S급 마물이었다.
몸과 머리카락이 항상 젖어있는, 다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년이기도 했다.
수하들도 많이 가지고 있는... 바다와 하늘을 넘나드는 범용성 좋은 년이었다.
마왕님, 당장 이 배신자년을 안고 싶습니다.
“무, 뭐라고...? 아... 안아...?”
입을 떡 벌린 세이렌이 감옥 구석으로 갔다.
양팔을 교차해 자신의 가슴을 가린 그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또라이 아니야...? 마왕님...! 제발 용서해주세요... 시키시는 일은 뭐든지 할게요...! 부탁이에요...!”
용서? 마왕님께서 말파스에게 붙은 네년을 용서해주실 것 같으냐? 으하하하!
웃음소리가 곧 죽기 직전인 악당 같다.
항상 불타는 발록, 항상 젖어있는 세이렌.
둘이 교합하면 누가 이길까?
어깨를 으쓱인 내가 발록에게 말했다.
“취향이 제법 특이하구나. 알아서 해라. 쓸 데가 있을지 모르니 적당히 갖고 놀고.”
예, 마왕님. 감사드립니다.
발록의 어깨를 두드리려던 나는, 손바닥이 후끈해지자 두드리는 시늉만 했다.
그렇게 감옥을 떠나는데, 뒤에서 세이렌의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마왕님! 발록의 것이 제 몸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온몸이 찢어지고 말 거예요!”
아내여, 걱정하지 말아라. 살살해주겠다.
“이런 미친 새끼가... 누가 네 아내야!? 마왕님!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평생 마왕님을 위해 이 한 몸 바칠게요! 제발요!”
야동에서 많이 듣던 대사인데... 저년이 지껄이니까 웃기다.
“꺄아아아악! 뜨거워...! 마왕님! 마왕님!!”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려는지, 세이렌이 감옥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대며 애타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관음과 수인 취향은 그다지 없었기에, 나는 재빨리 감옥을 빠져나와 성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조용해진 마계.
마물들이 열심히 닦아놓은 길을 걷던 나는, 유리아가 마중을 나와 있자 씨익 웃었다.
“푹 쉬었느냐?”
“네. 덕분에요.”
나는 유리아의 목 뒤로 팔을 두르고 어깨를 잡아 옆으로 끌어왔다.
시선을 슬쩍 내리니 쇄골의 움푹 팬 부분이 탐스럽다.
그 부분을 검지로 살살 어루만지자, 유리아의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홍조가 맺힌다.
“여, 여기서는 조금...”
“진정해라. 누가 여기서 하겠다던?”
“아, 네... 그럼...”
쩌어억!
유리아가 조심스런 손짓으로 포탈을 열었다.
빨리 돌아가자는 의미.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도 달아오른 듯하다.
“감회가 새롭구나.”
“네...? 뭐가요?”
“부모의 원수라고 날 원망할 때가 엊그제 같아서 하는 말이다.”
“아... 그땐 제가 하찮은 인간이었을 때잖아요. 주인님의 권속으로 새롭게 태어난 지금, 과거는 잊어버려야 맞다고 생각해요.”
꼴리는 말만 골라서 해주잖아.
유리아의 윤기가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준 나는, 그녀와 함께 포탈로 들어갔다.
**
“마물들을 선별해서 지구에 데려다놓으실 거라구요?”
“그래.”
말파스가 배신하면서, 서부의 마물들은 여기 동부로 피신을 왔다.
서부가 자신들의 터전인 녀석들이 많다는 뜻.
그리고 현재의 서부는 완전히 황폐화되어 생명체가 살기 힘들었다.
또한 마계보다 훨씬 좋은 행성인 지구가 있는데, 여길 그냥 놔두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마물들이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도록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기에, 지금 이주를 추진하려는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세화가 말했다.
“괜찮은 것 같아요. 어차피 현재의 지구는 거의 주인님의 행성이니까요. 지구 먹이사슬의 판도가 바뀌겠네요?”
“지구의 생명체와 공생시킬 생각이다. 고위급 마물들에게 수하들을 적당히 다루라고 하면 되겠지. 마물들도 먹이가 있어야 살 것 아니냐.”
“그렇죠.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하시게요? 마물들이 나타났다는 걸 알면 핵이라도 떨구려고 할 텐데... 저희가 주인님을 모시는 마물들을 죽일 수는 없잖아요.”
그건 맞다.
마물들을 소모품으로 여겼던 예전에는 신나게 칼을 들이밀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지.
그래서 스텔라의 각성용, 성장용으로 쓸 배신자 놈들을 많이 잡아둔 거고.
“인간들이야 언제든 처리할 수 있으니 걱정거리는 아니다. 일단은 우리가 먼저 가서, 은밀한 곳에 포탈을 설치하고 일부를 이주시켜보도록 하자.”
“네. 고위급 마물들을 소집해서 자원을 받아볼까요?”
“이제 급한 건 없어졌으니 천천히 하자꾸나.”
“알았어요. 마르셀라랑 박사님이 보고 싶네요. 빨리 만나서 맥주라도 한 잔 하고 싶어요.”
아델처럼 대놓고는 아니지만, 은근히 지구를 그리워하고 있었구나.
나는 알현실을 나가려고 하는 세화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불렀다.
“세화야.”
“네?”
“수고했다.”
유리아와 함께 마계에서 큰 고생을 해줬다.
이젠 지구로 돌아갈 차례.
가서 스텔라를 잘 보듬어주다가, 심심하면 다시 대학도 다니거나, 인간들 목도 썰거나 하자.
환히 웃음지은 세화가 말했다.
“주인님이야말로 고생 많으셨어요.”
**
“뭔가 싱숭생숭해요.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꽤 정이 든 것 같아요.”
시꺼먼 심연의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포탈 앞에 선 실비아의 말이었다.
포대기로 메릴을 감싸 앞으로 안은 상태였던 아델이 동의하지 못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음산한 곳에 정이 들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시지요?”
투덜거리는 아델의 뒷목을 주물러 진정시킨 나는 메릴을 쳐다보았다.
자고 있음에도 큼지막한 귀가 조금씩 쫑긋거리는 모습이 퍽 귀엽다.
“넌 메릴한테 정들었잖아. 새로운 무기도 얻었고...”
“언니, 저는 환경을 말한 것이었어요. 여긴 놀 거리가 전혀 없어요. 지구로 돌아가면 미용실부터 들러야겠어요. 관리를 받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요. 메릴에게 언어도 가르쳐야하고... 할 게 너무 많군요.”
“메릴의 교육은 유리아가...”
“어허...! 유리아 언니 같은 냉혈한에게 배우면 무감정한 아이가 되어버리고 말 거예요. 제가 교육해야 맞아요.”
“그, 그래...?”
실비아가 슬쩍 유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화를 낼까 우려스러운 모양.
허나 유리아는 다소곳한 미소만을 지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아델의 저런 말투에 적응을 완전히 끝낸 듯 말이다.
안심한 실비아가 아델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타이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던 나는 픽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여기서 스텔라만 추가된다면 완벽한 그림이 나올 것 같다.
“남은 이야기는 지구로 돌아가서 하지.”
그 말에 네 사람이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아리따운 네 명의 마기가 싹 숨겨졌음을 확인한 나는, 가장 먼저 포탈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다시 모범생이자 과학도 송지혁으로 돌아갈 때다.
화아악!
암전되자마자 다시 밝아진 시야.
어두컴컴하고 정적인 홀 가운데에 큼지막한 모니터가 보인다.
남극 비밀기지의 상황판이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신문물인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멀리서부터 구두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져왔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고요함을 깨고 귓가에 날카롭게 꽂히는 것이, 굽 끝이 뾰족한 힐이다.
이윽고 복도를 울려대던 소리가 멎으면서,
“지혁이야?”
침착함 속에 연륜이 묻어나오는 박사 특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에서 우뚝 멈춰있는 그녀를 응시한 내가 말했다.
“다녀왔어.”
그러자 박사가 자신의 가운을 여미며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음산한 홀을 환히 비추는 듯한 아리따운 미소를 지었다.
“어서와, 고생했어. 예상외로 빨리 끝났네? 오래 걸릴 줄 알았더니...”
“운이 좋았지. 잘 지내고 있었어? 심심하진 않았고?”
“전혀. 마르셀라랑 같이 바쁘게 살다보니까 그런 걸 느낄 틈도 없었어.”
“그래? 그건 그것대로 서운한데.”
장난기 어린 투에 실소를 터뜨린 박사가 팔로 내 허리를 감는다.
그리고는 내 가슴팍에 자신의 이마를 묻었다.
“아이테르 복제 연구는 거의 끝났어. 마지막 임상시험만 남겨놓은 상태야.”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성과를 보고하는 박사였다.
남들이 보면 내가 박사를 일하는 기계로 생각하는 줄 알겠다.
“안 물어봤어.”
“내가 그냥 말하고 싶었던 건데?”
그래, 그렇다고 치자.
뒤이어 포탈에서 네 사람이 나오더니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세화는 가장 먼저 기지 안의 공기를 가득 들이켰고,
유리아는 박사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으며,
실비아는 묶어놓은 자신의 포니테일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아델은 혼자 까르르거리다가 메릴이 깨어나려 하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지구에 온 감정을 표현한 그녀들이 박사와 내게로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박사님.”
세화와 유리아의 다정한 인사.
내 품에서 떨어진 박사가 그녀들을 가볍게 안았다.
“피부가 좀 창백해진 것 같네?”
“그래요? 마계에 햇빛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보다. 그렇게 별로에요?”
“별로라니... 칭찬한 거야. 유리아는 여전히 어른스럽고... 보기 좋다. 어서와.”
사사로운 담소를 나누는 세 사람.
그런 그녀들을 아델이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어려워하는 박사를 쉽게 대하는 세화와 유리아가 부러운 건가 싶다.
애꿎은 메릴의 머리카락만을 쓰다듬고 있던 아델은, 박사가 돌연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몸이 살짝 굳었다.
“아델, 잘 지냈어?”
“.... 네에...”
“내가 했던 말은 기억하고 있었지?”
마계에서 당혹스런 일이 일어나도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던 것을 말함이었다.
솔직히 얘기해서, 당시 아델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떼쟁이 그 자체였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던 아델이 박사의 눈을 피했다.
아델의 반응을 보고 대충이나마 상황을 짐작했는지, 박사가 따사로운 말로 아델을 달래주었다.
“네가 어떠한 행동을 했든지 간에, 거기서 배워가는 게 있다면 좋은 거야. 네가 자아성찰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랑스러워.”
“그런가요...?”
“응. 안고 있는 아이는 누구야? 엄청 귀여운데... 마물인가? 여우 종족이야?”
“메, 메릴이라구... 유리아 언니가 데리고 온 아이인데요... 제 동생이에요...”
“그래? 안아 봐도 돼?”
“지금 잠들었는데에... 그래도 박사님의 부탁이니까 특별히 안도록 해드릴게요...”
포대기를 풀려고 하는 아델을 말린 박사가 말했다.
“아냐. 깊게 잠든 것 같은데 깨우면 안 되지. 대신 나중에 꼭 소개시켜줘. 알았지?”
시종일관 다정한 박사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졌을까?
아델이 헤실헤실 웃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나중에 같이 산책 가실래요? 메릴이랑 셋이서요...”
“그래도 돼?”
“박사님은 돼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멀리서 마르셀라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재회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의 곁에 끼기가 껄끄러운 얼굴.
뭔 눈치를 보고 그러는지... 어이가 없다.
난 마르셀라를 왕비들이나 박사만큼 사랑하고, 그녀들도 마르셀라를 인정하고 있는데 이제 자신감 좀 가져보지.
나는 마르셀라에게 다가가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항상 하는 말이긴 한데 또 할게. 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마, 마왕님...”
“고맙다, 마르셀라.”
“.... 저도 감사해요... 마왕님...”
마르셀라가 내 겨드랑이 사이로 자신의 팔을 집어 힘을 준다.
용기를 냈구나. 기특하다.
근데 그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냐? 곧 가버릴 것 같잖아.
언제나 한결같아서 안심이 되기는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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