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1화 〉 영혼을 담는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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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실비아 왕비님.
성내 마물들의 깍듯한 태도.
유리아에게 마계의 언어를 약간이나마 배웠던 실비아가 어색한 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오오...!
순진무구한 감탄사를 터뜨리며 좋아라하는 마물들.
끽끽거리며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던 유리아가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게 말한다.
“여기 오기 전에는 마물들이 모두 살육에 미친 괴물들인 줄 알았어요. 오직 주인님께만 충성을 바치는 무감정한 놈들인 것 같았죠.”
“생각이 바뀌었나보구나.”
“네. 마물들도 인간처럼... 아니, 인간들보다 더욱 생생하게 감정을 느끼는 생명체더군요. 메릴 같은 귀여운 마물들도 있고... 점점 마물이 좋아지려고 해요.”
아델의 행성은 중세 느낌을 물씬 풍기는, 마계와 비슷한 곳이다.
실비아는 마계와 전혀 다른, 지구와 비슷한 행성에서 왔다.
헌데도 아델이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실비아는 이곳을 좋아하고 있었다.
고도로 발전된 곳에 있다가 음습한 휴양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장소로 오니 마음이 편안해진 건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내겐 좋지만 말이다.
“혼란만 잠재우면 지금보다 더욱 살기 좋은 행성이 될 거다.”
“지금이 딱 좋은데요? 투닥거리는 적도 있어야죠.”
“네 의견을 존중하긴 한다만, 그 말은 마물들에게는 하지 말아라.”
“물론이에요.”
“그리고 말파스는 꼭 죽여야 할 놈이다.”
“제가 놈의 얼굴에 칼을 꽂는 첫 번째 권속이 될 거예요.”
믿음직하구나. 꼭 그래줘라.
알현실로 간 나는 옥좌에 앉아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그니를 잡은 소문이 퍼져나가면, 말파스 측 마물들의 사기는 완전히 곤두박질 칠 것이었다.
그때 총력전을 벌여야하는데, 말파스가 문제였다.
이 음흉한 놈이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말파스의 능력은 굉장히 특이하다.
부등가교환의 형식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능력, 심지어 대가만 오롯이 지불한다면 무조건적으로 이뤄주기까지 한다.
능력을 사용하는 와중엔 완전한 무적.
마계의 그 어떤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방어막 안에서 편안하게 주판을 두드린다.
지금의 이블 발키리들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으려나?
한 번 실험해보고 싶지만, 놈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껄끄러운 일이니만큼 편한 생각은 지양해야 맞았다.
어쨌든 이놈을 죽이려면, 일단은 혼자 놔두는 게 먼저다.
소원을 빌려면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이 없다면 놈은 주판을 두드리는 일 외엔 할 수가 없었으니까.
문제는 이놈 또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건데... 함정을 파놓는다 해도 걸려들 리 없고...
‘그냥 정면 돌파가 답인가?’
그래, 그렇게 하자.
말파스가 다스리게 된 서부와 내가 다스리는 동부는 힘의 격차가 현격하다.
아델의 마력으로 강화된 이블 발키리들마저 있어서 질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애초에 확 밀어붙이기로 했으니, 작전 변경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계획했던 대로 하는 거다.
**
세화의 쇄골라인을 조심스레 만져본 나는, 화상의 흔적이 전혀 없는 뽀얀 피부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아 보이는구나.”
“금방 낫던데요? 아델의 마력이 회복력도 높여주나 봐요.”
“그렇지. 아델은 지금 어디 있느냐?”
“엉덩이 아프다고 나가기 싫대요.”
다 나았음을 알고 있는데 엄살을 피우다니.
딱 봐도 메릴이랑 놀다가, 휑한 성의 심심함을 느끼고 이쪽으로 오겠지.
눈에 훤하다.
“알았다.”
퍼어억!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 위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위를 슬쩍 바라보니 무언가에 갈기갈기 찢긴 마물의 살점이 우리 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세화는 익숙한 일인 양 손을 휘저어 살점과 파란 피를 저 멀리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양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렸다.
“언니, 주인님이랑 대화 나누고 있는 거 안 보여요?”
그에 신나게 화살을 쏘아대며 서부의 마물들을 터뜨리던 유리아가 미안하다는 뜻으로 한손을 들어올렸다.
“미안.”
유리아의 목소리는 잔뜩 상기되어있었다.
아델의 마력을 받고 전장에 나서니 힘 조절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선 실비아의 것이 분명한 보랏빛 섬광이 마물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강화된 힘에 취한 모양.
뿌듯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던 나는, 이어지는 세화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감지 범위가 평소보다 훨씬 넓어져서, 예전엔 알아차리지 못한 것들도 알 수 있어요. 지금 저 멀리 모락스가 있네요.”
모락스는 어린 인간들의 영혼을 수집하길 좋아하는 S급 마물이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자신이 수확한 영혼의 비명소리를 들려주고, 그를 통해 부모들이 눈물을 흘리면 그것으로 목욕을 하는 사이코이기도 했다.
내면이든 외견이든 괴물이란 소리를 들을만한... 성격이 더러운 마물들이 즐비한 이 마계에서도 미친놈으로 통했다.
“모락스라... 잘됐구나.”
“지금 죽일까요?”
“잡아와라. 생각이 있다.”
“네.”
고오오오...!
불길한 마력을 내뿜기 시작한 세화.
그녀는 곧 낫을 소환하고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씨익 웃었다.
우리 여리여리한 아델은 망치를 사용하라고 하면 화를 내겠지?
그러니 선물 하나 해줘야겠다.
**
마왕님...! 강녕하셨습니까...!
인간의 몸, 소의 얼굴.
초창기에 세화한테 죽은 암두시아스보다 더욱 흉측하게 생긴 모락스가 불쌍한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한 놈의 목에는 세화의 낫이 대어져있었다.
수틀리면 언제든 목이 날아갈 거라는 의미.
모락스가 자신의 뒤에 있는 세화와, 앞에 있는 내 눈치를 번갈아 보며 전전긍긍했다.
붙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한 표정이었으면서, 지금은 저러니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해도 된다.
마계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자신이, 예전이었다면 수백 합은 기본으로 겨룰 수 있었던 세화에게 힘 한 번 못 써보고 당했다.
현격한 힘의 차이. 게다가 손속마저 자비가 없다.
공포스럽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모락스. 그간 잘 지냈느냐?”
마, 마왕님께서 걱정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예! 저, 모락스...! 잘 지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피 맛은 좀 봤느냐?”
수하들을 죽였던 일을 비꼬아서 말하니, 모락스가 침을 꼴깍 삼킨다.
그것이...
“영혼 수확은 잘 했고? 아, 네놈은 인간 어린아이들의 영혼만 좋아하니 마물들의 영혼으론 성이 차지 않았겠지.”
죄송합니다...!
곧바로 사죄하는 모락스.
죽을 기세로 머리를 처박아도 모자란데, 낫에 상처라도 날까 조심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파스는 요즘 뭘 하고 있다던?”
아몬의 고성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지, 지금 모든 마물들을 이끌고 총력전을 벌이신다면 승기는 마왕님께서 잡으실 것입니다!
입이 싼 것도 싫고... 사탕발린 말로 아첨을 떠는 것도 싫고...
그냥 저놈의 존재 자체가 싫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어 모락스의 이마에 박혀있는 시뻘건 보석에 손을 가져가자, 놈이 발광을 하더니 호소했다.
마왕님!! 제가... 제가 지구로 가서 마왕님의 마음에 들 만한 수많은 영혼들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난 어린아이의 영혼을 모으는 취미 따윈 없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어떻게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왜 마물들은 이렇게 비굴할까?
물론 생사의 기로 앞에서는 성인군자조차 목숨을 구걸하는 게 정상이라 쳐도, 4기사 같은 명예를 아는 놈들이라면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일 텐데... 뭔가 아쉽다.
혀를 찬 나는 보석 주변에 손가락을 대고 힘을 주어 구부렸다.
끼에에에에엑!
찢어질 듯한 영혼의 소리가 귓가에 콕콕 박힌다.
원한을 가진 어린아이의 비명. 소름이 끼칠 정도로 듣기가 싫다.
끄으으으으...!
눈을 까뒤집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락스도 너무 추하다.
성격부터 시작해서 외모까지 모든 것들이 싫다.
원래라면 모진 고문을 하여 죽였을 텐데, 얘는 빨리 없애버려야겠다.
콰드득!
꺼어어억! 꺼어억!
마력을 집중한 손가락으로 놈의 이마를 뚫자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스윽!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 탓일까?
세화가 역수로 쥔 낫을 위로 들어 올려 놈의 목을 베어냈다.
살점이 베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아주 깔끔하게 말이다.
다만 모락스의 단말마는 들렸다.
끄륵!
모락스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지탱하게 되어버린 나는 헛웃음을 켜며 보석을 뜯어냈다.
“죽이는 보람이 없잖아.”
“비명소리가 너무 끔찍해서요.”
“그건 인정하지.”
나는 손에 묻은 퍼런 피를 마력으로 날려버린 뒤 보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시뻘겋고 깨끗한 그 안에 회색의 연기가 돌아다니고 있다.
아직 채 소멸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영혼이었다.
보석을 세화에게 내민 내가 말했다.
“위쪽에 구멍 하나 내봐라.”
“네.”
뾰족한 검지손톱을 내밀어 보석의 위쪽 중앙을 꾸욱 누르는 세화.
얼마 지나지 않아 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보석이 약간 손상되면서, 그 안에 있던 영혼들이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몇몇 영혼들은 내 얼굴 주변에 멈춰 주위를 배회하다가 하늘로 승천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감사를 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얘네들은 천계로 올라가려나? 만약 가면 로사리오한테 말 좀 잘해주련?
마왕님이 착한 짓 했으니까 계속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으라고, 조만간 직접 찾아가겠다고.
“이걸로 뭘 하시려는 거예요?”
어느 샌가 내 옆으로 다가온 세화의 물음.
오늘따라 그녀의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무척이나 요염해 보인다.
“아델에게 줄 무기를 만들 생각이다.”
“무기요? 아...”
세화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락스의 이 보석엔 영혼을 가둬두는 힘이 있다.
이것을 가공하여 아델에게 보옥을 하나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생명을 중시하던 착한 성녀인 아델.
그런 그녀가 악에 물들어 가학적인 미소를 지은 채로, 인간들은 물론 신들의 영혼까지도 수집하는 모습...
타락한 성녀로 굉장히 어울리잖아.
게다가 천계에서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여신들의 엉덩이를 때찌하고, 그녀들에게 최음제를 강제로 주입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꼴린다.
근데 여신에게 최음제가 통할까? 해보면 알겠지.
이를 드러내며 웃은 내가 세화에게 물었다.
“이그니의 목은 발록이 삼켰나?”
“네, 좋다고 먹던데요? 소문도 쫙 퍼졌어요.”
“알았다.”
“모락스의 목은 적들이 잘 볼 수 있는 전장 한가운데에 효수해놓으라고 할까요?”
음음... 경험이 쌓이더니 형세판단을 제법 잘 내릴 수 있게 됐구나.
뿌듯하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아니, 그렇게 되면 오히려 각오를 다질 가능성이 높다. 내가 절대 살려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니, 뒤가 없는 그들로선 당연한 일이지. 용서해준다는 거짓 대자를 붙여도 속지 않을 터이니, 이그니가 무기력하게 패배했다는 소문만 도는 게 딱이다.”
“아... 그렇구나. 이해했어요.”
낫을 디바이스에 들여보낸 세화가 뒤에서부터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역으로 부는 바람으로 인해 그녀가 뿌린 향수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상큼한 과일 향인데... 시트러스인가? 언제 갖고 온 거지?
말은 하지 않고 있어도 지구에서 쓰던 용품이 그리운가보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여러 물건들을 여기 옮겨놔야지.
아니면 빨리 말파스를 죽이고 지구로 돌아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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