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340화 (340/471)

〈 340화 〉 포기하면 편해 #2

* * *

“정말 그렇게까지 하셔야했나요?”

입을 삐죽 내민 아델의 물음.

내가 반문했다.

“뭐가요?”

“왜 굳이 정체를 밝히시려는 것이지요? 저를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때처럼 거짓말만 늘어놓으면 되잖아요. 음흉한 지혁 씨는 이래야 옳아요.”

말에 가시가 너무 돋아나있는 거 아니냐?

너는 말을 해도 참...

곧 세화와 유리아를 만나게 될 텐데, 두 사람에게 볼기짝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걱정이다, 걱정이야.

“실비아 씨는 아델과 달라요.”

아델뿐이랴? 다른 이블 발키리와도 다르다.

세화, 유리아, 아델, 그리고 박사.

이 네 사람에겐 소중한 존재가 있었다.

세화의 경우엔 유승현,

유리아의 경우엔 아비,

아델의 경우엔 로사리오,

마지막으로 박사는 전남편.

이블 발키리들과 박사는 나와 저 소중한 존재를 저울질했고, 내게 오는 길을 택했다.

유승현을 비롯한 저 넷은, 내 아내들이 타락하는데 한 축을 차지했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쓰긴 했지만, 핵심적인 요소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허나 실비아에겐 이러한 존재가 없었었다.

아델이 사랑하는 존재로 있긴 하지만, 타락의 핵심 요소가 될 순 없었다.

실비아는 동성애자가 아닐뿐더러, 아델을 경애하는 것까진 아니기 때문이다.

로사리오가 있긴 한데, 그년은 실비아의 마음속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실비아에게 있어 로사리오는 그렇게까지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굳이 따지자면 우러러봐야할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 크기를 완전히 불렸다.

현재 나는 실비아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다.

악의를 충분히 주입한 상태라 격렬한 반응을 보일지언정 날 떠날 수는 없다.

덫에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거다.

“지혁 씨가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요.”

말을 마친 아델이 의사봉을 쳤다.

땅땅!

“저 죄인은 사형이에요. 김민지 사제가 알아서 처리하셔요.”

그러자 결박되어 웁웁거리던 한 남자에게, 민지가 마력을 집어넣었다.

스으으...

“으으읍...!”

눈을 번쩍 뜬 남자의 흰자위가 거뭇하게 물들었다.

이어서 먹물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고, 온몸을 파리하게 떨더니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아델을 바라본 내가 그녀를 나무랐다.

“진술도 듣지 않고 판결을 내리면 어떡합니까?”

그에 자신의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있던 아델이 대답했다.

“저 죄인은 송혜윤 신도에게 꼬리를 쳤어요. 신도들의 수를 늘려가려고 하는데 방해꾼이 개입한다면 제거하는 게 맞지요. 강제개종을 하고 싶었으나, 타이라트교의 신도는 오직 여자여야만 한다는 어떤 변태의 명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변태가 누구죠?”

“제 옆에 있네요. 자, 오늘 재판은 끝났어요. 피곤하니 집으로 돌아가지요. 김민지 사제, 저 천것을 정리하셔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다니.

물론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지만,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구나.

순수함이 한 스푼 남은 느낌이라 더 좋다.

실비아랑 훌륭한 콤비가 될 것 같아.

“같이 돌아갈까요? 떡볶이 사서.”

아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흠흠...! 좋아요. 떡볶이에 치즈를 추가하고, 만두튀김도 사서 함께 먹도록 하지요.”

“예.”

@@

투 샷이 추가된 아메리카노를 홀짝인 실비아가 미간을 구겼다.

쓰다. 하지만 정신만큼은 제대로 차려진다.

애꿎은 컵 홀더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연구실에서 지혁이 했던 말을 생각해보았다.

집으로 가기 전, 로사리오와 관련된 대화 말이다.

“.....”

솔직히 지혁이 했던 말은 모두 맞았다.

자신은 로사리오의 대리인이 아니다.

신도는 맞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로사리오교의 계급으로 따지자면 평신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아니, 공식적으로 입교한 것도 아니었으니 예비 신도라 해야 맞다.

이런 자신의 꿈에 로사리오가 나타났다고, 길을 인도해주었다고 신이 나선 발 벗고 뛰어다녔다.

로사리오교의 역사를 찾아봐도, 교법을 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왜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부담을 주는 건지 모르겠다.

헬릭스가 초대 성녀를 타락시킨 것 때문에 예민한 건 이해할 만하지만... 기가 찬다.

막말로 로사리오 같은 존재의 능력이라면 언제든 헌신해서 타이라트를 쥐포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텐데... 신이란 존재가 너무 빈둥거리는 것 아닌가?

우주가 혼란스러울 때 직접 나선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이 하면 되잖은가.

괜히 자신의 마음속에 불편함만 심어 속앓이를 하게하고... 너무하다.

스으으...

실비아의 생각이 과격해짐에 따라, 그녀의 몸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피어났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농도만큼은 지혁이 만세삼창을 부를 정도로 진했다.

‘짜증나...’

정말 짜증났다.

그 고생만 아니었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었는데,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었는데...

‘신탁은 이제 그만 잊을까...’

막말로 타이라트는 현재 마계에서의 입지가 불안하다.

그건 나타나는 마물들만 봐도 안다.

찔끔찔끔, 한 마리씩 튀어나와선 간만 본지 오래 됐다.

악신의 자격을 갖춘 존재?

비스트 슬레이어를 처리하지 못해 방법을 바꾼 놈이,

어딘가에 숨어 흉계나 꾸미며 깔짝거리는 놈이,

제 수하도 건사하지 못하는 그런 놈이 악신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가?

나타나기만 한다면 당장 모가지를 따버릴 수 있는 존재가 타이라트다.

심각하게 여길 사안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헌데... 지혁은 왜 자신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한 걸까?

그 또한 자신처럼 타이라트를 별 볼일 없는 놈이라 판단한 건가?

로사리오를 그런 식으로 깎아내리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지혁의 투철하던 정의감이 상당히 희석된 것 같다.

그와의 첫 만남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미국의 인기 있는 슈퍼히어로 코스튬을 입고 아델과 자신을 연방수사국에서 빼내고,

집까지 구해주면서 타이라트를 상대할 영웅이 두 명이나 더 등장했다고 좋아했다.

열정적으로 놈을 없애려 하던 그였는데, 최근엔 그런 기색도 없고...

아랫배에 나타난 문신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

인간들을 그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기던 것도 온데간데없어졌다.

이번에 자신에게 시킨 일을 보면, 정의로운 사람인지 의심될 수준.

아무리 인간들의 태도에 지쳤다지만 가치관이 이리도 급격하게 변할 수가 있나?

설마 현재까지의 모습은 위장... 인가?

지금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거야?

“설마...”

생각해보면 수상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가려고 한다.

코트를 여민 실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카페에 설치된 TV에서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속보입니다. 세계연합 미국지부의 마이크 허셀 이사가 금일, 미국 시간으로 오전 9시에 숨졌습니다. 마이크 허셀 이사는 금품을 노리고 찾아온 강도와 몸싸움을 벌이다, 강도가 휘두른 총에 머리를 맞아 식물인간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이크 허셀 이사의 아내는…….]

‘어...?’

화면엔 그 돼지의 면상과, 미국에 있는 유망한 병원의 사진이 분할되어 나타나있었다.

TV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실비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왠지 모를 흥분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기 때문이다.

본부를 깎아내리던 그 돼지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상당하다.

심지어 허셀이 뒈졌다는 부분에선 엄청난 통쾌함을 느꼈다.

이희연을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무지막지하게 때렸을 때보다 더한 쾌감.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죄책감에 휩싸여 끙끙 앓았을 텐데... 변했다.

그것도 아주 사악하게.

자신이 이렇게 되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지혁이다.

아니, 지혁의 탈을 쓴 타이라트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꽈아악...

손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쥔 실비아가 중얼거렸다.

“날... 속였어...”

목소리가 다소 컸기에, 카페 안의 사람들이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실비아는 그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지혁을 향해 이빨을 갈 뿐.

그렇게 지혁과의 과거를 상기해보면서 의심스런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나가고 있는데,

찌릿!

아랫배에서 야릇한 감각이 일었다.

‘흣...!’

상체를 확 숙인 실비아는, 자신의 얼굴이 순식간에 후끈해져오면서 눈앞에 지혁의 얼굴이 아른거리자 이를 악물었다.

문신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듯한데, 성욕이 마구 일어난다.

지혁의 총애를 받고 싶다는 마음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이제 확실해졌다. 이 문신은 지혁이 새긴 거다.

아델도 이런 식으로 떨어뜨렸겠지.

‘나, 나쁜 새끼...!’

지혁이 타이라트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안 것만으로도 새로이 개안하는 기분이었다.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 자신과 아델 앞에선 순진한 척, 정의로운 척은 다 했단 말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놈에게, 자신과 아델은 홀라당 넘어가버렸고?

어이가 없다. 지구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자신은 모든 것들을 미심쩍어했다.

그런 자신이 완전히 속아버리다니... 스스로가 한심하다. 바보, 병신이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든다.

지혁은 항상 자신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사랑해주었다.

이렇게나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이고, 그 마음이 변치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가 자신에게 보였던 눈빛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그러니 그가 타이라트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실비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외로움에 사무칠 때마다 다가와선, 자신을 다정하게 보듬어주었던 지혁을.

‘아, 안 돼...! 안 된다고 이 미친년아!’

유해지면 안 된다.

딱딱 필요할 때마다 지혁이 보였던 건, 자신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나무라며 이를 간 실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힘겹게 카페를 나와 택시를 잡았다.

**

푸쉬익­!

연구실 문이 좌우로 열린다.

중앙 홀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완전히 구겨진 실비아가 날 노려보고 있다.

눈에 담긴 감정은 분노.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은데, 대충 다 눈치를 챘구나.

하지만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 분노를 어디에 쏟아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부드러운 미소로 실비아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표정은 또 왜 그래요? 밥은 먹었어? 아델이랑 떡볶이 먹다가 실비아 씨 생각나서 1인분 더 샀는데... 데워줄까요?”

“.....”

실비아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리는구나.

내 지척까지 다가온 그녀는,

짜악­!

손을 휘둘러 내 뺨을 아주 강하게 쳤다.

여기까지가 실비아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강도의 폭력이로군.

정상적인 그녀였다면, 내가 타이라트임을 확인한 순간 변신하고 단검을 휘둘렀을 텐데...

아쉽게 됐다, 로사리오야.

이제 실비아의 영혼은 내 거다.

고개가 홱 돌아간 나는 잠시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이후 씩씩대는 실비아를 바라보며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아프네요.”

실비아가 반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급격하게 바뀐 내 분위기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평온한 표정에 섬뜩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 타이라트...! 이 개새끼...!”

너만 욕 나오냐? 나도 욕하고 싶어.

지금까지 개고생을 하면서 널 유혹했는데, 심지가 너무 굳잖아.

나도 대놓고 확 지르긴 싫었어. 네가 자연스럽게 떨어지길 원했지.

이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마왕님은 눈물이 막 나오려고 하네?

입 안이 터졌는지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난 말없이 허공에 손을 뻗어 마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휴게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 안에서부터 수건이 날아왔다.

그것을 낚아챈 나는 태연히 입가를 닦아냈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실비아가 말을 더듬었다.

“미, 미친놈...!”

왜? 대놓고 나 타이라트요... 하니까 어이가 없어?

입을 오물거린 내가 말했다.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던 일입니다. 실비아 씨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제가 통제하고 있었죠. 실비아 씨가 평생 모르게끔 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왜 제가 넌지시 힌트를 드렸을까요?”

내 정체는 네가 알아낸 게 아니라, 내가 간접적인 힌트를 줘서 밝힐 수 있었던 거야.

너도 알잖아.

“입 닥쳐! 죽여 버리겠어!”

“그래요?”

수건을 뒤로 휙 던진 나는, 양팔을 좌우로 넓게 벌렸다.

그것도 모자라 가슴을 살짝 내밀면서 실비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실비아 씨의 숙원이니까, 죽어드릴게요.”

“무, 뭐...?”

기세가 팍 죽은 실비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설마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 소중한 로사리오의 신탁을 받았잖습니까.”

실비아가 아무리 내게 속았다고 생각해봤자, 로사리오를 원망하는 마음은 어디 가지 않는다.

로사리오 때문에 무척 힘들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엔, 로사리오 따위보다 내 존재의 무게감이 더욱,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지금 실비아가 화난 건 배신감 때문이다.

타이라트가 옆에 있었다는 부분에서 혐오감, 분노를 느낀 게 아니라, 내가 이때까지 거짓말을 해서 실망한 거다.

만약 날 적으로 생각했다면, 대화를 나누려 하지도 않았을 테지.

“비꼬지 마! 넌 날...!”

“비꼰 게 아닙니다. 그리고 속여서 미안해요. 그래선 안 됐는데.”

“.....”

입을 앙다문 실비아.

그런 실비아의 곁으로 한걸음 다가가자, 그녀가 내 보폭만큼 뒤로 물러났다.

한손을 가슴께에 둔 채로 물러서는 모습이 청초한 숙녀가 겁을 먹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거 예전에 요식업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구나.

그때도 튕기다가 벽까지 물러났었고, 결국 입술을 내어주었었는데... 이번에도 똑같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면 가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던가?

나는 묵묵히,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실비아를 벽으로 몰았다.

그 뒤 실비아의 아랫배를 향해 한손을 약간 뻗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불안한 듯 눈을 데굴 굴리던 그녀는,

“허억...!”

어깨를 바싹 세운 채로 다리를 오므렸다.

아랫배를 꽉 누른 그녀가 원망스런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무, 문신... 이거 하지 마... 당장... 치워...”

아아... 저 톡 밀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

너무 좋아. 사랑해, 실비아야.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