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화 〉 이것은 악몽인가, 길몽인가
* * *
나는 실비아를 연구실로 불렀다.
감수성이 충만해지는 새벽, 그리고 기계부품이 돌아가는 소리만 나는 연구실.
조명까지 진한 파란색인 이곳은, 실비아에게 굉장히 묘한 분위기를 느끼도록 할 터였다.
예상대로, 한달음에 달려온 실비아는 연구실 문이 열리자마자 우뚝 멈췄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머뭇머뭇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 왔어...”
그녀를 향해 미소로 화답한 나는 손을 내밀었다.
“디바이스.”
“디바이스? 아... 여기...”
부랴부랴 손목에 있는 디바이스를 풀더니 내게 내미는 실비아.
순종적인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다.
수줍은 표정도 마찬가지. 기분이 업 되고 부끄럼을 타는 실비아의 얼굴은 정말 예뻤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약간 하얘진 듯한데... 이건 착각인가?
타락 직전까지 간 상태이니만큼 플러스 요소가 더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상은 없네요. 충전이 다 된 것만 빼면.”
디바이스를 대충 훑어보는 시늉만 한 나는, 그걸 실비아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그러자 실비아가 팔을 움찔 떨었다.
원래는 이런 간단한 스킨십엔 미동이 없는 편이었는데도 이러는 걸 보면, 마사지룸에서의 관계가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디바이스가 잘 채워졌나 확인해본 실비아가 말했다.
“어, 어차피 다시 소모하면 되니까... 괜찮아...”
“뭐... 그렇죠. 잠은 잘 잤어요?”
“잘 잤어...”
“밥은 먹었고?”
“응... 아델이 스파게티 만들어줬어.”
“다행이네요. 멀뚱히 서있지 말고 앉아요.”
옆에 있는 의자를 내 지척까지 당겨와 툭툭 치자, 실비아가 자리에 앉는다.
모은 다리 위에 손을 포갠, 숙녀처럼 다소곳한 자세였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나는 실비아의 손을 잡고 내 가슴팍으로 당겨왔다.
이후 그녀의 윤기가 나는 손톱을 살살 문질렀다.
“손톱 관리했어?”
“응... 밥 다 먹고 아델이 해줬는데... 어때?”
“예쁘게 했네요. 나중에 보라색으로 칠해요.”
“보라색...? 왜 하필 보라색이야?”
왜긴. 내 상징색이니까 그렇지.
너도 좋아할 거다.
“싫어요?”
“아, 아냐...! 보라색으로 할게...”
실비아의 똥그란 눈동자가 날 주시한다.
격렬한 관계를 가진 그날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태연한 모습이 신기한 모양.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실비아의 손등을 입술로 가져간 내가 거기 키스를 해주자, 그녀가 무척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푹 수그렸기 때문이다.
너는 이제부터 거짓말 같은 건 못하겠다.
물론 이젠 누굴 속인다느니 하는 일은 할 필요가 없게 됐지만, 눈에 감정이 다 드러나서 알기가 너무 쉬워.
잠시간 손등을 만지작거리던 내가 말했다.
“일 하나 해줘요.”
“일...? 또 돈 받는 일이야? 누구한테 떼먹힌 거 있어?”
“그건 아니고, 세계연합에서 저희 본부를 물어뜯고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놈들이 있어요.”
“세, 세계연합에서...? 왜...?”
“본부 이미지를 깎아내려서 국가 영향력을 좀 키워놓으려는 심보에요. 쓰레기들이죠.”
뿌득하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내 말에 공감하고 화가 난 실비아가 이빨을 간 것이다.
아주 좋은 현상이었다.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
히죽 웃은 나는 실비아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입막음을 할 건데, 실비아 씨가 처리해줬으면 좋겠어.”
“응. 내가 할게. 어떻게 하면 돼?”
“더 이상 그런 고약한 공작을 벌이지 못할 정도로만 만들면 돼요. 판단은 실비아 씨에게 맡길게요.”
네 안의 화를 폭발시켜.
지금까지 쌓인 거 많았잖아.
주제도 모르는 괘씸한 연놈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주고 싶었잖아.
한 번 맛 들리면 또 하고 싶을 거야.
“아무렇게나? 내 식대로 처리해?”
“네. 어떤 식으로 처리하든 상관없어. 뒤처리는 나랑 박사님이 할게요.”
“박사님도 아셔?”
“박사님이 먼저 말해준 정보에요. 동의도 물론 했고.”
“화가 많이 나셨나보다... 박사님이 이럴 정도면... 그치...?”
“여태 많이 참으시긴 했죠.”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린 실비아가 물었다.
“언제 가?”
“원하실 때 가요. 다만 너무 늦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설마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실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돼...? 급한 거 아니야...?”
“급하긴 하죠. 하지만 그것보단 실비아 씨의 마음이 더 중요해요. 그냥 내킬 때 저한테 호의를 베풀어주세요.”
“내 마음...”
최면이라도 걸린 사람마냥 그 말을 되뇌는 실비아.
그녀의 입가가 쭉 찢어졌다.
동시에 그녀가 자신의 아랫배로 손을 올렸다.
내게 동화되고자 하는 실비아의 강인한 마음.
그것에 감응한 음문이 모습을 드러나려고 하면서 배를 후끈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은 나타나선 안 된다.’
거의 다 넘어오긴 했지만... 아직은 이르다.
지금부터 시작될 마지막 공정 전에는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 맞다.
나는 실비아의 손목을 잡아채고, 그녀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실비아가 입은 딱 달라붙는 니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아...♡”
높은 톤의 신음을 터뜨리는 그녀.
그녀의 하반신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이 허벅지를 통해 전해져온다.
긴장이 완전히 풀려버린 실비아를 토닥여주던 내가 물었다.
“이젠 괜찮죠?”
“.... 응... 괜찮아졌어...”
“언제라도 상관없으니까, 준비가 됐다 싶으면 박사님한테 연락해서 같이 가세요. 알았죠?”
“알았어...”
난 이번엔 실비아의 바지 안으로 손을 넣어, 팬티 위로 봉긋하게 튀어나온 그녀의 음렬을 지그시 눌렀다.
그 상태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살살 풀어주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허어억...♡”
잔뜩 오므린 그녀의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진동했다.
이젠 키스마크를 만들어도 전혀 상관없겠다, 난 마음 놓고 실비아의 뒷목을 쪽쪽 빨아댔다.
그리고 실비아는,
“지... 혁아아...”
간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쾌락에 빠져 들어갔다.
순식간에 촉촉해져오는 보지하며, 교태 섞인 목소리하며...
넌 정의로운 용사도 어울리지만, 타락하는 게 훨씬 더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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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관계를 인정받아서 좋은 것 중 하나는, 키스마크를 가릴 필요가 없다는 거다.
이젠 아델에게 들킬까봐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는 부분이 무척 기뻤다.
대신, 아델의 애정이 섞인 폭력을 받아야했다.
찰싹!
당당하게 머리를 틀어 묶은 채로 밥을 먹고 있던 실비아는, 자신의 뒷목을 약하게 친 아델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아델이 그녀 특유의 귀여운 한숨을 내쉬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제가 참아야지요. 별 수 있나요?”
“미안...”
“예전에 파스를 붙이거나 했던 것도 다 절 속이기 위함이었지요?”
“그... 미안...”
“제가 뒷목을 살펴보려 했을 때, 무시무시한 말투로 절 쫓아냈던 것도 언니의 계획이었구요.”
“.... 미안...”
“지혁 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지요?”
엄밀히 말하면 지혁이 먼저 자신을 꼬셨다.
하지만 이는 핑계일 뿐이었다.
한쪽에만 마음이 있다고 남녀 간에 정분이 일어나지는 않으니까.
괜한 말로 아델의 화를 돋우는 것보단, 그저 사과만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게... 진짜 미안해...”
“아휴... 지혁 씨 간수를 잘 하지 못한 제 탓도 있지요.”
“아, 아냐...! 네 탓은 전혀 없어.”
손사래를 치기까지 하는 실비아.
그녀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은 아델이 TV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앵커가 심각한 목소리로 어제 떠들썩했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몇 달 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동기 살인미수사건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사건의 범인인 이 모 씨는 징역 2년을 구형받았습니다. 검찰은 이 모 씨의 정신병력과, 반성하고 있는 태도 등의 이유로…….]
아델이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세상이 참 이상해요. 가해자는 저런 반인륜적인 짓을 저지르고도 고작 징역 2년만 구형받고, 피해자는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야하다니... 불공평하지 않나요? 가해자는 분명히 돈이 많은 집안의 자제일 거예요.”
[이 모 씨는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한 중견기업의 손자로, 대학 동기가 평소 참견이 심했다는 것을 이유로…….]
“저것 보셔요. 아휴... 저희가 열심히 지구를 지키면 뭐하나요? 저런 천한 것들이 존재하여 세상을 썩어가도록 만들고 있는데 말이에요.”
“.....”
실비아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델의 한탄을 들으니 갑작스레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솟아나고 있는 욕망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깨뜨리고 싶다, 부서뜨리고 싶다, 망가뜨리고 싶다.
온갖 파괴적인 욕구가 뇌리에 팍팍 박혔다.
‘쓰레기 같은 새끼...’
그녀는 지금 자신의 감정이 무척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이러한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뉴스에 나오고 있는 저 천한 놈 때문이다.
넘쳐나는 돈만 믿고, 인맥을 동원해 감형을 받은 쓰레기,
동급생의 아킬레스건을 끊어 불구로 만든 저 죽어 마땅할 쓰레기와, 세상에 썩어나는 염치없는 인간들 때문에 화가 난 거다.
이 분노는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감정이다. 깊게 생각할 거리가 아니었다.
“하아... 하아...”
노기를 잠재우려하던 실비아가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떴다.
눈가에 시큰한 느낌이 일었기 때문.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아델이 초코우유를 가지고 와 빨대를 꼽았고, 실비아의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하여도 집 안에 있는 기물을 파손해서는 안 되어요. 아시지요?”
“.... 알아...”
“자, 한 모금 쭉 들이키시고 진정하도록 하셔요.”
아델의 말대로 초코우유를 쪽 빨아들인 실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단 음료를 먹어서 그런가? 머릿속이 차가워지면서 열화와도 같던 감정이 가라앉는다.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지혁이 말했던 그놈을 생각하니 다시금 화가 난다.
지구를 수호해주고 있는 본부는 성역이다.
그런 본부를 깎아내리면서 중상모략을 저지르는 놈이 있다?
몰염치, 안면몰수가 도를 지나쳤다.
천벌을 내려주어야 한다.
지혁은 실비아 자신이 내킬 때 움직이라고 했다.
그리고 실비아는, 그 내킬 때가 지금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암세포들은 보이자마자 처리하는 게 좋았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아델, 나 내일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어딜요?”
“오늘 지혁이가 그랬었어. 본부를 욕한 사람이 있다고.”
“아... 그 천것은 저도 알아요. 처리하러 가시려구요?”
천것이라... 아델다운 단어선택이었고, 공감이 갔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실비아가 대답했다.
“응. 빨리 끝내놓고 마음 편히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렇군요. 같이 갈까요?”
같이 간다고? 절대 안 된다.
아델은 마음이 무척 약하다.
자신이 사람을 패는 모습을 본다면... 아니, 그 이상 가는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다면 혼절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델의 심리에도 영향이 갈 테니, 간다고 바락바락 우긴다 해도 거절할 것이다.
“아니, 마음만 받을게. 절대 따라올 생각은 마. 너는 집에서 푹 쉬고 있으면 돼.”
“으음... 언니가 이토록 단호하니 어쩔 수 없지요. 대신 빨리 오셔야 해요.”
“물론이야.”
생긋 웃은 실비아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수신자는 박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