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9 반골의 아이테르답다 #2
[딱히 이상은 없는 것 같다.]
[같은 생각이다.]
박사와 마르셀라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두 사람과 함께 꼼꼼히 아이테르를 검사한 나는 시간을 보았다.
새벽 네 시. 규칙적인 생활을 중시하는 실비아라면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실비아에게 전화를 건 나는, 신호음이 한 차례 가기도 전에 툭 끊기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응, 어떻게 됐어?
휴대폰 너머로 잔뜩 기대하고 있는 실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테르 소모 계획이 그렇게 좋냐? 섭섭하게.
“일단은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번에 그 모텔로 오세요.”
-그 모텔? 무인 모텔?
“예. 거기서 실험할 생각이에요.”
-바로 갈게. 20분이면 될 것 같아.
전화를 끊은 나는 모텔 근처로 포탈을 탔다.
이후 객실을 예약하고 주차장 앞에 서있었다.
사랑을 나누기 위해 들락날락하는 커플들이 보인다.
혼자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검은 가방을 매거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년놈들.
눈 밑이 퀭한 것이 딱 봐도 마약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들이었다.
지금 내가 예약한 객실도 천장을 뜯어보면 주사기가 수두룩하게 나올 테지.
그렇게 다양한 인간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저 멀리서 보이는 실비아의 형체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면 비중이 높은, 배꼽 바로 아랫부분까지 가리는 회색 조거팬츠와 새하얀 운동화.
안 그래도 훤칠한 사람이 입으면 어울리는데, 실비아 같은 여자가 입으니 핏이 산다.
여기서 같은 브랜드의 긴팔 티셔츠와, 검은색 플리스 재킷과 모자,
옅은 화장기가 감도는 얼굴에 새빨간 립스틱...
원룸촌에서 볼 수 있는, 예쁘지만 어딘지 모르게 무서워 보이는 누나 스타일이었다.
여러 남자들의 남심을 홀리는 기센 누나 말이다.
하지만 내 앞에선 무척 순종적인... 이거 꼴린다.
“지혁아!”
다소 큰 목소리로 날 부른 실비아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런 실비아에게 어깨동무를 한 내가 그녀를 안쪽으로 끌고 오며 타박했다.
“누가 이렇게 입고 오래?”
“왜 또 난리야...?”
“마음에 들어서요. 여기서 박고 싶어.”
“미, 미친놈 아니야...? 그딴 발정 난 소리 좀 그만해...!”
지긋지긋하다는 듯 날 밀어내는 실비아였다.
실제로 발정 난 상태니까 이러지. 내 마음도 몰라주고 너무하네.
그녀의 돌아간 모자를 원래대로 돌려놓은 내가 말했다.
“들어가요.”
“방 잡아놨어?”
“응.”
“디바이스부터 줘. 빨리 차고 싶어. 없으면 엄청 허전하단 말이야.”
손을 내미는 모습이 간식을 내놓으라는 고양이 같다.
피식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가서 줄게요.”
“지금 줘.”
“들어가서 준다고 했어요.”
아랫입술 일부를 깨문 채로 날 노려보는 실비아.
대들고는 싶은데, 단호한 내 눈치를 살피고 그저 속으로만 투덜거리는 것 같은 저 표정이 너무나도 꼴린다.
음흉한 미소를 지은 나는 실비아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손.”
“.....”
“손.”
마지못해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는 것까지...
의상, 표정, 그리고 태도가 삼위일체를 이뤄 만족감을 선사해준다.
다른 손으로 실비아의 턱 아래를 살살 긁어주자, 그녀가 경기를 일으키며 날 친다.
“진짜 미쳤냐고...! 왜 이러는데...! 내가 개야?”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죠.”
“그, 그딴 말로 넘어갈 생각하지 마. 사랑하면 날 막대해도 되는 거야?”
“누가 실비아 씨를 막대했다고 그래요. 서운하게 말씀하시네?”
“.... 됐어. 지금 우리 이럴 시간 없잖아. 얼른 들어가자.”
“사과먼저 해요.”
실비아가 발끈했다.
“사과는 내가 먼저 받아야 맞는 거 아니야?”
“왜요? 애정 표현한 게 기분 나빴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네. 사과해요.”
“싫어.”
이렇게 티격태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실비아의 틱틱거림은 아델과는 또 다른 상큼한 맛이 있어.
나는 실비아의 모자를 위로 재끼고, 그녀의 널따란 이마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얼굴이 붉게 물든 실비아가 모자를 푹 눌러썼다.
“하지 마...”
말투에 애교가 가득하다.
언제나 날카롭던 네 심경의 변화... 너무 좋아.
“갈까요?”
“가... 빨리 가. 화낸다?”
그만 놀려야겠다. 이러다 한 대 맞을라.
실비아의 손을 잡아끈 나는 그녀를 방으로 데려갔다.
이후 디바이스를 손목에 채워주려다가 멈칫했다.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이 눈앞에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잘 동화되리라는 확신이 있긴 하지만, 혹시나... 아주 혹시나 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다.
“왜 그래?”
실비아의 물음.
고개를 가로저은 내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손목이 예뻐서요.”
“너 오늘 진짜 이상해... 알고 있지?”
“그래 보여요? 착각하셨네.”
“손도 떠는 것 같고... 긴장했어? 아이테르를 다 쓰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눈썰미는 쓸데없이 좋지만 머리는 별로네.
네 입장에서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없이 실비아의 손목에 디바이스를 채운 나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후 팔짱을 낀 채 태연한 얼굴로 실비아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그녀.
일단 첫 번째는 통과다.
“변신해보세요.”
“벌써 시작해?”
“아깐 똥마려운 개 마냥 재촉했으면서 웬 태평한 소리에요?”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아... 알았어.”
한심한 눈으로 날 쳐다본 실비아가 디바이스를 두 번 터치했다.
화아악-!
푸르스름한 모텔방 안을 환하게 비추는 연홍색 빛.
그 가운데에 슈트 차림을 한 실비아가 환히 웃고 있었다.
이상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혹시 모른다.
음습한 속내를 감춘 내가 말했다.
“오늘은 30퍼센트만 사용할 겁니다.”
“응.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나?”
“그래야죠.”
“손 잡아주면 안 돼?”
어제부터 왜 이렇게 소녀 같냐.
실소를 터뜨린 나는 실비아의 손을 잡으려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손을 내려 둔부를 만지려고 했다.
찰싹!
곧바로 날아오는 응징.
혀를 찬 실비아가 날 나무랐다.
“뭐하는 거야...! 아이테르 에너지를 소모하려면...”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어쩌냐... 난 너와 목적 자체가 다른데.
“만지고 싶은데 어떡해요.”
“다음에 하자. 내가 진짜 잘해줄게.”
“뭐 어떻게 잘해줄 건데요? 빨아주려고?”
모텔 앞에서처럼 불그스름해진 실비아의 뺨.
디바이스에선 우웅...! 하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가 이내 멈췄다.
충전이 됐다가 중지된 것이다.
황당함에 입을 살짝 벌린 내가 물었다.
“설마 지금 내가 했던 말을 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한 거예요?”
“.....”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오물거리며 침대에 걸터앉는 실비아였다.
너도 어지간히 변태였구나. 어이가 없다.
@@
일출로 인해 누르스름해진 하늘.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지혁이 데려다준다는 것을 거절하길 참 잘했다 싶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길을 걷던 실비아는,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성당으로 향했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렸는지 도로가 새하얗다.
걸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나서 귀가 즐겁다.
첫눈은 아니지만, 아델의 행성에서 보았던 설원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음이 설렌다.
지혁이라는 사람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새 성당 입구까지 도착한 실비아는, 문 앞에서 눈을 쓸고 있던 신부가 자신을 바라보자 안색을 활짝 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실비아 리즈 자매님.”
“자유기도를 드리고자 하는데...”
“지금 들어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에게 꾸벅 인사를 한 실비아는, 깔아둔 발판에 눈을 털고 안으로 들어갔다.
히터는 틀어져있지 않지만 따뜻하다고 느껴진다.
신의 은총을 받은 성당이라서 그런가보다.
실비아는 가장 구석자리에 앉았다.
항상 구석이었다. 성당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시설에서도.
왜냐? 다른 신을 모시는 장소에서 로사리오에게 기도를 드리자니 미안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하느님. 정말 죄송해요.’
오늘도 여느 때처럼 성당의 주님에게 사죄를 한 실비아는 기도손을 한 채 눈을 감았다.
움찔.
그때, 기감에 이상한 무언가가 잡혔다.
‘응?’
규칙적인 심박기가 일순 요동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질적인 감각이 가슴속을 덮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뭔가 찡한 느낌도 있는 듯했다.
심장에 무리라도 온 것처럼.
‘뭐지...?’
무어라 자세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비유를 하자면, 점액이 가득한 지렁이가 온몸을 훑고 가는 느낌이었다.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약간 거슬리기만 했을 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기에, 실비아는 곧 기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동도 없이 한 시간가량 기도를 드리고 밖으로 나오는데, 한 남자가 자신을 불렀다.
“저기요.”
성당에서 가끔 보던 남자였다.
눈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의.
여기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기도를 드리는 중간에 온 듯했다.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인 그가 실비아의 손을 살폈다.
커플링, 혹은 결혼반지가 있는지 확인해보려는 행동이었다.
스캔을 끝낸 남자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오며가며 보다가... 오늘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목소리도 중저음이라 꽤 좋았고, 스타일도 괜찮은 남자였다.
교회, 성당오빠로 인기를 끌 것 같은.
하지만 실비아의 눈엔 그저 불나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가나 있는, 그런 벌레.
자신에게 연락처를 따러 오는 남자들은 무척 많았다.
그럴 때마다 상처를 주기 싫어 공손히 거절하고 돌려보냈었는데, 오늘은 그러기가 싫었다.
지긋지긋하다고 해야 하나? 단호하게 거절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아뇨.”
정색한 실비아의 대답에, 남자의 기가 팍 죽었다.
“죄, 죄송합니다.”
더듬거리며 사과를 한 그는 곧 도망치듯 성당을 빠져나갔다.
헛웃음을 켠 실비아 또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방금 보였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보았다.
‘내가 조금 냉정하게 굴었나...?’
아니, 자신의 행동은 정당했다.
왜? 한 번 거절당해도 집요하게 쫓아오는 남자들이 많았으니까.
주제 넘는 하룻강아지들이 물기 전에 예방교육을 한 것뿐이다.
그런 식으로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실비아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지혁에게 문자를 남겨놓았다.
[에너지만 다 소모하면 네가 바라는 건 뭐든지 할게. 사랑해, 지혁아.]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그거 그냥 농담이었어요. 나도 사랑해.]
그는 농담일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빚쟁이의 집에 찾아가, 그를 기절시켰을 때처럼.
[가슴 보여줘요.]
이어진 지혁의 문자를 본 실비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번부터 계속 가슴... 가슴...
크지도 않은 이 가슴이 그리도 좋은가? 황당하다.
‘못 말리겠네... 진짜...’
주위를 두리번거린 실비아는 인적이 뜸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이후 거기서 외투를 벗고, 티셔츠의 넥 부분을 손가락으로 걸고 밑으로 쭉 당겼다.
그 상태에서 턱과 상체 부분만 보이도록 셀카를 찍어 지혁에게 보냈다.
[됐어?]
[팬티도.]
반응을 보아하니 매우 만족한 듯했다.
[모텔에서 봤잖아...]
[또 볼래요.]
[집에 들어가서 보여줄게... 여기 밖이라서 엄청 쪽팔려.]
[그럼 10분 안에 도착하고, 사진 말고 동영상으로 보내요.]
지혁의 이러한 재촉이 좋다.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껴지니까.
[알았어.]
그의 명령을 기쁜 마음으로 따르는 자신이 웃기기도 했지만,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휴대폰을 집어넣은 실비아는 곧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방금 사진을 보낼 때, 혀까지 내밀 걸 그랬나?
그럼 너무 천박해 보였으려나?
지혁과 관련된 온갖 생각을 하던 그녀는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사랑도 깊어지고...
환상적인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금 연락처를 따려고 했던 그놈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