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9 믿음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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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흐으윽...!”
온몸에 피칠갑을 한 인간들이 앞에서 살려 달라 웅얼거리고 있다.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방 안은 그들이 흘린 선혈로 인해 시뻘겋게 변한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왜 자신에게 이러는 걸까?
“저리 갓...! 가버려!”
손을 휘휘 저어보았지만 허사.
인간들이 뻗은 팔은 실체가 없었다.
마치 유령처럼 말이다.
무서웠다.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지혁은 어디 있는 걸까? 저 하찮은 것들에게서 자신을 구해줬으면 좋겠다.
안아주며 달콤한 말로 사랑한다 해줬으면 좋겠다.
“지혁 씨! 지혁 씨이이!!”
고래고래 소리쳐 지혁을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들의 화만 돋운 듯했다.
“그어어어어...!”
이젠 좀비마냥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접근하는 인간들.
너무 싫다... 더럽고 천박한 것들!
증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아델은,
“네가... 네가 죽였어...”
한 인간의 말에 흠칫했다.
죽였다고? 내가? 너희들을?
정말...?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고 혼을 내려던 아델은, 자신의 머릿속에 어떠한 장면이 재생되자 온몸이 굳어버렸다.
복부가 꿰뚫려 절명한 남자, 몸과 분리되어 날아가는 여자의 머리통...
깨진 유리조각이 온 얼굴에 박혀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남자...
“아아...! 아아아아아...!!”
건물 안에서 있었던 일이 모두 생각난 아델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살인... 살인을 했다.
손에 느낌이 생생하다.
이 손으로... 이 추악한 손으로 열 명이 넘는 인간들을 죽였다.
“내가... 나는... 아앗...!”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어마어마한 죄악감이 자신의 이성을 붙들고 있다.
로사리오교에서 가장 조심스럽고, 금기시되는 규율을 저버리고 말았다.
눈을 감은 아델은 신성력을 일으켰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언제든 자신의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었던 신성한 힘은 부름에 답해주지 않았다.
“왜, 왜 이래...!”
급박해진 아델이 디바이스를 두 번 터치했다.
허나 변신조차도 되지 않았다.
안 된다... 이대로 가다간 미쳐버리고 말아.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한다... 그래, 기도하자.
“저, 저저, 저저저저전능하신 로사리오 님이시여...”
이빨을 딱딱거리며 기도문을 읊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를 드려 봐도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무엇이든 해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믿음마저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 저를 악에게서 구원하시어... 흐아아...! 시러...! 저리 가! 이 하찮은 것들!”
“네가... 우릴...”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살려주셔요!”
“용서받지 못한다...”
“시러요...! 날 용서해! 명령이얏! 지혁 씨! 어디 가써요...! 나 무서워... 흐아아아앙!”
울음보를 터뜨린 아델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그냥 달렸다.
그러다가 딱딱한 무언가에 머리를 박았다.
쿵!
“악!”
엉덩방아를 찧은 아델이 이를 악물었다.
“이노옴...! 감힛...!”
아무리 하찮기 그지없는 것들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모양새가 볼품이 없기로서니, 감히 신의 앞길을 막다니!
도망부터 다 쳐놓고 즉각 처벌해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아주 잘생긴 남자가 자신에게 미소를 짓고 있자 고개를 갸웃했다.
“으응...?”
“저에요, 아델.”
그 남자는 자신이 애타게 찾던 지혁이었다.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다니, 마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지혁 씨...?”
“네. 지혁이에요. 악몽을 꾸셨나봅니다.”
“악몽...?”
그러고 보니 눈앞의 분위기가 달랐다.
자신이 있던 장소는 온통 순백색의 방이었다.
하지만 여긴 파란색 광택이 흐르는 타일로 된 된 천장, 가운데에 흰색 전등이 있었다.
모던한 디자인으로 인테리어가 된 이 장소는 자신이 익히 아는 곳이었다.
연구실의 휴게실 말이다.
아... 꿈을 꾼 것이로구나. 다행이다...
아까 낮잠을 잘 때도 그렇고... 요새 악몽을 많이 꾸는 기분이다.
코를 훌쩍인 아델이 지혁의 부축을 받아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혁 씨... 괜찮아요...?”
“네, 아델 덕분입니다. 아델은 어때요?”
“전 괜찮...”
괜찮다고 말하려던 아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건물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생각났기 때문.
“괜찮지 않아요... 제가... 제가 미쳐서... 사람들을... 흐으윽...!”
울먹거리기 시작한 아델을, 지혁이 꼬옥 안아주었다.
“아델이 아니었다면 전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아델을 치료한 직후 저도 의료기기에 들어갔었는데, 뇌의 도파민 수치가 엄청났고, 재흡수도 안 되는 상태였어요. 아델 덕분에 산 겁니다.”
어려운 말이라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자신 덕에 살았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마음이 아프다는 점이다.
“무서워요...! 점점 제가 아니게 되어가는 것 같아요... 이성을 잃어버렸었어요... 끔찍해... 생생해요... 사람들이 피를 막 흘리구...”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곡하기 직전까지 온 아델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디바이스를 터치했다.
하지만 아이테르는 꿈에서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아델이 디바이스를 손목에서 풀고는 지혁에게 내밀었다.
“지혁 씨... 디바이스가 고장 났나 봐요... 고쳐주셔요...”
“고장 나지 않았습니다.”
“고장 나써요... 변신이 안 돼요... 빨리...!”
디바이스를 든 손을 마구 흔들며 떼를 쓰는 아델.
지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디바이스는 정상입니다. 아델이 변신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아델이 가진 마음가짐 때문이에요.”
“으응...? 무슨 소리셔요...?”
“일단 코부터 풀죠. 자, 킁 하세요.”
티슈를 뽑은 지혁이 아델의 양쪽 콧방울을 감쌌다.
급해 죽겠는데 코를 풀라니!
자신이 무슨 어린애인 줄 아는가!
“크으으으응!”
힘차게 코를 푼 아델은, 자신의 혼란스럽던 마음이 안정되어 옴을 느끼자 신기해했다.
흐으음...! 이 정도면 변신까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지혁의 옷을 쭉 잡아당겨 코를 닦아낸 아델이 물었다.
“무슨 마음가짐이요...?”
콧물로 적셔진 휴지를 휴지통에 집어넣은 지혁이 아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델은 아까 있었던 살인행위를 정의에서 어긋난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이건 또 뭔 소리람?
살인은 당연히 정의에서 한참 벗어난 중범죄이지 않은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아델에게, 지혁이 방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 마음 때문에 아이테르가 반응하지 않은 겁니다. 저를 죽일 뻔한 그 나쁜 놈들을 인간이라고 취급해주고 있으니까요.”
“그, 그런가요...?”
“네. 그들은 절 위협하고, 강제로 쾌락에 빠뜨린 나쁜 놈들입니다. 아델이 행한 일은 정의로운 일이었어요.”
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 년놈들은 지혁을 죽일 뻔했고, 강제로 낯부끄러운 행위도 했다.
자신은 유일신인 지혁을 지키기 위해, 그의 성녀이자 동반자로서 당연한 행동을 한 것뿐이었다.
“저는... 정당한 일을 했어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아델은 살인이 아니라 그저 식용 가축을 도살... 아니, 꽃의 자당에 이끌린 날파리들을 쫓아내기만 했어요. 그들은 그 정도로 하찮은 천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신경을 쓰면서 심란해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마음이 아까보다 더욱 안정되어간다.
그렇다, 이렇게 힘들어할 일이 아니다.
자신은 옳은 일을 했다. 벌레들을 쫓아내는 일.
“으응... 맞아요...”
표정을 푼 아델이 저리 대답하자, 지혁이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마음의 정리가 된 것 같네요. 하지만 아직 미련이 남아있어요. 그렇죠?”
정확했다.
아무리 천것들을 죽인 일을 가벼운 일이라 생각한다 하여도,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지금까지 그 벌레들을 인간이라고, 고등 생명체라고, 지켜야할 존재라고 생각해왔었으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훤히 꿰뚫고 있는 지혁에게 동경심 어린 눈빛을 한 아델.
그녀가 허겁지겁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 맞아요...!”
“제가 저번에 그랬죠? 여름 모기를 잡으면 기분이 좋지 않냐고요.”
“네! 그랬어요!”
“피를 빨아 뚱뚱해진 모기를 터뜨리면 아주 시원하잖아요. 아델도 그렇게 느껴야합니다. 인간들은 그런 모기보다 못한 존재에요. 아델도 그렇게 생각해왔잖습니까.”
“으음...! 그건 그래요.”
“그 근본 없는 것들이 감히 성체에 손을 대었습니다. 모기처럼 달라붙어 성혈을 빨아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주제를 넘어도 한참 넘었죠.”
아델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그렇다! 그들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 지혁의 성체에 손을 댄 것도 모자라, 천민들의 세계에서나 사용하는 마약까지 강제로 주입했다.
게다가 신의 성액을 받기 위해 옷을 벗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천박한...!”
“그래요. 그 천박한 것들에게 아델이 직접 행차하시어 신의 처벌을 내렸습니다. 아주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군요.”
“음음...!”
지혁의 말에 깊은 공감을 한 아델이 생각했다.
이번 일은 지구를 도와준 것과도 같다고 말이다.
그 천것들은 성체에 손을 대어 음모를 꾸몄다.
그래서 그런 재활용도 안 되는 폐기물들을 친히 소멸시켜주었다.
지구의 환경을 보존시켜준 것이다.
그러니 아파해야할 게 아니라, 기뻐해야한다. 시원해야한다.
“저는 자비를 베풀어주었어요...! 지옥보다도 더 깊은 무저갱 속에서 억겁의 시간을 고통받아야하는 그것들에게...”
“맞습니다. 죽음이라는 자비를 베풀어주셨죠. 그것들도 아델에게 경외를 표하고 있을 겁니다. 곱게 죽여줘서 감사하다고요.”
칭찬을 들으니 턱 막힌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아델의 얼굴이 완전히 피자, 지혁이 등 뒤로 손을 빼 뒷짐을 졌다.
그리고는 잠깐 텀을 둔 후 히죽 웃었다.
“아델의 마음이 굳건해진 것이 느껴집니다. 이제 변신해보세요. 될 겁니다.”
“알겠어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편 아델이 디바이스를 터치했다.
그러자,
화아아악-!
금빛 기운이 쫙 퍼지면서, 순식간에 변신이 됐다.
자신의 몸을 살펴본 아델이 놀라선 눈을 크게 떴다.
“돼, 됐어요...! 변신이 됐어요!”
그뿐이랴? 신성력까지 느껴졌다.
마음가짐 하나만 바꾸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정상화되다니...
역시 지혁은 최고다.
“축하해요. 아델이라면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뜸을 들인 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아있네요.”
“네에...? 문제라니요? 그게 무엇이지요?”
“아델은 아직 제 마음과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쿠우우웅!
가슴속에서 돌덩이가 떨어졌다.
자신은 지혁의 영혼의 동반자다.
기운마저도 느낄 정도인데 동화되지 않았다니!?
“그럴 리가...!”
“안타깝지만 진실입니다. 아직 아델의 마음엔 미련이 남아있어요. 그것이 아델의 마음을 좀먹기 전에 제거하고자 합니다.”
지혁이 변신한 아델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진중한 투로 묻는다.
“절 믿으십니까?”
“당연히 믿지요...”
“저도 아델을 믿습니다. 오늘, 아델 스스로가 남아있는 미련을 훨훨 날려버릴 거라고 믿어요.”
말을 마친 지혁은 아델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침대가 있는 박사의 휴게실로 말이다.
그가 있었던 자리엔 망가진 기계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리모컨이었으리라고 생각되어지는...한 손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기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