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306화 (306/471)

EP.306 왕후의 자격 #2

이 음침한 공기... 너무 그리웠다.

마시면 마실수록 힘이 오르는 느낌이란 말이지.

칙칙한 마계의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박사의 허리를 팔로 둘렀다.

이런 내 손길에 놀랐는지 어깨를 달싹인 박사가 중얼거렸다.

“여, 여기가...”

“맞아, 마계야. 어때?”

“어떻고 자시고... 지구랑 너무 낯설어서 적응이 안 되는데... 그래도 공기는 좋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마계의 공기는 좋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박사는 내 권속이 됐다.

그로 인해 이 마계 특유의 기운을 지구의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누나는 잠깐 있다가 가. 지금 여긴 한창 어수선할 때니까.”

“아, 알았어...”

박사는 인간보다 강하다.

하지만 이 마계엔 박사보다 강한 존재들이 수두룩하다.

박사가 여기서 무력으로 제 몫을 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할 것이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고성 옆에 있는 숲.

메릴이 살고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메릴 특유의 발랄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유리아가 데리고 갔나?

무척 보고 싶어 했으니까 아마 그랬을 테지.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보는 박사와 함께 숲속을 거닐던 나는, 시간이 됐다 싶자 포탈을 열었다.

쩌어억-!

“이제 돌아가.”

“벌써...? 조금만 더 있고 싶은데...”

“위험하니까 가야돼. 우리 누나, 말 잘 들어야지?”

엉덩이를 토닥여주자 순식간에 얼굴이 벌개진 박사.

“네...”

수줍게 대답한 박사가 포탈에 반쯤 들어가다가 날 돌아보았다.

“금방 내려올 거지?”

“세화랑 유리아만 보고 갈게.”

“응... 사랑해요.”

박사의 농염한 사랑고백은 언제 들어도 귀가 즐겁단 말이지.

그녀와 애정이 담긴 키스를 나눈 나는, 포탈이 닫히는 것을 본 후 움직였다.

성으로, 내 충성스런 수하들이 반역자들에게 맞서기 위해 살고 있는 곳으로.

혼자라 위험할 듯싶지만 말파스 그 새끼는 여기서 한참 떨어진, 죽었던 아몬의 거성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또한 이곳은 내 영역이기도 하니 아무 일도 없을 터였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마계는 전부 내 땅인데 눈치를 보면서 움직여야하다니.

‘아델만 타락시키면... 니들은 다 뒤졌다.’

다시 다짐하지만, 절대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

시뻘건 카펫이 깔린 알현실 복도를 가로질러간 나는 자연스럽게 옥좌에 앉았다.

그러자 복도 양옆으로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A급, S급. 숨긴 내 마기를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강대한 녀석들이 속속들이 나타나는 장면은 썩 괜찮았다.

고요한 알현실 안을 둘러보던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마물을 바라보았다.

양 머리에 뿔이 달리고, 몸에서 후끈한 기운을 훅훅 뿜어내는 빨간 마물.

마계에서 가장 강대한 녀석 중 하나인 발록이었다.

비네가 발록은 변절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구나.

눈빛에 날 향한 충성심이 보인다.

기사도정신... 아주 훌륭하다.

마물들을 천천히, 모두 둘러본 내가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마왕님을 알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알현실 안이 흔들릴 정도의 큼지막한 외침.

패기가 마음에 든다.

너희들도 말파스 같은 근본 없는 놈이 마왕 자리에 오르는 건 싫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왕비들은 어디 있느냐?”

일부러 위엄을 보이기 위해 낸 중저음의 목소리에, 발록이 옥좌 앞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현재 전선에서 다친 마물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금방 오실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옥좌 양옆으로 포탈이 열리더니 세화와 유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아는 곧바로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세화가 제지하여 미수에 그쳤다.

세화의 그 행동을 본 나는 기꺼워할 수밖에 없었다.

저 행동은 내가 모두에게 할 말이 있음을 알아차렸기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상봉의 기쁨은 나중에.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세화의 눈은.

유리아 또한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리고는 금세 내 옆에 시립했다.

기쁘다. 세화가 진정 마계의 황후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두 사람을 사랑스런 눈으로 쳐다보던 나는 마물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선 목표를 심어주는 것이 좋다.

말파스의 모가지를 따는 것보다 먼 목표를.

잠깐 뜸을 들인 내가 입을 열었다.

“반역자를 처단한 후, 다섯 왕비가 날 섬기게 되면 신들의 세계로 간다. 그곳은 천계라고 불리는 장소지.”

동요하는 마물들.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니 당황한 것 같았다.

“신. 오만하고 건방진... 우주를 자신들의 발밑에 두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아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며, 영생을 누리지. 힘 또한 무척 강하다.”

동요 다음은 침묵이었다.

개미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조용해진 알현실.

씨익 웃은 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난 너희들의 힘을 믿는다. 천계로 가서 전부 빼앗고,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단 하나만 제외하면 너희들에게 제약은 없다.”

-....?

“천계의 주신, 로사리오만 내게 넘겨라. 그년만 빼면 나머지 신들은 너희 차지다. 고문해라, 약탈해라, 그리고 겁간해라.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신들을 묘상으로 만들어 신의 힘이 깃든 후손들을 낳도록 만들어라.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다 힘에 굴복하여 순종하는 모습을 즐겨라.”

알현실이 아까보다 훨씬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각종 음침한 기운이 알현실 전체를 뒤덮었다.

마물들이 흥분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가진 고유의 기운이 피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우린 그런 신들을 상대할 존재다. 우주의 끝에 낙원이 있다. 낙원에 도달할 때까지, 더 나아가 정복할 때까지 죽지 마라. 너희들은 내가 끝까지 데려간다. 알겠느냐?”

고오오오-!

온갖 개성을 지닌 마물들이 동시에 내뱉는 함성.

절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괴하다.

이 정도면 사기진작은 충분히 됐겠지.

만족스런 웃음을 흘린 나는 그들을 물렸다.

모든 마물들이 빠르게 사라지자, 세화와 유리아가 냅다 달려들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두 사람의 애정표현.

두 가슴 사이에 끼인 얼굴이 좋다며 으악을 부르짖고 있다.

양팔을 뻗어 두 사람의 허리를 두른 내가 물었다.

“전황은 어때?”

세화가 대답했다.

“상대는 저희가 수틀리면 포탈을 여는 걸 알아요. 그 때문에 엄청 조심스러워하고 있어.”

말파스 측은 아델과 실비아의 강함을 알고 있다.

특히 실비아를 무척 경계하고 있을 터였다.

아몬을 비롯한 S급 마물 세 마리를 결투로 정리했으니 그럴 수밖에.

이러면 생각 외로 일이 수월해질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점은, 말파스의 능력.

그 새끼가 수하 마물들을 희생시켜서 이상한 소원이라도 빌면 짜증날 것 같았다.

가령 아델과 실비아를 뛰어넘는 힘을 갖게 해달라든지 같은...

물론 말파스가 들어주는 소원은 부등가교환의 형태다.

반역자 측이 손해를 본다는 뜻.

더군다나 소원의 그릇에 비례해 희생도 커지겠지만, 어쨌든 경계해야함은 틀림없었다.

아직 말파스는 변절자들의 충심을 전부 얻지 못한 상태.

여기서 희생을 강요했다간 점수만 왕창 깎일 테니, 아직은 시간이 충분하다고 봐도 좋았다.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유리아를 쳐다보았다.

“메릴은?”

“여기 오자마자 데리고 왔어요. 지금은 방에 얌전히 있구요. 처음엔 절 알아보지 못해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많이 따르게 됐어요.”

“다행이네.”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나니 묵힌 것들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진작 들를 것 그랬다.

이제 남은 일은 아델과 실비아의 타락 뿐.

그 전에 조금 즐기긴 해야겠지.

유리아의 안쪽 허벅지를 부여잡고 쭈욱 잡아당기자,

“꺄아...♡”

그녀가 간드러지는 비명을 터뜨렸다.

섭 성향은 아직도 건재하구나.

이런 내 행동에, 세화가 투정을 부렸다.

“주인님...! 저도...! 제가 먼저에요...!”

행복하다, 행복해.

이 시간이 영원토록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세화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는 것을 시작으로 열심히 손을 놀렸다.

적당히 놀다 가야지.

@@

아델은 기가 찼다.

왜? 실비아가 자신의 곁에서 죽어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인상을 팍 구긴 그녀가 물었다.

“절 쫄래쫄래 따라다니시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쫄래쫄래라니... 왜 그렇게 서운하게 말해? 네가 좋으니까 붙어 있으려고 하는 거지...”

“여긴 집이에요. 저도 휴식을 취하고 싶단 말이에요. 요즘 너무 바빴어요.”

“왜? 왜 바빴는데?”

왜 바빴냐고? 지혁과 함께 우매한 인간들을 개도하느라 그랬다.

실비아도 이런 집착을 버리도록 빨리 신도... 아니, 사도로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평화를 위해 기도하느라 힘들었어요.”

“정말? 진짜 잘됐다...!”

물개박수를 치는 실비아.

헛웃음을 켠 아델이 손을 휘저었다.

“언니도 참 주책이셔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다.

가만 보면 실비아는 자신보다 더욱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헬릭스의 간계에 당해버린 것이겠지. 한심하게도...

“아휴...”

“왜 한숨을 쉬고 그래? 박사님 때문이야? 아직도 꿍해있는 거니?”

실비아 걱정을 하고 있는데 박사를 들먹이다니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아직도 꿍해있냐니... 잘못은 명명백백히 박사가 먼저 저지른 건데!

자신과 함께 차원까지 이동한 사람이면서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기분 나쁘다.

아델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자, 실비아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배고프지 않아? 뭐라도 먹을래?”

음...!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긴 하다.

식욕이 있다는 건, 아직 자신이 완전한 신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

입맛을 찹찹 다신 아델이 자연스런 명령조로 말했다.

“치킨을 시키도록 하셔요.”

그에 잠깐 움찔한 실비아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럴까? 그럼 똥집치킨으로...”

똥집치킨!? 그곳은 배달이 늦는 것도 모자라 치킨도 잘못 갖다 준 곳 아니던가!

“거긴 싫어요.”

“왜? 좋아했잖아.”

“장사할 자격도 없는 쓰레기가 운영하는 집이에요. 그런 하찮은 자들 때문에 소상공인들이 욕을 먹는 거라구요.”

꽤나 과격한 아델의 말에, 실비아가 잠깐 멍해졌다.

고개를 마구 흔들어 정신을 차린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식탁에 앉은 실비아가 말했다.

“아델, 잠깐 앉아봐.”

“왜 그러시지요?”

“일단 앉아봐. 응?”

간절한 실비아의 말투.

마음이 약해진 아델이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는 기다란 콧바람을 내뱉으며 물었다.

“왜요?”

“그거 알아? 넌 정말 착하고 순수해. 얼굴도 마음씨도 정말 예쁘고.”

갑자기 웬 사탕발린 아부?

그래도 뭐... 실비아의 입에서 나온 진심어린 칭찬이니 기분은 좋다.

사도가 되어도 자신에게 반말을 할 수 있도록 특별대우를 해주어야겠다.

“그런가요?”

“응. 로사리오 님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은 넌 정말 깨끗한 사람이야.”

음...! 로사리오 님의 뜻이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은 로사리오의 신탁을 받긴 했다.

그러나 지혁의 말마따나, 로사리오는 뜬구름 같은 소리만 하고 다신 나타나지 않았다.

대상이 타이라트라고 오해했을 만큼 헷갈릴 정도의 신탁.

왜 신비주의적인 면모를 고수하며 애매한 신탁을 내려주는 걸까? 이해가 안 간다.

그냥 헬릭스가 지구를 노리고 있으니 막아라! 라고 해주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게 과연 로사리오의 뜻이라 할 수 있을까?

‘난 성녀인데에...’

성녀에게마저도 그따위 신탁을 내리다니.

로사리오도 정말 너무하다.

그녀에 비하면 지혁은 딱 잘라서 방향을 정해준다.

그만의 조언자이자 성녀가 되길 정말 잘한 것 같았다.

참, 그러고 보니 지혁이 그랬었다.

타이라트를 어떻게 생각 하냐고, 지혁이 타이라트라면 어떨 것 같냐고.

그때 시간을 달라고 말했었는데, 이참에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그래서 난 네가... 아델? 듣고 있니?”

“네에. 그래서 뭐요?”

건성으로 대답한 아델은, 실비아의 말을 귀담아듣는 척하며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혁만의 성녀’라고 마음속 깊이 인정한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