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5 왕후의 자격
“후에... 후으...”
피가 범벅이 된 입가를 쓰윽 닦은 아델이 나른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가 입은 흰색 잠옷은 이미 시뻘겋게 변색된 상태.
거기 그려진 귀여운 강아지는 피로 덧칠되어 지옥의 파수견으로 변해있었다.
만약 실비아가 이 광경을 본다면 경악의 경악을 거듭했겠지.
날 곧바로 용의선상에 올리는 건 덤이고.
“맛있게 드셨어요?”
내 물음에 자신의 입가를 혀로 핥은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헤실헤실 웃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저 모습...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아델을 향해 손등을 보여준 내가 말했다.
“보세요. 상처가 아물고 있습니다.”
뼈까지 드러날 정도로 깊었던 이빨자국이 꿀렁거리며 아무는 모습은 정말 기괴했다.
눈살을 찌푸린 아델이 내 무릎에 폴짝 뛰어올랐다.
“징그러워요... 지혁 씨 얼굴 볼래요... 그런데 아까 뭐라고 하셨었지요?”
그녀의 등에 손을 대고 그네를 태우듯 좌우로 움직이던 나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타이라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쁜 놈이에요. 뒤에 숨어 수하들을 보내는 얍삽한 자이기도 하구요. 만나면 혼쭐을 내줄 거예요.”
서운하네. 첫 만남부터 너와 실비아에게 손을 뻗었는데...
지들이 눈치채지 못해놓고선...
“그런가요? 전 타이라트를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만...”
“네에...?”
입을 쩍 벌리는 아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요...?”
“저흰 이제까지 신탁의 대상이 타이라트인 줄 알고 그가 보낸 마물들을 처리해왔습니다. 대상은 헬릭스였는데 말이에요.”
“지혁 씨...! 그 마물들은 오로지 파괴만을 일삼는 사악한 것들이었어요...! 신탁이 아니더라도 정화를 해야...”
“글쎄요. 그들과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았는데, 모르는 일이죠. 타이라트가 마물을 보낸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지금까지의 통계를 보면 마물들이 죽인 민간인들 중에선 범죄자들이 무척 많습니다. 거의 절반 가까이 돼요.”
“그, 그래요...?”
아니, 그런 거 없어.
“네. 어쩌면 타이라트는 지구의 혼란을 잠재우려는 목적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저희처럼.”
“그렇다고는 해도... 민간인을 희생시킨 죄는 없어지지 않아요.”
“아델이 하찮은 인간들을 그렇게나 신경 쓰시는 줄은 몰랐네요. 예전이라면 몰라도, 현재의 아델은 신이잖습니까. 저와 같은 목적을 공유하는 신이요.”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있어도 감수하겠다.
라는 이 가치관을, 아델은 수긍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했다고는 해도, 내가 했던 이 말이 뇌리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있을 터였다.
그리고 악의가 무척 많이 들어간 지금은...
“으음... 그렇긴 해요...”
그래, 진심으로 내 말에 공감하는 이런 모습이 나와야한다.
고개를 15도 각도로 꺾은 채로 눈동자를 데굴 굴리고 있는 아델.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잠시 그런 아델의 모습을 감상하던 나는, 그녀가 꽤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자 속으로 흠칫했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어요. 제가 저번에 공항에서 보았던 여자 있잖아요... 제가 정화를 했다고 한 사람이요. 그 사람이 헬릭스의 간계에 빠진 건지, 타이라트의 간계에 빠진 건지 헷갈리네요.”
지혜를 말함이었다.
김포공항에서 아델과 우연찮게 만난, 보영과 함께 떨어뜨렸던 내 권속 말이다.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데... 의외다.
헬릭스라는 이름이 튀어나와서 그걸 써먹으려 하다 보니 톱니바퀴가 삐걱대고 있는 거다.
하지만 괜찮다.
왜? 아델은 지금 나를 절대적으로 신용하고 있으니까.
“아, 그 연예인 단역이요? 당연히 헬릭스의 짓이겠죠. 그런 비열한 짓거리를 할 놈은 그놈밖에 없습니다.”
“역시...!”
아델의 눈빛 안엔 날 향한 믿음이 가득했다.
그래도 납득을 시켜주면 더 좋겠지.
“아델의 생각은 이해합니다. 헷갈릴 만도 해요.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실비아 씨의 마음은 고작 연예인 단역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올곧습니다. 게다가 아델의 앞선 정화에 경계심이 든 헬릭스는, 실비아 씨에게 더욱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네에...”
“생각해보세요. 아델은 그 연예인 단역의 마기를 금방 감지했지만, 실비아 씨의 속에 숨어있는 마기는 감지하지 못했잖아요.”
“아! 확실히 그래요...!”
감탄사를 터뜨린 아델이 내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역시 헬릭스는 좀스럽기가 짝이 없는 녀석이었어요. 감히 그런 식으로 언니에게 접근하다니...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뜨려야 옳아요.”
“물론이죠.”
이번엔 내 볼을 자신의 양손바닥으로 꾸욱 누르는 아델.
그녀의 입가에 말라붙어가는 피가 돋보인다.
악의도 잔뜩 마시고, 어리광도 잘 부리고, 말도 잘 들어주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쁠까.
안 예쁜 날이 어디 있겠느냐만.
아델의 손을 조심스레 치운 내가 그녀를 불렀다.
“아델.”
“왜요?”
떨린다. 이 질문을 받으면 아델이 불같이 화를 낼까봐.
그래도 한 번 해보자.
난 아델을 믿고, 그녀의 몸속에 들어간 악의 또한 믿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만약에... 제가 타이라트인데, 헬릭스가 실비아 씨에게 몰래 접근한 것처럼, 아델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네에...?”
안 그래도 큰 아델의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헛기침을 한 나는, 혀로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적셨다.
“애초에 아델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접근한 거라면요?”
“.... 지혁 씨,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냥 궁금해서요. 어서 대답해보세요.”
“으으음...! 정말 끔찍해요.”
끔찍하다니...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
악의가 모자란가? 대체 얼마나 더 넣어야 돼?
아니면 첫 단추를 아예 잘못 꿰맸나?
“끔찍하다고요?”
“네... 제 마음속에 있는 지혁 씨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없어요. 타이라트라니... 정말 싫다아...”
아하, 나와 타이라트를 아예 다른 인물로 분리해놓고 있었구나.
이러면 희망이 조금 보이는데...
“타이라트가 곧 저고, 제가 곧 타이라트에요. 애초에 타이라트가 송지혁이라는 이름을 빌려 아델에게 접근한 거라면?”
“달라지는 부분이 아예 없어요...?”
“네, 아예 없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성격도, 하는 행동도 모두 똑같아요.”
“그래도 싫을 것 같은데에... 절 속였다는 뜻이잖아요.”
“아델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정체를 드러냈다면 바로 정화됐을 거예요. 이런 제 마음도 이해해주셔야죠.”
아델이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제가’라고 하신 건가요? 왜 자신을 타이라트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말씀하시지요?”
“메소드 연기입니다.”
“지혁 씨는 정말 엉뚱하시군요. 그런 면도 사랑스럽지만요.”
“그래서, 대답은요?”
“이건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시간을 주셔요.”
“이게 시간까지 필요한 일인가요? 그냥 곧바로 튀어나온 속내를 대답하기만 하면 되는데.”
“잘 모르겠어서 그래요. 이해해주실 거지요?”
한 끗.
타락은 직전까지 왔는데, 이 한 끗의 차이 때문에 아델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
파훼가 제법 힘들다.
그러나 방법은 있었다.
아델의 마음을 나와의 가치관과 동일시하는 작업은 이미 진행될 대로 진행이 된 상태다.
그러니 세화와 유리아를 만나러 다녀온 후에 살인을 시켜야겠다.
악독해진 아델에게 살육의 쾌락을 줄 거다.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해.
아델의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내가 대답했다.
“물론 이해합니다.”
“아이 참... 지혁 씨...! 뽀뽀부터어...”
애교가 부쩍 많아진 느낌인데 착각인가?
히죽 웃은 나는 아델의 입술을 거의 잡아먹듯 덮쳤다.
“후엡...!”
귀여운 탄성을 터뜨린 아델이 눈을 질끈 감는다.
아델의 입 안에 아직 남아있는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난 아델과의 키스에 빠져들었다.
**
“푸르는 어때?”
“한 시간 전에 깨어났었는데, 잘린 팔다리를 보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라.”
누가 들으면 기겁할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박사였다.
“깨어났었다고? 지금은 아닌가보네?”
“응. 정신을 잃었어. 좀 많이 절망스럽나봐.”
푸르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로 등장했다.
과할 정도로 많이.
이는 곧 세화와 유리아가 푸르를 능욕했다는 방증.
패배감이 장난이 아닐 텐데, 그 상태에서 반강제적으로 지구에 내려보내지고, 또 거기서 아델과 실비아의 협공에 털리고...
나 같아도 화병이 터지겠다.
“복제 아이테르 진행상황은?”
“마르셀라가 오늘 네 번째 피험체한테 실험한다던데... 보러 갈래?”
“아니. 너무 잔인해서 못 보겠어.”
박사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날 바라보던 박사가 말했다.
“세화한테 전언이 왔어.”
“진짜? 뭐라는데?”
“마계는 걱정하지 말래.”
아아... 내 대의를 알아주는구나. 역시 세화다.
근데 너무 미안하다.
아무리 내 아내라는 믿음이 있긴 해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챙기는 것이 맞거늘...
기다란 한숨을 내쉰 나는, 이어지는 박사의 푸념에 찔끔했다.
“아델이랑 실비아한테만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넷도 좀 챙겨줘. 어차피 지구 정복은 코앞까지 다가왔잖아. 막말로 지금 이 상태로도 전 세계를 순식간에 집어삼킬 수 있어. 마계는 아직 한창 진행 중이지만, 아델과 실비아는 이제 네 마기를 감지하지 못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마계에 들러서 사기 진작이라도 하라는 소리였다.
동향도 직접 파악할 겸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태긴 하지만, 박사가 말을 꺼낼 정도라니... 정말 서운했나보다.
일침을 들은 내가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해.”
“자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말없이 박사의 탱글탱글한 허벅지를 쓰다듬은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이후 실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잠깐 해외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응. 출장이야?
“네. 비슷해요. 오래 걸리진 않을 듯한데, 올 때까지 아델을 잘 감시해줘요.”
-알았어. 아델한테는 말해놨고?
“이제 하려고요.”
-그럼... 나한테 먼저 했다는 거네?
목소리 톤이 높아진 실비아.
먼저 연락을 했다는 부분에서 상당한 기쁨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래, 너한테 먼저 했으니까, 이걸로 아델이랑 또 싸워주면 안 되냐?
아델이 더욱 악독한 마음을 먹게 만들어줬으면 하는데.
분노에 못 이겨 인간을 죽일 수 있도록,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맞아요.”
딱히 부정하지 않자, 휴대폰 너머에서 실비아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잘 감시하고 있을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면 되지?
“네.”
실비아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박사를 바라보았다.
“가자.”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사가 물었다.
“가자고? 어딜?”
어디긴 어디야, 마계지.
다만 박사가 없으면 연구실이 돌아가질 않고, 실비아를 감시할 수 없으니...
일단은 마계 특유의 기운만 느끼게 해주고 돌려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