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4 구하려는 자, 떨어뜨리려는 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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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도 또 봐도 마음에 드는 친구였다. 민지라는 사람은.
말을 놓으라고 넌지시 떠보았음에도 감히 어찌 그럴 수 있겠냐며 숙이고 들어오는 모습이 특히나 좋았다.
소꿉친구였던 지혁을 교주로 극진히 받들어 모시는 것도 굉장히 인상 깊었다.
보통은 이러기 힘들 텐데 말이다.
민지가 만들어준 스파게티를 조신하게 먹은 아델이 만족에 겨워했다.
“아주 맛있군요. 요리 솜씨가 훌륭해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성녀님.”
강남 부촌에 자리한 이 집도 정말 좋다.
아무도 안 사는 것 같은데, 누구 소유일까?
“이 집은 민지 씨가 머무르는 곳인가요?”
“네. 2년 전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산입니다.”
“저런... 안됐군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는 아델.
민지가 황송한 듯 무릎을 꿇는다.
“성녀님의 자애로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마음대로 사용해주십시오...”
마음대로라... 그렇다면 이곳을 재판소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까 민지에게 소개를 받았을 때, 집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었다.
방도 여러 개에다 무척 크니 보속이 끝난 사람들의 치료소도 겸할 수도 있겠고... 보안도 철저하다.
지하에 창고로 쓰던 것 같은 은밀한 장소가 있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냄새가 나지 않는 게 마음에 든다.
물론 사회의 쓰레기들을 모은다면 추잡한 악취가 나겠지만, 지하에서 재판을 열면 상관없을 터.
신전이 완공되려면 오래 걸릴 테니, 그때까진 여기를 임시성당 겸 재판소로 사용하면 될 것 같다.
“그래도 될까요?”
“제 집은 곧 교주님과 성녀님의 집입니다.”
어쩜 저리 마음에 드는 말만 쏙쏙 골라서 하는지.
지금까지 봐온 민지는, 자신과 지혁 외의 이야기를 할 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게 너무 불쌍했다. 아마 부모님과 일찍 사별해서 그런 모양.
이해는 하지만, 그건 지혁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지혁은 잘 털어냈다. 역시 그는 교주의 그릇이다.
아니, 어쩌면 더 높은... 초월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도 높다.
어쨌거나 민지는 희로애락의 감정만 잘 심어준다면 훌륭한 신도가 될 것이었다.
일단 가장 시급한 문제는 종교명이다.
지혁도 참... 이름도 정하지 않고 잠깐 볼일이 있다며 가버리다니, 너무하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은 아델지혁교.
이건 너무 좋지만 지혁이 학을 뗄 것이다.
노골적으로 감정이 드러난다면서 말이다.
민지한테 한 번 물어보자.
“종교명을 정해야하는데, 좋은 의견이 있다면 말씀하도록 하셔요.”
“교의 이름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아델라인교라고... 오늘 헤어지기 전에 교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었습니다.”
“네에...?”
아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다.
더군다나 작명센스가 별로다. 지혁답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 로사리오교에 편입될 예정이니, 성녀인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건 괜찮다고 본다.
근데 미리 말이라도 해주든가...
꿍얼거린 아델이 물었다.
“아델라인은 제 이름인데, 민지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지요?”
“성녀님을 생각하시는 교주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라, 아주 어울리는 종교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승낙하신다면 공식적으로 정부에 등록할 서류를 준비하겠습니다.”
“음음... 좋아요. 그렇게 처리하셔요. 다음은 교법이에요. 종교에 교의가 없다면 그건 종교라고 할 수 없지요.”
“아, 성녀님. 이와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로사리오교와 아델라인교를 동시에 모욕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중죄인이 있습니다.”
“뭐라구요!?”
쾅!
식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난 아델이 씩씩댔다.
독성죄라니... 누가 감히...!
더군다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두 종교를 동시에 모욕했다고!?
회개 불가! 용서가 안 된다!
“그건 어떤 천민이지요!?”
“그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꾸며둔 음모를 전하는 민지.
그녀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아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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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체는?”
“죽었어. 넣자마자.”
“그래? 어떤 앤데?”
“강도짓으로만 전과 6범인 젊은 아이인데 막 살려달라고 빌더라. 아이테르의 적합도가 엄청 낮아. 의지가 중요한 요소라고 보는데, 걔는 아예 없었어. 일단 데이터 분석부터 하고 다시 시작할 예정이야.”
“다음 대상은 정해놨어?”
“응. 평범한 애야.”
누가 들으면 식겁할 대화를 나누는 박사와 나.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당긴 내가 히죽 웃었다.
그러자 박사가 날 만류한다.
“여기선 자제해... 연구실이야. 실비아도 있잖아...”
“휴게실에서 자고 있잖아.”
“그래도...”
“방심하지 말라고? 알고 있어. 내가 누구 때문에 경각심이 생겼다고 말했더라?”
박사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할 말이 없어진 듯했다.
박사의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살살 쓰다듬어준 나는, 그녀를 기지로 보내고 휴게실로 향했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파에서 곤히 자고 있는 실비아가 보인다.
지금 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혼자 해결하려 했다면, 이렇게 마음을 놓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뱉을 수 있었을까?
아닐 거다. 매분 매초 불안에 떨며 쪽잠을 청했겠지.
그러니까 괜히 뭐 하려고 하지 마.
그냥 나한테 모두 맡겨.
알아서 행복하게 해주잖아.
이 얼마나 자비로운 마왕님이야.
실비아의 뺨을 살포시 어루만져주자, 그녀가 부스스한 표정으로 눈을 뜬다.
“으음...”
나른한 신음을 내뱉은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날 보며 활짝 웃는 것이었다.
이후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제대로 정신이 들었는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델... 아델은?”
아델? 지금쯤 신성모독죄를 저지른 아주 나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분노를 쌓고 있단다.
넌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야.
“실비아 씨와의 대화에서 혼란을 느낀 것 같더군요. 지금 잠깐 별장에서 휴식 중입니다.”
“별장? 거기가 어디야...?”
난 말없이 실비아의 손목을 잡고 끌어왔다.
그리고는 디바이스를 조작해 아델의 위치를 나타나게 해주었다.
“보이죠? 강남.”
“.... 보여... 근데 내가 조작했을 땐 안 나타났었는데... 어떻게 한 거야?”
“제가 잠깐 막아놨었어요.”
“왜...?”
“실비아 씨와 아델이 싸운 이후로, 디바이스를 어느 정도 통제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말에 실비아가 욱했다.
“그, 그 생각은 이해하지만, 난 아델과 다시는 싸울 생각이 없어...!”
“그건 모르는 일이죠. 어제도 오피스텔에서 싸우기 직전까지 갔다면서요.”
“내가 잘 해결했잖아...”
“소화기로 급한 불을 끄는 게 정답이 아니라, 미연에 방지해야 맞는 겁니다.”
찔끔한 실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할 말 없지? 그리고 너 아델처럼 착하잖아.
그 강인한 마음으로 날 사랑하기까지 하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내 말 잘 들어야지.
안 그래?
“마, 말이라도 해주지...”
“지금 말하고 있잖아요.”
“됐어... 그래서, 계속 통제할 거야? 네가 무슨 독재자야? 여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
“국가보다 위가 본부에요.”
본부보다 위는 나고, 내 위엔 아무도 없단다.
이 말을 들은 실비아가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뭔 장난을 하냐는 듯 내 어깨를 팍 밀었다.
내 표정이 서글서글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떻게... 잘 이야기해봤어?”
디바이스 에너지와 관련된 일을 말함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기다란 숨을 내뱉었다.
“예. 솔직히 아델은 실비아 씨의 말을 믿지 않아요.”
“하... 역시 그렇구나... 사실 어제도 내가 우니까 마지못해 수긍해주는 면이 없잖아 있긴 했는데...”
“울었어?”
“서러워서... 어쨌든 난 정말 신탁을 받았어. 너도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야?”
“아뇨. 전 믿어요.”
실비아의 표정이 환해졌다.
“진짜? 그럼...”
“하지만 아이테르 에너지 소모는 금지합니다.”
“뭐...?”
웃다가 서글퍼졌다가... 실시간으로 바뀌는 모습이 볼만하다.
“왜...?”
“제가 믿는 건 신탁을 받았다는 부분이지, 아이테르 소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사리오 님께서는 순수한 아이테르가 실비아 씨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아이테르는 무에서 창조되는 만물과 같다... 라고 말씀하셨죠?”
“응...”
“실비아 씨는 로사리오 님의 그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셨어요. 그래서 에너지를 소모하려고 했고요. 그렇지 않나요?”
“.... 맞아. 하지만 뭐라도 해봐야지...! 우리한텐 시간이 없어. 이러다 아델이 완전히 타이라트에게 물들기라도 하면...”
물들면 뭐 어때서? 좋기만 한데.
아델은 이미 네 손은 물론, 로사리오의 손까지 떠났단다.
그녀도 이제 곧 내 권속이 되길 바랄 거야.
“아델의 신성력은 아직도 무척 강력해요. 그 성스런 기운을 물들이려면, 타이라트는 무조건 아델에게 접촉해야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감시해보도록 하죠.”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테르에 관련된 신탁은...!”
“그것도 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봐요. 그러기 위해서 제게 말을 한 것 아닙니까.”
실비아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꾹꾹 눌렀다.
그러다가 조금 진정이 됐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알았어...”
대답을 듣고 소파에 털썩 앉은 나는, 실비아의 머리를 끌어당겨 어깨 위에 올렸다.
그녀의 찰랑거리는 연홍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내가 말했다.
“일단 실비아 씨에게도 그 악의 힘이 들어있다고 했잖습니까. 강인한 마음이 그 힘을 한쪽으로 몰아낸 상태고요.”
“맞아. 대체 그놈이 언제 나한테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범인인데! 이 바보!
이래서 사랑이 무서워.
용의선상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잖아.
“글쎄요. 실비아 씨는 외출을 자주 하셨으니, 그 안에 범인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격투기 도장의 사람들이나, 헬스장 사람들, 대회에 참가할 때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요.”
“하지만 그 사람들과 아델은 접점이 전혀 없어... 그저 오며가며 인사한 게 전부야. 따로 만난 적은...”
“꼭 따로 만나야만 물들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아주 은밀하게 진행된 일이니만큼 잘 살펴봐야겠죠.”
실비아가 고개를 홱 돌려 날 올려다보았다.
“서, 설마 아델은 나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타이라트의 잘못이지 실비아 씨의 잘못이 절대 아닙니다. 아직 모든 게 확실해진 것도 아니고요. 로사리오 님께서 인정한 그 마음을 굳게 먹으세요.”
“.....”
불안한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하는 실비아.
나는 그런 그녀의 배에 손을 올려 살살 문질렀다.
여기에 딱 음문이 생기면 좋을 텐데 말이지.
“일단 실비아 씨의 주변 사람들부터 조사해봐야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델을 평소처럼 대하도록 노력하면서, 주위를 잘 감시해보세요.”
“응, 알았... 허억...!”
실비아가 말을 하다 말고 몸을 튕겼다.
내가 그녀의 하의 속으로 손을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야...! 지금 이 상황에서...”
“짧게 끝낼게요.”
“.....”
“싫으면 그만하고요.”
“디바이스... 에너지는 충전하면 안 되는데...”
“또 그러신다. 그건 그냥 가설일 뿐이라니까.”
“.... 그러면 짧게... 진짜 짧게 끝내...”
아아... 급박한 상황임에도 눈앞의 유혹에 못 이겨 무너지는 모습.
이 얼마나 매혹적인 광경인가.
이쯤이면 신탁은 나 몰라라 하는 수준이 아닐까?
로사리오가 천계에서 땅을 치겠구나!
로사리오여, 어영부영하다가 이 꼴이 나는 거란다.
앞으로는 늦지 말도록 하렴.
씨익 웃은 나는 실비아를 옆으로 천천히 넘어뜨리면서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