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0 실비아는 반골이다 #2
“탐색전?”
“네, 마계 곳곳에서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나는 중인데, 말파스 측이나 왕비님 측이나 피해는 별로 없습니다.”
마르셀라의 보고를 듣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말파스가 반란분자들을 전부 휘어잡지 못한 모양인데, 시간이 끌리면 끌릴수록 나에겐 좋은 일이었다.
“알았다. 실험체는 얼마나 구해놨지?”
“정의감이 투철한 인간들부터 범죄자까지 열 명입니다.”
“복제 아이테르 하나로 열 명에게 실험을 한다고?”
“아이테르의 조직을 떼어내서 적응도를 확인해볼 예정이에요. 이번 실험의 의의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그렇군.”
우웅-!
대화를 나누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아델의 톡이었다.
[이 새벽에 어디 가셨지요? 보고 싶은데...]
[실비아 씨와 집을 꾸미는 게 아니었습니까?]
[다 끝난 지 오래에요. 언니와 함께 자기 전에 뽀뽀를 하고 싶으니 얼른 오셔요.]
[지금 막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3분만 기다려주세요.]
[시간을 재겠어요.]
귀여운 협박에 실소를 터뜨린 나는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허공에 포탈을 열었다.
내 이런 행동을 본 마르셀라가 눈을 빛냈다.
“포탈을 여셔도 들키지 않을 정도인가보네요?”
“작은 포탈 정도는 괜찮다.”
“아델라인 님의 권속화가 가시권이라고 생각되어 기쁩니다.”
“그렇지, 이만 가보마. 그 전에...”
마르셀라를 지그시 쳐다보던 나는, 삐죽 튀어나온 그녀의 송곳니를 혀로 핥았다.
날카로운 끄트머리에 혀가 쭈욱 찢어지면서, 피가 듬뿍 새어나와 입 안을 비릿하게 만든다.
“아... 아아...♡”
아래에서 조수를 흘리기 시작하는 마르셀라.
언제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마르셀라는 건재하구나.
오들오들 떨기 시작하는 그녀의 입가를 피로 적신 내가 말했다.
“수고해라. 실험할 때 연락하고.”
“네, 네엣...!”
몽롱한 눈으로 날 배웅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포탈을 탄 나는, 오피스텔 입구에 도착했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5층으로 올라간 나는, 살짝 열린 현관문에서 아델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자 킥킥거렸다.
“왜 그러고 계십니까?”
“지혁 씨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2분 58초 걸렸어요.”
“세이프 했네요.”
“아슬아슬한 거예요. 얼른 들어오셔요.”
집으로 들어간 나는 아델이 내 몸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자 살짝 긴장했다.
혹시 마기를 눈치챈 건가?
포탈을 크게 연 것이 아니어서 괜찮을 텐데?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끔, 이마에 진한 키스를 해준 내가 물었다.
“왜요?”
“여자 향수 냄새가 나요.”
마기를 감지한 건 아니구나. 그럼 그렇지.
헌데 향수냄새라니... 마르셀라는 향수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어이가 없다.
혹시 피 냄새를 향수라고 착각한 건가?
이제 막 향기롭게 느껴질 정도까지 왔어?
“그건 또 무슨... 아델은 의심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어디 갔다 오셨지요?”
“남은 일을 마무리하러 연예기획사에 잠깐 들렀다 왔어요.”
“무슨 남은 일이요?”
“저번에 말씀드렸던 사업 연계 건입니다.”
“으음... 좋아요. 알리바이가 타당하니 넘어가지요. 앞으로 새벽이라도 괜찮으니, 어디 갈 때엔 항상 보고를 하도록 하셔요.”
네가 무슨 형사니?
나중에 세화랑 유리아는 물론, 박사, 실비아, 스텔라, 마르셀라와도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하는데...
이토록 날 독점하려 해서야 원... 걱정이다.
입을 우물거리며 가만히 있자, 아델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묻는다.
“불만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절 너무 억압하려고 하시는데, 이건 너무 심한 게 아닐지...”
“억압이 아니라 걱정이에요. 나쁜 자들이 지혁 씨를 해코지할까봐 무섭기도 하구요.”
“걱정은 감사하지만, 저는 안전해요.”
“한국인들은 안전불감증이 심하다고 하더군요. 지혁 씨도 똑같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잘 내조하면 지혁 씨도 서서히 바뀌겠지요. 제 말대로 하셔요. 아시겠나요?”
“불순한 의도가 느껴지는데...”
쯧! 하며 혀를 찬 아델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품으면서 등을 토닥인다.
“사실 불안해요. 지혁 씨가 다른 여자한테 눈길을 줄까봐서요. 저번에 지혁 씨의 회사에 갔을 때도, 인포데스크의 직원이나 개인비서가 입은 짧은 치마를 보고 화가 났어요.”
“그러셨습니까?”
“네. 나쁜 생각도 했어요...”
“무슨 나쁜 생각을 하셨나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어쨌든 질투가 나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백을 해오는 아델.
그녀의 품에서 떨어진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델을 놔두고 그런 천한 인간들에게 눈길을 줄 것 같습니까?”
“처, 천한 인간이라니요... 말씀이 너무 심하신데에... 사람은 다 똑같은 존재랍니다. 취소하셔요...”
“저는 아델 같은 고귀한 분과 그런 사람들을 동급으로 두고 싶지 않습니다.”
아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겉으로는 심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녀 또한 내 말에 공감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으로 대하던 성녀가 심연에 발을 걸친 모습.
이 얼마나 꼴리는 상황인가.
“지혁 씨가 저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잘 전해져오네요. 기뻐요.”
“그럼 상을 받아야겠네요.”
“무슨 상이요?”
“뭐... 제가 아델의 몸을 마사지할 특권을 얻는다든지... 아니면 아델이 저를...”
아델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눈꼬리를 잔뜩 올린 그녀가 말한다.
“지금은 새벽이랍니다. 점심에 실비아 언니와 놀이공원을 가야 하니, 이 일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저녁에 나누어보도록 하지요.”
그리 말한 아델은 내 입술에 여러 번 키스를 하고는 떠났다.
홀로 남게 된 방 안.
무척 고요하다. 세화와 유리아도 없어서 너무 외롭다.
아델이랑 실비아는 꼭 껴안고 퍼질러 잘 테고... 짜증난다.
침대에 털썩 누운 나는 인터넷 기삿거리를 찾아보았다.
세계연합과 마물, 그리고 본부 위주로 살펴보았으나 특별한 건 없었다.
딱 하나, 이제 마물들이 덜 나타난다는 기사 외엔 말이다.
‘이 새끼들은 또 지랄이네.’
잠깐 자취를 감췄다고 알음알음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평화 기사를 보니 어안이 벙벙하다.
학습능력 같은 게 없나?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참으로 한심한 족속들이 아닐 수 없었다.
연예 쪽 기사를 살펴보던 나는 스텔라 헤일리의 기사가 하나 떠있자 눈을 빛냈다.
[채보영의 제자, 미니콘서트에서 깜짝 등장! 채보영의 대표곡 완벽 구사. 자작곡도 환상적!]
짧게 있는 기사였지만 꽤 흥미를 끈다.
공연장에 휴대폰을 가져온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러면 동영상 사이트에 영상이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가장 큰 비디오 플랫폼에 들어가 채보영의 미니콘서트를 검색하자, 가장 위에 한 동영상이 떴다.
제목은 ‘채보영 제자’로 간단했는데, 조회수는 3천만이었다.
댓글들을 보니 대부분이 칭찬일색이었다.
공연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이 정도 관심이라?
역시 아이돌 수업이 아니라 싱어송라이터 수업을 받으니까 초장부터 확 주목을 받는구나.
채보영의 이름값, 가르침과 스텔라의 재능이 어우러져 나타난 결과다.
‘무럭무럭 성장한 뒤에 딱 기다리고 있어라.’
앞선 일만 다 처리하면 다음은 너란다.
**
“슈트는 대체 왜 만드는 거야? 어차피 현 시점에 우릴 방해할 인간들은 아무도 없고, 실비아와 아델 모두 마족으로 만들 계획이잖아. 그에 따라 디자인도 바뀔 테고...”
박사의 타박.
연구실에서 실비아의 슈트를 만들던 내가 대답했다.
“타락시키기 전까지는 비스트 슬레이어잖아. 마계에서 세화나 유리아가 감당하기 힘든 마물이 내려오면 상대도 해줘야하니까...”
“적수가 거의 없을 텐데? 비네도 순식간에 처리된 마당에...”
“비네는 상성 때문에 진 거야. 실비아는 미국에서 힘을 잘 못썼고, 아델은 독일에서 아몬과 오래 싸웠어. 기억 안 나?”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불만어린 투로 꿍얼거리는 박사.
만났는데 관심을 주지 않아서 살짝 서운한 모양이었다.
피식한 나는 제작을 중지하고 몸을 돌렸다.
“누나.”
“응?”
“방심하기엔 일러. 누나처럼 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찔끔한 박사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때는...”
“탓하려는 게 아냐. 혹시나 하는 일에 대비하자는 거지. 오히려 고마워하고 싶어. 누나 덕분에 경각심이 크게 생겼거든.”
“미안해요... 속 썩여서...”
속을 조금 썩이긴 했는데, 네가 내 권속이 된 것으로 다 보상받았단다.
박사의 허리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내가 말했다.
“문제는 실비아야. 아델은 슬슬 내 말을 맹신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실비아는 아냐. 아델에게 들어간 만큼의 악의를 주입했는데도 음문이 안 생겨.”
실비아를 타락시킬 키워드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세화는 사랑하는 남자친구보다 날 더 사랑하게 됐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것으로 음문이 생겼다.
유리아는 원수이자 포악한 수컷인 내게 굴복한다는 의견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생겼다.
아델은 로사리오를 깎아내리고 신앙의 일부를 내 쪽으로 돌리면서 음문이 생성되었다.
스텔라의 경우는 끈끈한 인연인 동생을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거나, 동생 따위보다 날 더 사랑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헌데 실비아는 키워드를 찾기가 힘들었다.
실비아에게 소중한 존재는 아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아델을 연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말이다.
가치관이 뒤바뀌긴 했으나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이 상태에서 최근 로사리오교를 믿기 시작했고, 신앙이 생겨 마음이 굳건해졌다.
또한 사기꾼을 잡아달라는 내 부탁을 승낙하긴 했지만 일을 처리한 이후 굉장한 반발심을 보였었다.
이건 아직 실비아의 의지가 강하다는 의미였다.
물론 상황은 낙관적이긴 했다.
그녀의 도덕은 이미 무너진 상태니까.
여기서 박사를 떨어뜨릴 때처럼 사랑과 믿음을 더욱 증폭시키면 생기기야 하겠지.
떨어뜨릴 방법도 무궁무진하고.
그래도 신경이 약간은 쓰인다.
“그건 걱정거리가 안 된다고 보는데? 이 상태 그대로 간다면 음문은 어떻게든 생기게 되어있어.”
깊은 생각을 하던 나는 박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
“응. 문제가 하나 있다면 실비아가 너무 강하다는 건데... 어차피 디바이스에 아이테르 봉인장치도 있잖아. 그걸 누가 만들었을까?”
“나지.”
“그래, 만에 하나 일어날 불상사에 대비해서 네가 만들었어. 실비아와 아델의 모든 상황은 우리... 아니, 네가 통제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웅-!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바라보니, 실비아에게서 이러한 메시지가 와있었다.
[여기 너랑 어울리는 키홀더가 있는데, 나중에 사갈게.]
놀이공원의 상품 판매코너에서 뭘 본 모양이었다.
나와 함께 그 문자를 보던 박사가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이거 봐. 아델과 있는 상황에서도 몰래 문자를 보낼 정도로 네게 푹 빠진 애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봐.”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박사의 탄력적인 엉덩이에 손을 대고 밀면서 휴게실로 데려갔다.
우리 박사님, 연구만 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마음을 치료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