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7 변해가는 아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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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
성숙한 여자의 목소리에,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던 아델이 몸을 뒤척였다.
“우으응... 지혁 씨이...”
“아델, 일어나. 다 왔어.”
지혁이 나오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데, 감히 누가 방해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참회의 심판을 내리겠노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아델이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박사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바, 박사님...! 죄송합니다아...”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아델.
박사가 깔깔거리더니 손을 휘저었다.
“사과할 게 뭐가 있어. 이제 한국에 다 왔으니까 일어나라고 깨운 거야.”
아델은 박사를 무척 어려워했다.
특히 실비아와 싸우고 혼이 난 이후엔 더 그랬다.
하지만 가끔, 박사에게서 포근한 기운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땐 박사가 마치 가족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긴장을 푼 아델이 물었다.
“벌써 도착했어요...?”
“응. 5분 전이야. 많이 피곤했나보네?”
“조금이요...”
“그럴 만도 하지. 빨빨거리면서 잘 돌아다니더라.”
“네에...”
박사의 말마따나 아델은 이스라엘을 신나게 돌아다녔다.
특히 기독교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그쪽과 관련된 이벤트가 있으면 무조건 참석하려고 했다.
역사가 깊은 종교가 뿌리를 잘 내렸고, 신도의 수가 무척 많다는 사실에 정말 흥분한 그녀.
하루라도 빨리 지구에 로사리오교의 신전을 건설하길 바라게 된 아델이었다.
최소한 지구 인구의 절반은 로사리오교를 모시게 해야겠다.
그리 생각한 아델이 전용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하품을 했다.
“하아암...!”
“지혁이가 마중 나와 있을 거래.”
“정말요?”
“응. 방금 지혁이한테 문자 왔어. 너희 둘은 그대로 집에 돌아가서 쉬어.”
“네, 감사합니다! 근데... 저어...”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아델.
박사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말해.”
“실비아 언니를 보고 싶은데요... 만나면 안 되나요...?”
“아니, 만나도 돼.”
“....?”
아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소한 더 설교를 해야 한다느니... 같은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이토록 쉽게 승낙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
아델의 옆자리로 간 박사가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반성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참견은 여기까지 하려고. 그리고 지혁이가 조만간 너희 둘을 다시 같이 살게 해주겠대.”
“지, 진짜요...?”
“응.”
아델이 물개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박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켰다.
“사과부터 받는 게 맞다면서?”
“물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아는 언니라면 반성하고 계실 거예요.”
“그래...? 알았어. 너희 둘이 알아서 잘 풀었으면 좋겠다.”
“네! 정말 고맙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전용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빠르게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보고 싶어 마지않던 지혁이 환한 얼굴로 서있었다.
“지혁 씨!”
만면에 미소를 띤 아델이 냅다 뛰어가 폴짝 점프했다.
하루도 채 안 지났음에도, 자신의 모든 것인 지혁이 어찌나 보고 싶었는지...
지혁에게 안긴 아델이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그러자 지혁이 묻는다.
“뽀뽀해달라고요?”
하아... 걱정이었다.
입술을 내밀었으면 당연히 뽀뽀해달라는 뜻인데, 이런 의도조차 눈치채지 못하다니.
지혁은 아직도 맹한 구석이 너무 많다!
눈을 부릅뜬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혁이 쪽! 소리를 내며 아델과 입술을 맞부딪쳤다.
그에 가슴속이 가득 차는 느낌을 받은 아델은, 지혁의 널따란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면서 그의 냄새를 맡았다.
**
박사와 헤어지고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차 안.
새 휴대폰을 기뻐하며 살펴보던 아델은, 실비아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
가장 먼저 내 번호를 저장하는 일 말이다.
[내 모든 것♡]이라는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한 아델은, 이어지는 내 질문에 방긋 웃었다.
“이스라엘은 재미있으셨습니까?”
“네! 지구 종교의 역사를 배울 수 있어 좋았어요. 특히 기독교에 관심이 끌리더라구요. 신도의 수가 무려 30억 명이 넘어간대요!”
“엄청 많네요.”
“그렇지요? 아, 말을 많이 해서 죄송해요. 열심히 운전을 하도록 하셔요.”
이런 아델의 허술함이 어찌나 그립던지.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아델의 말랑말랑한 살을 만지고 싶다.
“배는 안 고프세요?”
“전용기 스튜어디스가 기내식을 줬어요. 하지만 양이 부족해서 뭘 더 먹어야겠으니, 지금 배달 어플로 치킨을 시켜야겠네요. 지혁 씨의 집으로 시키면 되나요?”
“예. 그럼 곧장 오피스텔로 가겠습니다.”
“좋아요. 아, 그리고 박사님이 그러시던데요...? 저랑 언니가 다시...”
“맞습니다. 세화와 유리아 씨의 옆집이 비어있는데, 거기서 살게 될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실비아 씨에게 들으세요.”
그 말에 아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니에게 이야기를 들으라구요...? 혹시 제가 이스라엘에 가있는 동안 따로 만나신 건가요?”
“새 휴대폰도 사드리고, 훈계도 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설명을 드릴 겸 만났습니다.”
“으음...”
불만스런 감탄사를 터뜨리는 아델.
날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돌연 고개를 확 숙였다.
그리고는 조수석 매트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뭐하세요?”
내 물음에도 아랑곳 않고 무언가를 뒤적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아주 기다란 머리카락을 하나 집어 눈앞에 들어보였다.
“이게 무엇이지요?”
“머리카락... 인데요.”
“누구의?”
“그야... 아델의 것이겠죠. 아니면 실비아 씨의...”
“언니의...? 혹시 차 안에 태우기까지 하신 거예요?”
“예.”
“참... 아휴...”
한숨을 내쉰 아델이 불경한 물건을 만진 사람마냥 머리카락을 휙 던졌다.
이후 팔짱을 끼고는 날 노려보더니 묻는다.
“언니랑 뭘 하셨지요? 대화만 나누지는 않으셨을 것 아니에요.”
“꽤나 심란해하시는 것 같길래, 같이 채보영의 공연을 보러...”
“고, 공연...!? 지혁 씨!”
차 안이 울릴 정도로 버럭 소리를 지르는 아델.
나는 겁을 집어먹은 척 어깨를 떨었다.
“예, 예...?”
“공연이라니... 절 두고 언니와 단둘이 공연을 보러 가셨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랬습니다... 그게 잘못된 건가요? 아, 그리고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공연 앵콜이 나올 때...”
“조용! 조용!”
“.....”
“여자친구가 없는 틈에 다른 여자와 공연을 보러 가시다니...! 지혁 씨는 참으로 맹하시군요! 이 단점은 시간이 지나도 고쳐지지가 않네요!”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아델의 말을 반박했다.
“실비아 씨는 아델의 친언니와도 같은 분이잖습니까. 그리고 비스트 슬레이어를 케어하는 일은 본부가 해야 하는 건데... 박사님이 아델을 이스라엘에 데리고 간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어요.”
“아무리 위로차원이었다고는 해도 감히... 세화와 유리아 언니에게 부탁을 해도...!”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두 사람은 일 때문에 출장을 간 상황이라고요. 이런 상황에서 실비아 씨와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델과 박사님, 저... 이렇게 세 명밖에는 없는데... 두 분은 멀리 가셨으니 저라도 실비아 씨를 챙겨줘야죠.”
“으으음...! 으음...!”
잘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연신 불만을 터뜨리는 아델.
마치 사극에서 음모를 꾸미는 악역이 내뱉는 신음 같다.
이스라엘에 다녀온 뒤로 고와진 마음씨가 다시금 악으로 물드는 게 보이는 것 같...
“그렇지요. 맞는 말씀이셔요.”
이걸 공감해준다고? 진짜?
당황해하는 내게, 아델이 말한다.
“언니와 지혁 씨 간에 어떤 수상쩍은 일이 있었다면, 지혁 씨가 이토록 당당하게 공연을 보러 갔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예, 뭐... 그렇죠.”
“하지만 실망했어요. 저와는 그런 문화생활을 한 적이 없었잖아요.”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겪어보지 못한 문화생활은, 다른 사람과 해선 안 되어요. 아시겠나요?”
그럼 이미 겪어본 것들은 다른 사람이랑 해도 되겠네?
알았어, 그렇게 할게.
“알겠습니다.”
스텔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냥 실비아가 하게 놔둬야지.
**
“자그마치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렸는데, 제가 왜 뼈 치킨을 받아야 하지요!? 저는 분명 순살로 시켰는데요!”
-아... 전화번호를 확인해보니 맞네요. 저희가 바빠서 실수를... 죄송합니다. 바꿔드릴까요?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뼈 치킨은 순살보다 가격이 싸요! 지금 차액을 남겨먹으려고 하시는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 한국소비자원에 신고를 하겠어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20분 안에 새로 배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시간을 재겠어요!”
휴대폰에 대고 고함을 친 아델이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씩씩대며 타이머를 켰다.
그런 아델의 옆에 있던 나는 속으로 쾌재의 쾌재를 거듭했다.
원래의 아델이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냥 먹겠다고 했을 텐데, 상당히 악독해졌다.
악의 주입으로 인한 효과, 그리고 실비아와 내가 따로 만난 일에 대해 아직도 화가 나있는 상태.
이 두 가지가 어우러져 이런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부터 바뀌어가는 거다.
악의를 더 넣은 후엔 세화 때처럼 인간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면 좋을 것 같구나.
“분명히 삼천 원을 남기려고 하는 수작이었어요. 지혁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지요?”
쌍심지를 켜며 공감을 유도하는 아델.
사장이 정말 실수를 했을 가능성도 충분한데, 나한테 맨날 하는 말처럼 자신이 먼저 앞서 생각하고 있다.
내로남불이다 이거냐? 아주 훌륭한 자세다.
내가 황급히 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주 나쁜 놈들이네요. 제가 혼을 낼까요?”
“어떻게요?”
“잡아서 화형에 처하겠습니다.”
아델이 흠칫하며 날 나무랐다.
“그, 그렇게까지는...”
“그럼 고문을 해서 강제로 회개시킬까요?”
“지혁 씨...! 그, 그렇게 무시무시한 말씀은 농담이라도 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는데요...? 자제하셔요!”
“왜요? 로사리오교의 교법엔, 악한 자들에겐 자비를 베풀지 말라는 대목이...”
“교법에 있는 악한 자들이란, 고작 삼천 원을 떼어먹으려는 자들 따위완 궤를 달리하는 죄인들을 지칭하는 거예요!”
내 등을 마구 때리면서 훈계를 하는 아델.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아 간지럽기만 하다.
킥킥 웃은 나는 그녀를 안아들고 거실을 돌아다녔다.
“알고 있습니다. 농담이었어요.”
“그, 그렇지요...? 농담이셨지요...?”
“예. 물론이죠. 제가 미쳤다고 사람을 죽이고, 고문을 하겠습니까?”
“후아... 다행이네요...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줄 알았잖아요...”
진심으로 말한 거였는데.
박사를 공략할 때처럼 누명을 한 번 써볼까?
그러면 생각이 달라지려나?
“참, 그러고 보니 실비아 언니에게 휴대폰을 사주셨다고 했지요? 번호를 알려주세요.”
“지금 전화하시게요?”
“네. 언니랑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지도 하루가 넘었으니, 목소리를 들어야겠어요.”
“아까 차에서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구시더니...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지혁 씨가...! 후... 아니에요. 저는 언니를 사랑해요. 이번 일은 자매끼리의 흔한 다툼이었어요. 그러니 슬슬 화해해야지요.”
흔한 다툼인데 실비아는 갈빗대와 왼팔이 박살나고, 넌 볼기짝을 두드려 맞는 굴욕을 당했니?
한 번만 더 싸웠다간 누구 한 명 초상 치르겠는데...?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아델을 내려놓았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실비아의 번호를 불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