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3 머리는 남겨놔요
@@
“잘 가, 아델.”
나긋나긋, 온화한 얼굴로 아델을 배웅하는 세화.
아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청 재미있었어! 다음에 또 놀러올게.”
“언제나 환영이야.”
세화와 만난 적은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왜 이렇게 포근한 느낌이 들까?
저번에 같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와서 그런 걸까?
아니면 같이 재미있는 농담을 나누며 자서?
모르겠다. 하지만 무척 좋은 기분이었다.
마치 로사리오 교의 신전에 와있는 것 같은 느낌.
비교대상이 장황하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친숙했다.
“응!”
힘차게 대답한 아델은 멀리서 양팔을 벌리고 있는 지혁에게 달려가 꼭 안겼다.
언제나 널따란 그의 가슴.
의지가 될 정도로 단단하고 따뜻했다.
긴 시간동안 포옹을 한 아델은, 지혁에게서 떨어지며 하품을 했다.
“아직도 졸린데... 지혁 씨, 너무 일찍 오셨어요...”
“제 방에서 더 잘래요?”
“아니요... 지금이 여섯 시니까... 의정부로 가주셔요. 오늘은 실비아 언니랑 운동을 가야겠어요.”
요즘 실비아와 서먹서먹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를 넓은 집에 혼자 놔둔 것도 걸리고.
지혁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실비아는 자신이 무척 사랑하는 언니였다.
그러니 관계회복을 위해서라도 실비아와 있는 게 맞았다.
최근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해도, 이 유대는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지혁은 태연한 듯 말하고 있었지만, 아델은 알 수 있었다.
그가 꽤나 서운해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지혁의 반응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아델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안 된다.
지혁과 함께 차에 탄 아델은, 남자친구의 마음을 어찌 달랠까 고민하다가 어제 침대에서 세화가 해주었던 조언을 곱씹었다.
“지혁 씨.”
“예?”
“가슴 만질래요?”
그 말에 지혁이 시동을 걸다 말고 벙 쪘다.
입을 쩍 벌린 채로 아델을 본 그가 말을 더듬었다.
“무, 뭐라고요...? 뭘 만져요...?”
이렇게 당황해하는 지혁은 처음이었다.
이상했다. 세화는 분명 가슴을 만지게 해주면 모든 남자들이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다투면 곧바로 먹히는 게 이것이라고도 했었다.
설마 세화가 자신에게 장난을 친 건가 싶었던 아델이 부끄럼을 무릅쓰고 다시 물었다.
“가슴 만질래요...?”
“.....”
지혁의 목젖이 꿀렁이는 게 보였다.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도.
좋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세화가 했던 조언에 대한 의심을 싹 날려버린 아델이 지혁을 마주서도록 몸을 돌렸다.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한 그녀가 흉부를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자요... 한 번만 만지게 해드릴게요... 이걸로 서운한 마음을 풀어주셨으면 좋겠네요...”
“혹시 세화가 조언이랍시고 말했나요...?”
“네에... 어떻게 아셨지요?”
“그야... 오늘따라 평소엔 안 하던 행동을 하시니까...”
“시, 싫으면 말아요. 이만 출발하셔요...”
“아뇨. 만질게요... 만지고 싶어요...”
헤실헤실 웃던 지혁이 손을 앞으로 뻗어 아델의 가슴을 만졌다.
손에 꽉 찬 가슴을 한 차례 힘을 주어 누른 그가 황급히 핸들을 잡았다.
그의 얼굴은 곧 터질 듯 새빨개져있었다.
운전을 하면서 연신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매사 침착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이토록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줄 줄이야.
가슴의 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앞으로 지혁이 자신을 나무랄 때나, 요청을 거부하면 써먹어야겠다.
@@
‘냄새 좋다아...’
힘이 풀린 눈으로 후드에 밴 지혁의 냄새를 맡던 아델은, 그걸 바구니에 조심스레 넣어놓았다.
빨랫감이 꽤나 쌓여있는데, 지금 세탁기를 돌릴까?
아니다. 실비아가 자고 있는 것 같으니 나중에 해야겠다.
아델은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 자신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후 실비아의 방 문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이불을 덮은 채로 옆으로 누워있는 언니가 보였다.
자신을 등진 상태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뒷모습만 봐도 힘이 없는 게 티가 난다.
서먹해진 자신과 언니의 관계를 상기하고는 시무룩해진 아델이 침대로 가 누웠다.
실비아가 깨지 않게끔 아주 조심스럽게 누웠지만, 그녀는 이미 잠에서 깬 채였다.
“왔어...?”
졸린 투의 물음에 놀란 아델이 사과했다.
“죄송해요... 보고 싶어서 들어왔는데 깨워버렸네요...”
“아냐...”
실비아가 천천히 몸을 돌려 아델을 바라보았다.
“배고파? 뭐라도 해줄까?”
여전히 자신을 챙겨주려는 그녀의 모습에 울컥한 아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배 안 고파요... 언니랑 자고 운동 갈래요...”
그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실비아가 아델을 끌어안았다.
아델은 친언니 같은 실비아에게 쏙 안기면서, 그녀의 목에 붙어있는 기다란 직사각형 파스를 보았다.
자신과의 사이가 별로 안 좋아져서, 그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다가 무리를 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언니... 목은 왜 그러세요?”
“응...? 아, 이거... 조금 뻐근해. 운동하다가 무리했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근데 왜 실비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처럼 느껴질까?
자다 깬지 얼마 안 돼서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게 실비아의 반응을 넘긴 아델이 물었다.
“그러면 오늘 운동가지 말까요...? 저랑 놀이공원 갈래요?”
“음... 일단 자고 생각하면 안 될까? 성경책 보다가 새벽에 잠들었었거든... 그래서 지금 졸려...”
“물론 그래도 돼요... 안녕히 주무셔요.”
“근데 아델, 혹시 기도해줄 수 있어?”
뜬금없는 실비아의 부탁.
아델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
“날 위해 기도해줬으면 좋겠는데... 안 될까?”
“아, 아니에요...! 당연히 해드릴 수 있어요.”
어쩜 이렇게 기특한 말을 하는지.
아무래도 성경책을 읽던 실비아의 가슴에 신앙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 신앙을 더 깊게 만들어주는 것이 로사리오 님의 대리인인 자신이 할 일.
목소리를 가다듬은 아델이 격려의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거룩하신 로사리오 님이시여...”
우웅-!
그와 동시에 피어나오는 신성력.
평소보다 조금 진한 그 금빛 광채는, 아델과 실비아의 몸을 감싸며 두 사람에게 따스한 느낌이 들게 해주었다.
아델의 청량한 목소리를 자장가 삼던 실비아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러나 가슴속 깊숙한 곳에 남아있는 죄책감만큼은 그대로였다.
@@
찌이익...
찰싹 달라붙어있던 파스를 일부 떼어낸 실비아.
화장실 거울을 통해 아직 상처가 남아있음을 확인한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의료기기에 들어갔다가 나올 걸...
지혁의 행동에 정신이 없어져 그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었다.
아델한테는 근육통이 심해져서 도저히 못 버티겠다고 말한 다음, 지금이라도 다녀올까?
오싹.
그런 마음을 먹으려던 실비아는, 등줄기에 오한이 한 차례 올라오자 몸을 떨었다.
이는 공포 때문에 나타난 게 아니었다.
쾌감에 의한 소름이었다.
아델을 무척 사랑하고 있는 지혁의 마음이 점점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런 그가 새겨준 증표라는 사실에 뭔가... 흥분이 됐다.
쏴아아아-! 턱.
수전을 틀고 물소리를 낸 뒤, 세면대 양쪽에 손을 짚은 실비아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이런 저급한 여자가 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어쩌랴. 지혁이 너무 좋은데.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양치질을 하고 화장실을 나온 실비아는, 운동 TV를 보며 홈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아델을 바라보았다.
스쿼트를 하고 있는 그녀.
저번에 올바른 자세를 알려줬는데도 어정쩡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귀엽다.
엄마미소를 지으며 아델에게 걸어간 실비아는, 사랑하는 동생의 뒤에 서서 제대로 된 스쿼트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세를 교정해주며 같이 운동을 하길 한참, 운동에 집중하던 아델이 헥헥거리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힘들어요...”
천성적인 순수함.
저걸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힘없는 웃음을 터뜨린 실비아가 쪼그려 앉아 아델의 다리를 마사지해주었다.
“전 괜찮은데에...”
“가만있어. 넌 오랜만에 운동하는 거라 풀어줘야 돼. 안 그러면 저녁부터 알 배겨서 엄청 아프다? 제대로 걷기도 힘들 걸?”
“네에... 목은 괜찮으셔요?”
“아직 조금 결려. 걱정해줘서 고마워.”
“파스가 뜯어져가요.”
그 말에 덜컥 겁을 집어먹은 실비아가 황급히 목에 손을 가져갔다.
한 번 떼었다 다시 붙여서 접착력이 일부 사라진 모양이었다.
실비아의 날랜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델이 물었다.
“언니, 목을 왜 그렇게 찰싹 때리고 그러셔요?”
미심쩍은 눈빛. 의심을 산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태연해야 한다.
“아... 그냥... 이렇게 때리면 덜 아프더라.”
“그래요...? 저도 해볼까요?”
“너는 안 아프잖아.”
“아, 그렇지요...”
헤헤... 하며 경계심이 전부 풀린 바보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 아델.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실비아의 죄책감은 더해져만 갔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속마음을 드러내 보일까 싶다.
지혁을 좋아한다고, 그를 사랑한다고.
자신의 마음이 지혁에게 향해있는 이상, 이 일은 언젠가 들키게 되어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데...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하는데...
아델이 현 시점에서 보여줄 반응이 두려워 계속 숨기고만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사이가 회복되면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보자. 그러면 허락해줄지도 모르잖아?’
저번과 똑같은 희망을 품은 실비아는 아주 정성을 들여 아델의 다리를 주물렀다.
그때,
삐빅-! 삐빅-!
두 사람의 손목에 있는 디바이스에서 경고음이 튀어나왔다.
서로 눈을 마주친 아델과 실비아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디바이스를 확인해보았다.
그 순간, 디바이스에서 지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하와이 포탈로 출발하세요. 이블리언 게이지는 지속적으로 상승 중입니다. A급, 어쩌면 S급이 나타날지도 몰라요. 저도 곧 전투기를 타고 출발하겠습니다.
아델이 대답했다.
“네...! 언니랑 같이 가면 돼요?”
-그렇게 하세요. 실비아 씨는 출동이 처음이니까 아델이 잘 케어해주시고... 한 가지 당부할 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셔요.”
-하와이는 작은 섬입니다. 마물이 공격하면 피해가 엄청날지도 모르니, 나타난 즉시 공격하세요.
상대를 살피느라 틈을 주지 말라는 소리였다.
알겠다고 대답하려던 아델은, 이어지는 지혁의 말에 입을 떡 벌렸다.
-처단을 최우선 과제로 삼되, 머리는 남겨두셔야 합니다.
“네...?”
-신성력을 쓰지 말란 얘기에요. 확인해볼 것이 있으니, 수고스럽겠지만 제 말대로 해주십시오.
머리를 남겨놓으라는 게 이해가 안 되지만...
지혁의 말이니만큼 따라야 한다.
“아... 네... 바로 출발할게요!”
-예.
지혁의 간결한 대답을 끝으로, 통신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아델은 잠깐 실비아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황급히 포탈을 작동시키려고 하자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 언니.”
“나야말로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