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1 잔소리 좀 그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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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시간을 보낸 실비아는, 바래다준다는 지혁의 제안도 거절하고 플라잉 택시를 탔다.
이후 목적지를 입력하고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지혁이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다.
헌데 태연했다. 마치 자신의 돌발행동을 예상한 것처럼.
이건 무슨 뜻일까? 마음을 받아주겠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실수라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준 건가?
‘모르겠어...’
지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래도 긍정적인 반응 같아서, 실비아는 희망을 가졌다.
좌석에 몸을 바짝 기대고 있던 그녀는 돌연 앞좌석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아델이 생각나서였다.
그러자,
[플라잉 택시 안의 기물을 파손하지 마십시오.]
택시의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잔뜩 화난 실비아가 내부 블랙박스를 쳐다보았다.
“파손은 무슨 파손! 내 머리가 돌이야? 의자를 부수게?”
[플라잉 택시 안의 기물을 파손하지 마십시오.]
“안 부순다고!”
[플라잉 택시 안의....]
바락바락 따지고 들던 실비아는, 어마어마한 자괴감이 밀려오자 헛웃음을 켰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지... 스스로가 한심하다.
결국 그녀는 얌전히 의정부에 도착했다.
목적지가 아님에도 택시를 정차시킨 그녀는, 두꺼운 재킷을 여미고는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추워...’
바람이 너무 찼다.
가을은 외로움의 계절이라더니, 옆구리가 시렸다.
이제 곧 겨울인데... 그땐 더 시리겠지.
한숨을 푹푹 내쉰 실비아는, 편의점에 들러 에너지 음료와 간단한 먹거리를 샀다.
“안녕하세요, 실비아 씨.”
언제나 활기찬 점원의 말.
온화한 미소를 지은 실비아가 카드를 꺼냈다.
“안녕하세요. 오늘 하루는 어때요?”
“좋아요. 실비아 씨는요?”
“저도... 좋네요. 얼마죠?”
“5600원입니다.”
계산을 마친 실비아는 점원에게 인사를 한 후 편의점을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또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세요?”
점원의 친절한 물음.
실비아가 잠깐 망설이며 점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뇨... 그...”
그녀의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화장이 짙어 인상이 섹시했는데, 아델 같은 강아지 상이 아니라 실비아 자신처럼 고양이 상이었다.
반지는... 있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다.
편의점에 사람은 없었다. 원체 한산한 동네라 한동안 손님들이 오지 않을 듯싶다.
모든 파악을 끝낸 실비아가 조심스런 말투로 물었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남자친구가 있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네, 있어요.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아... 다름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어떤 식으로 관계를 발전시킬지 궁금해서요. 혹시 팁 같은 게 있을까요?”
원래라면 이런... 자신답지 않은 질문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혁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사랑이 뭔지... 가슴이 복잡하면서도 두근거린다.
“실비아 씨가 좋아하는 남성분이요? 그냥 고백하면 누구라도 받아들일 것 같은데... 얼굴이 워낙 예쁘셔서...”
실비아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기 때문.
점원은 진심으로 저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허나 실비아가 바라는 건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런 그녀의 진심이 전해졌을까?
점원이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음... 농담이었구요. 이건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실비아는 귀를 쫑긋한 채로 점원의 말을 유심히 경청했다.
**
“유승현이 없어졌다?”
“네. 룸살롱 실장과 연락을 해봤는데... 왕비님과 헤어진 이후 1개월 뒤쯤부터 일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거제도로 내려간다는 말만 했다고...”
거제도라... 조선소에서 노가다를 뛸 심산인가?
“기존에 살던 집은?”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간 상태입니다.”
방을 뺐구나. 하긴, 거제도로 내려가는데 빼야겠지.
마르셀라의 보고를 들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다. 직접 움직이지는 말고, 인간들을 이용해서 찾아보아라.”
“네, 여러 흥신소에 의뢰를 한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테르 복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느리긴 하지만 착실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계 상황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권속을 보내볼까요?”
씨발, 내 고향인데 위험해서 가지도 못하다니 어이가 없네.
이러다가 마물들이 단체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면 어쩐다?
마왕인 내가 지구를 지키는 입장이 되어야하는 건 아니겠지?
마계를 생각하면 할수록 로사리오에 대한 분노가 솟구친다.
왜 신성력 같은 생소한 힘을 들고 와선 날 이렇게 짜증나게 하는지...
“보내봐라. 이번엔 하나하나 퍼뜨려서, 하루 정도만 정찰을 보내고 복귀시키도록 해봐. 한 명이라도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군.”
“네, 알겠습니다.”
우웅-!
마르셀라와 앞으로의 일을 획책하던 나는, 채보영에게서 문자가 오자 휴대폰을 들었다.
[콘서트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원하시는 날짜가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아무 때나 가능한 거야?]
[야외, 혹은 간단한 아트센터를 대관해서 깜짝 콘서트 형식으로 열까 해요. 오늘, 내일은 무리지만 이틀 뒤부터는 언제든 가능합니다.]
얼굴만 익혀놓기엔 최적의 조건이다.
지금 스텔라를 공략할 생각은 없었다.
허나 아이테르의 주인을 각인시켜놓는 일은 필요했다.
혹시 모를 쓸데없는 사람에게 가는 걸 막기 위해서.
[사흘 뒤 저녁으로 잡아. 야외는 이상한 놈들이 많을 테니 지양하고, 아트센터로 하자.]
[네. 홀이니만큼 티켓 판매를 하는 게 보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소속사에 말해놓을게요.]
[그렇게 해. 스텔라한테 말은 했고?]
[조만간 콘서트에서 소개를 해주겠다고 말했더니 잔뜩 기대하더라구요. 현재 연습에 매진하는 중입니다.]
[알았어.]
그러고 보니 보영의 주변에 있는 파파라치들을 처리해준다 해놓고 깜박했군.
자리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푼 나는,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마르셀라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채보영의 집 주변에 파파라치가 있을 거다. 그놈들도 권속으로 만들어서 마계로 보내.”
“네, 마왕님.”
“돌아가 보거라. 수고했다.”
고개를 한 차례 숙인 마르셀라가 포탈을 타고 사라졌다.
휑해진 거실. 뭔가 으스스한 기분이 느껴져서 좋다.
콘서트를 누구랑 보러 갈지는 이미 정해두었다.
바로 실비아였다.
왜냐? 아이테르는 분명히 그녀가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
또한 아델이 채보영을 만나면, 아직 악의가 모자란 상황에선 마기가 발각될 우려가 있다.
난 곧바로 실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 번이 채 가기도 전에,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말해.
목소리가 꽤나 밝다.
키스 사건을 그냥 넘어가서 저런 건가?
“콘서트 보러 가실래요?”
-콘서트...?
“네, 채보영 알죠?”
-알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잖아. 노래도 몇 곡 들어봤어.
“그 사람이 이번에 소속사를 옮겼거든요? 조만간 아트센터를 대관해서 깜짝 콘서트를 연대요. 소속사 사장이 저랑 꽤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 미리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요.”
-그래...? 나랑 보러 가자는 거야...?
“싫어요?”
-나, 난 좋아... 같이 가.
곧바로 튀어나오는 승낙.
소파에 누워 다리를 벅벅 긁던 내가 대답했다.
“자세한 사항은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면 말씀드릴게요.”
-응.
“저녁은 챙겨먹었어요?”
-아직... 이제 먹으려고 요리 준비 중이야. 아델은? 같이 있어?
“아뇨. 아직도 세화랑 같이 노는 중이에요. 저는 지금 집이고요. 할 거 없으면 연구실에서 만날래요?”
-난 좋아. 그럼 밥 먹지 말고 갈까?
“요리 준비하고 있다면서요. 도시락 싸서 와주세요.”
-알았어. 그럼 금방 만들어서 갈게.
“네, 조심히 오세요.”
전화를 끊은 나는 외투를 챙겨 입었다.
**
딸깍.
보온 도시락 통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베이컨이 들어간 볶음밥. 딱 봐도 아주 맛있어 보인다.
실비아에게서 숟가락을 받아 볶음밥을 한 입 먹어본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맛있네요. 간도 잘 됐고.”
“다행이네...”
“근데 야채 같은 건 없어요?”
“야, 야채...? 볶음밥에 들어가 있잖아.”
“꼴랑 이것만 먹고 어떻게 건강을 챙깁니까. 음식을 보면 평소 사람의 식습관을 알 수 있어요. 맨날 기름진 음식만 먹지 말고, 야채도 챙겨 먹어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걱정돼서 하는 얘기니까 그렇게 해요.”
실비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하긴 무슨... 실비아 씨도 얼른 먹어요.”
“응...”
그렇게 우린 아무 말 없이 연구실 안에서 볶음밥을 먹었다.
실비아는 밥을 한 입 먹다가 디바이스를 쳐다보고, 다시 그러기를 반복했다.
뭔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한테 혼이 나기 직전의 소녀처럼 말이다.
‘변신했었구나.’
딱 봐도 그런 티가 났다.
문제는 왜 변신했느냐인데... 다 먹고 물어보자.
묵묵히 볶음밥을 비운 나는, 실비아 또한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이후 그녀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물었다.
“디바이스는 왜 자꾸 흘깃거리시는 겁니까? 충전량 한 번 보죠.”
“무, 뭐...?”
눈에 띄게 당황해하는 게 다 보인단다.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저번에 분명 89퍼센트였죠? 버튼 눌러보세요.”
“내가 왜...? 왜 그래야 되는데?”
“의심받을 짓을 하잖아요. 눌러보세요.”
“싫은데...?”
한 차례 혀를 찬 나는 실비아의 오른손목을 잡아 내 무릎 위에 얹혀놓았다.
‘아...!’ 하는 탄성을 터뜨린 그녀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젖어든다.
나는 디바이스의 충전량 표시 버튼을 눌렀고,
딸깍.
허공에 나타난 [88%]라는 숫자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거 뭡니까? 왜 1퍼센트가 떨어져있죠?”
“.....”
실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내 추궁하는 눈빛을 보고는 그 마음이 부스러졌는지, 시무룩한 얼굴로 순순히 실토했다.
“벼, 변신하면 복잡한 마음이 다잡아져서...”
충전하기 전에도 비슷한 이유를 들먹이며 변신했었는데, 디바이스를 많이 의지하는 모양이었다.
이해는 간다. 지금 그녀의 입장 상,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정신이 힘들 테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힘들게 충전을 하셔놓고 위기감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닙니까?”
“미안...”
“실비아 씨에게 있어서 1퍼센트는 굉장히 소중해요. 그걸 몰라서 이러시는 건가요?”
실비아가 발끈했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어서 내게 따지고 들지는 못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게 투정을 부리는 것뿐이었다.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뭘 그만하래요. 대체 계획도 없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계획... 있어...”
“거짓말로 상황을 무마하려 하지 마세요.”
“지, 진짜야...! 계획은 있어... 계획만 있어서 문제지...”
“그래요?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봅시다. 그 계획이 뭔지.”
다리를 꼰 내 말에, 실비아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물었다.
“알면 도와줄 거야...?”
“최대한 도와드려야죠.”
“.... 좋아. 난...”
그녀의 입술이 파리하게 떨려왔다.
내뱉고자 하는 말이 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난 키보드 옆의 강판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실비아를 보챘다.
그러자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실비아가 눈을 질끈 감고 언성을 높였다.
“너랑 충전할 거야...! 아, 앞으로도 계속.”
톡.
실비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손가락의 움직임도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