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9 초대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흥을 감출 수가 없다.
아델은 내가 보낸 다섯 명의 사람들 중, 단 한 명의 마기만 감지했다.
현재 나는 감지당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높은 마기를 지닌 사람의 몸과 비슷한 상태였다.
저번과 비교하자면, 몸에 들어있는 마기는 배 이상.
고통을 감내하면서 안에 악의를 주입한 게 제대로 주효했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허접한 수준이긴 했지만 뭐 어떠한가.
발전이 눈에 보이는데.
이런 식으로 아델을 현혹하면서, 서서히 내 본신으로 돌아가는 거다.
“흐흐...”
답지 않게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던 나는, 실비아에게 전화가 오자 목을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지혁아.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심각했다.
“네, 실비아 씨.”
-시간 되니?
“음... 지금 아델을 만나러 가고 있어서요.”
-그래...?
“목소리가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집에 들렀을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아냐. 나도 지금 밖이라서...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시간 나면 연락해.
긴 이야기라... 궁금한데?
내일 한 번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밥은 먹었어? 아델이랑 먹으려나?
“아뇨. 아델이 먹었다길래 저도 먹었습니다. 실비아 씨는요?”
-나도 방금 운동 끝내고 먹었어. 데이트 잘하고, 꼭 연락 줘. 알았지?
“알았다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응... 수고해...
실비아는 제 할 말만 하고는 전화를 뚝 끊었다.
이제 슬슬 실비아에게도 악의를 주입해볼까 싶다.
나만 짝사랑하는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워.
저번에 생각한 대로, 잘 대해주어야지.
의정부 별채에 도착한 나는 아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허나 그럴 새가 전혀 없었다.
박시한 후드를 입은 아델이 현관문을 열고 냅다 뛰어왔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있었구나. 역시 나의 아델이다.
조수석 문을 열어둔 나는, 차에 탄 아델과 진득한 키스를 나누었다.
이후 그녀의 후드를 잘 정리해주며 물었다.
“날도 추운데 그렇게 입고 버틸 수나 있겠어요?”
“어, 어차피 실내에만 있을 거잖아요.”
“오늘은 한강공원 같은 곳에서 산책이라도 할까 했는데요.”
“저는... 안에 있고 싶어요. 저희 지혁 씨의 집으로 가요...!”
“제 집이요?”
“네...! 저는 지혁 씨의 집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오늘 가보고 싶어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아델과 만났던 장소는 매번 연구실, 호텔, 의정부가 끝이었다.
집이라... 은평구에 있는 집은 지금 데려가기엔 조금 그랬다.
박사의 옷가지가 널려있었기 때문.
그러면 차라리 한대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이 낫겠다.
“그럼 오늘은 저희 집으로 갈까요?”
“조, 좋아요...!”
아델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사람마냥 몸을 달싹였다.
미지의 장소인 내 집에 간다는 것 자체가 두근거리는 것 같다.
“알겠습니다.”
**
오피스텔에 도착한 아델은 뜻밖의 손님을 만났다.
“세화야!”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그녀는, 공동현관으로 세화가 들어오자 부리나케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세화의 등장은 나로서도 의외였다.
난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델! 진짜 오랜만이네?”
사근사근한 말로 반가움을 표현한 세화가 아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런 세화의 손길을 느끼던 아델이 묻는다.
“응! 근데 네가 왜 여기 있어?”
“왜 여기 있냐니... 나 여기 사는 거 몰랐어?”
“여기 산다구?”
“응. 내가 비스트 슬레이어가 됐을 당시 집이 부서졌었거든. 그때 지혁이가 집 구해줬어. 옆집에 살아.”
“그래애...?”
말끝을 길게 늘어뜨린 아델이 날 돌아보았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 같았다.
뭔가 안광이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괜히 찔끔한 내가 어색하게 웃자, 세화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맞다. 나 과제할 책을 가져온다는 걸 깜박했네. 학교로 다시 돌아가 봐야겠다. 조만간 같이 또 놀러가자. 알았지?”
“아, 응...”
세화는 곧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공동현관을 나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 아니, 마족을 마주했던 아델이 날 쏘아보았다.
“지혁 씨, 왜 말씀하지 않으셨지요?”
“중요한 일이었나요?”
“그야 당연히...!”
언성을 높이려던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내려와 열린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
그가 내릴 때까지 기다리던 아델은, 내 손을 잡아끌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몇 층이지요?”
싸늘해진 말투에 침을 삼킨 내가 잽싸게 25층을 눌렀다.
조용히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아델이 새침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혁 씨는 정말... 저를 화나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이게 중요한 얘기였다면 진즉 했을 겁니다.”
“당연히 중요하지요! 동료가 옆집에 산다는 게 중요하지 않은 일인가요?”
“딱히 저희 사이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뿐인데...”
“그렇기는 하지만...! 참... 아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 아델.
분노하고 있지만, 그 안에 질투심까지 섞여있는 듯했다.
세화의 등장이 도움을 주었구나.
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을 연기하며 25층에서 내렸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덜컥-!
“와아아...!”
아델은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널따란 거실의 전경에 탄성을 터뜨렸다.
솔직히 전혀 감탄이 나올 만한 인테리어가 아닌데...
그냥 내 집에 온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나 보다.
그녀는 자신이 바보같이 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다시금 새초롬하게 돌아왔다.
멋쩍은 듯 머리를 긁은 내가 물었다.
“이, 일단 집에 오셨으니까... 우유라도 드릴까요? 소파에 앉아계시면 제가 곧바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델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더니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가만히 있는 나와 냉장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행동이 어서 우유를 대령하라는 뜻임을 알아차린 나는, 잽싸게 냉장고를 열었다.
컵을 꺼내 그 안에 우유를 따르던 내가 물었다.
“설탕도 넣을까요?”
“네. 딱 20초만 데우셔요.”
“알겠습니다.”
나는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시간동안 아델의 눈치를 보았다.
마왕인 내가 이래야 되냐? 위엄이 하나도 안 산다.
이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에 대한 복수는 침대에서 해주지.
적당히 데워진 우유를 꺼내 들고 가던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걸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아델이 눈을 빛내며 날 나무란다.
“지혁 씨! 제 우유를 마시면 어떡해요!”
아무래도 내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순순히 사과를 하려던 나는, 갑작스레 떠오른 좋은 생각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희 사이에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습니까.”
“앗...!”
그래, 네가 그랬었잖아. 할 말 없지?
이게 마왕의 임기응변이란 거다.
아델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려고 눈을 부릅뜬 채였다.
하지만 원체 귀여워서 타격이 하나도 없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간 내가 우유를 내밀었다.
“드세요.”
“.... 아직 제 화는 풀리지 않았어요. 지혁 씨의 옆에 제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싫어요.”
더 질투해라. 악의가 무럭무럭 자라나도록.
“그게 본심이셨군요.”
“네... 맞아요...”
“그럼 저는 본부를 그만둬야겠네요. 거기 유일한 청일점이 저잖아요.”
“그건... 일적으로는 상관없어요...”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켠 아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의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아내준 내가 말했다.
“세화가 처음 변신했을 때, 그녀의 집은 아예 박살이 났었습니다. 본부는 마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비스트 슬레이어의 복지를 위해 운영되고 있기도 해요.”
그러니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하다는 뜻이었다.
아델은 내 말을 이해하긴 했지만, 가슴으로는 동의하지 못하겠는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땐 아델과 실비아 씨가 살고 있었던 별채도 없었고, 그저 연구실과 이 오피스텔이 전부였어요. 살 집이 필요했기에 내어줬습니다. 길바닥에 내앉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세화뿐만이 아니라 유리아 씨도 여기 살아요.”
그 말에 아델의 눈이 동그래졌다.
“유, 유리아 언니도요...?”
“네. 세화의 옆집에 살죠. 유리아 씨도 집이 없는 상태여서 모셔왔고, 지금 두 사람은 잘 적응한 상태에요. 이런 와중에 매몰차게 이사를 가라고 할 수도 없잖습니까.”
“지, 지혁 씨는 그 두 사람을 많이 만났겠네요...? 가,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하셨나요...?”
“저는 일이 바쁘고, 두 사람은 현생을 사느라 잘 만나지는 못합니다. 이 집도 정말 오랜만에 들른 거예요. 그리고 저는 최근에 아델만 만났잖습니까.”
표정을 보니 납득하긴 했지만, 여전히 불만이 있어 보인다.
나는 아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갰다.
“아델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는데... 부탁드려도 될까요?”
“.....”
“네?”
“그,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어떻게요?”
“지혁 씨... 집 냄새가 좋아요...”
말을 돌리는 그녀.
화가 싹 풀린 것 같다.
역시 사랑이 가득 담긴 눈은 잘 통한다니까.
그나저나 세화의 첫 변신 때를 상기해보니까... 그 놈도 생각난다.
유승현. 내가 왜 이 새끼를 잊고 있었지?
유리아의 꿈속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었다.
얘 지금 어디서 뭐하려나? 아직도 그 호텔 웨이터로 일하고 있나?
거긴 마르셀라가 일을 접은 지 오래인데... 한 번 찾아봐야겠다.
“블랙체리 향 방향제에요. 제 방도 구경해보실래요?”
“네...”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아델의 손목을 잡아끌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열리는 문.
잘 정돈된 침대와 흰색 꽃이 그려진 두꺼운 이불이 보인다.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침대를 보던 아델이 물었다.
“누워도 돼요...?”
“물론입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아델이 냅다 침대에 몸을 날렸다.
그녀는 이불을 얼굴까지 잡아끌고 숨을 후욱 들이키며 킥킥거렸다.
마치 집에 몰래 침입한 스토커가 체취를 맡고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베개가 두 개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왜 베개가 두 개지요?”
“하나는 끌어안고 자는 용도에요.”
“으음... 그래요...?”
아델은 고양이 자세로 베개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여자의 머리카락이 있나 없나 확인해보려는 행동 같았기에, 난 괜히 찔끔해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델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끔 허리를 확 잡아끈 나는, 그녀를 옆에 강제로 눕히다시피 했다.
그렇게 그녀를 간지럽히고 있는데, 까르르거리던 아델이 돌연 정색을 하며 내 손을 떼어냈다.
“지혁 씨, 오늘 저희 동네에서 마기를 감지했었어요.”
나도 알아. 내가 보낸 사람들이거든.
“그렇습니까?”
“네... 어린이집 선생님 다섯 분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분에게서 느껴졌어요.”
“정화는 하셨나요?”
“당연해요. 보자마자 곧바로 힘을 썼지요.”
나는 자랑스러운 듯 말을 하는 아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하셨습니다. 마기는 한 명에게서만 풍기고 있던가요?”
“네... 왜요?”
“아뇨. 다섯 명에게서 다 풍겼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을 테니까요. 한 명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렇지요... 참 걱정이에요. 그 사람 외에도 마기에 잠식당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타이라트가 아주 사악한 짓을 하고 있어요. 마물을 내보내도 안 되니까이런 치졸한 짓을 하는 것 같아요.”
치졸해서 미안해.
근데 네가 너무 강해서 조심해야 된단 말이야!
“그러네요. 정말 치졸한 놈입니다. 어린이를 볼모로 잡으려 하다니...”
“그러니까요! 만나면 로사리오 님의 힘으로 정의의 심판을 내려줄 거예요.”
어쩌냐? 그 로사리오 님의 힘은 차근차근 침식되어가고 있는데.
너 지금 내 마기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잖아. 그래서야 심판을 내릴 수나 있겠니?
“기대되네요. 타이라트가 무슨 반응을 보여줄지 말입니다.”
“분명히 겁을 집어먹겠지요. 무릎을 꿇고 싹싹 빌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미 늦었답니다. 저는 타이라트를 용서해줄 맘이 전혀 없어요.”
너도 이미 늦었단다.
그리고 용서해줄 맘이 없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로사리오겠지.
대리인으로 임명까지 한 네가 천천히 타락해가고 있는데 방관만 하고 있잖아.
이렇게 사랑스런 널 가만 두다니... 아주 눈이 썩은 년이 아닐 수 없지.
나중에 천계로 가면, 우리가 로사리오의 눈알을 새로 하나 해주던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