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5 침식
“전부 못 돌아왔다?”
“네...”
“어이가 없군.”
면목이 없다는 듯 시선을 내리깐 민지... 아니, 마르셀라.
혀를 찬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보낸 다섯 명의 정찰병들이 전부 돌아오지 못했다면, 마계에서 죽었다는 뜻.
다섯에겐 내 마기가 들어가 있다.
마족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도 손을 썼다는 건, 완전한 반란예고.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는데, 확실해지니 더 빡친다.
“어디서 죽었다던?”
“말파스의 거처 근처에서 생체신호가 꺼졌습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나?”
“신호가 꺼지기 직전에 체온이 급상승했습니다. 아마 타죽은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타죽었다?
내게 반기를 들 정도로 마력이 강대한 마물 중에서 불을 쓰는 놈들이 누가 있더라...
일단 가장 먼저 생각나는 놈이 발록이다.
말파스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초고위급 마물, 유리아의 부모를 잿가루로 만든 놈이기도 하다.
힘을 숭상하는 성정을 지니기도 했다.
“발록이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파스에겐 그런 능력은 전혀 없었다.
그저 소원을 들어주는 놈일 뿐.
그렇다면 말파스가 배신자일 가능성이 줄어드는 건가?
아니, 모든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말파스는 의심을 접기엔 너무 음흉한 놈이다.
놈과 발록이 짜고 사건을 일으켰을 수도 있었다.
“골치 아프군. 세화나 유리아, 박사에겐 아무런 전조증상이 없겠지?”
“네... 마왕님의 마력에 귀속되어있는 분들이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습니다.”
“아이테르 복제연구는 시작했나?”
“현재 연구 중입니다. 박사님의 도움이 굉장히 큽니다. 아이테르, 디바이스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계신 분이니만큼 속도를 붙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알았다.”
엄지와 중지를 뻗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나는, 이어지는 마르셀라의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저... 아델라인 님의 진행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내 계획대로 됐다면, 지금 아델은 화가 많이 났을 거야. 오늘 중으로 악의를 넣어볼 생각이다. 허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아델은 세화나 유리아와 다른 만큼, 어떻게 될지 감이 잡히질 않는구나.”
“그렇군요...”
“마계는 청소를 해야겠다.”
마르셀라가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청소라 하심은...”
“의심스런 놈들은 다 제거하고 봐야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건 재고해주심이...”
그놈들한테 자비라도 베풀라는 소리인가?
인상을 구긴 나는 상체를 앞으로 숙여 마르셀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지그시 잡아채 옆으로 당겼다.
“마르셀라.”
“네... 네?”
“네가 저번에 차에서 그랬지? 내가 바뀌는 것 같다고, 선량해진 것 같다고. 심지어는 반란분자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지껄이지도 않았나?”
“.... 그렇습니다...”
“헌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지? 동정심이라도 생겼나? 혹시 너도 신성력에 영향을 받았느냐?”
“그,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전 그저... 현재 마왕님의 상태로는 마계가 위험할 것 같다는 노파심에...”
나는 마르셀라의 말캉한 입술에 엄지를 올렸다.
그리고는 엄지를 좌우로 움직여 그녀가 바른 틴트를 입가에 번지게 했다.
“걱정해준 것이로군.”
“네... 저는 오직 마왕님의 안위만 생각합니다...”
“기특한 녀석이구나.”
“아, 아닙니다아...”
우웅-!
나긋한 눈으로 마르셀라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진동소리가 들리자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저 연구실에서 잘 거예요.]
아델의 톡이었다.
통보하듯 쓴 것으로 보아... 저건 나더러 오라는 뜻.
실비아와 일이 생겼나보다.
그나저나 연구실에서 잔다고? 호랑이 아가리에 직접 들어오면 어떡하냐?
하긴, 화난 네가 갈 데가 어디 있겠느냐만...
[금방 가겠습니다.]
[안 오셔도 돼요.]
[정말요?]
[(๑•﹏•) 아니요.]
[바로 출발할게요. 간식도 사갈까요?]
[네. (。♥‿♥。)]
귀여운 이모티콘에 피식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기지로 돌아가 보아라.”
“네... 마왕님... 침식에 성공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래.”
**
아델은 연신 콧김을 뿜어내며 간식을 흡입했다.
그러면서 내게 꿍얼거렸다.
“정말... 저어어엉말 화나요! 어떻게 그런 태도를 보여줄 수가 있지요?”
상황설명을 다 들은 나는 속으로 쾌재의 쾌재를 불렀다.
전부 내 계획대로 됐다.
“그렇군요... 저도 실망스럽네요.”
현재는 평소처럼 실비아를 옹호해주면 안 된다.
아델에게 공감해주면서 실비아를 향한 적대감을 키워놓아야 한다.
그 다음 아이테르를 침식시키고, 디바이스를 채운다. 그러면 된다.
“그리고... 언니가 지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 알고 있단다.
이땐 약간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자.
아델의 분노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습니까?”
예상대로, 아델이 분개하며 내게 따졌다.
“그렇습니까? 방금 그렇습니까 라고 하셨어요!?”
“예...? 그야... 저도 실비아 씨를 좋아하니까...”
“뭐라구요!?”
콰앙!
휴게실 탁상을 양손바닥으로 내리친 아델.
벌떡 일어난 그녀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깜짝 놀란 내가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아니, 동료로서 좋아한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에 아델의 태도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허리춤에 손을 올린 그녀가 말했다.
“제 말은, 실비아 언니가 지혁 씨를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뜻이었어요.”
“아... 확실한 건가요?”
“확실하다니요...? 지금 제 직감을 의심하시는 거예요? 아하, 이제 알겠어요.”
“뭐가요?”
“실비아 언니의 몸을 만져서 흥분했었지요? 그리고 기분이 좋으시지요? 언니 같은 여자가 좋아해주니까?”
빈정거리는 것까지... 완벽하다.
너는 타락할 준비가 됐어.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시고, 이만 주무세요.”
“쓸데없는 소리라니요!? 대답부터 해요!”
“아델.”
“왜요!”
“제가 어제... 아니, 아까 연구실에서 뭐라고 했죠?”
“.... 저만 사랑한다고 했어요.”
“답이 됐을까요?”
아델의 고개가 위아래로 한 차례 끄덕여졌다.
그런 그녀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은 내가 따졌다.
“실비아 씨의 몸을 만져서 좋았냐고요? 저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제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잘 아시면서...”
“죄송해요... 너무 흥분해서...”
“이해합니다.”
“실비아 언니는 바보에요. 지구에 온지 얼마나 지났는데... 남자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저랑 지혁 씨가 마음고생을 했잖아요... 아무리 제가 승낙한 일이라지만 무척 후회돼요. 언니가 미워요.”
나는 아델을 앞으로 번쩍 안아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팔이 자연스럽게 내 목에 둘러졌다.
“한숨 푹 자면 나아질 겁니다.”
“.... 네...”
악의를 넣으려면 인간의 몸에서 잠시 벗어나야한다.
그 말인 즉, 아델이 마기를 감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허나 이는 문젯거리조차도 아니었다. 악의를 넣은 후가 진짜 문제지.
아델을 박사의 휴게실로 데리고 간 나는,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는 손목에 있는 디바이스를 풀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델이 물었다.
“제 디바이스는 왜요?”
“이왕 연구실로 온 김에, 용량을 증축해놓으려고 합니다. 박사님이 그랬죠? 마물들의 동향이 이상하다고. 앞으론 계속 싸워야할지도 모르니까... 대비해놔야 해요.”
“.... 저는 박사님도 미워요. 간사한 말로 저를 유혹하셨어요.”
그래? 그거 참 잘됐군.
박사가 들으면 좋아하겠어.
“그래도 박사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하죠?”
“그건 그래요... 근데 지금 하실 거예요?”
“아뇨. 아델이 주무실 때까지 여기 있을게요.”
“잠은요...? 저랑 같이 안 자요?”
“잠이 별로 안 오네요. 일을 하다보면 졸리겠죠. 그때 돌아오겠습니다.”
아델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까도 실수하셨으면서...”
“아델의 마음을 알고 나니, 그리고 위로를 받고 나니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실수할 것 같으면 그만둘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힘들면...”
“힘들면 곧장 아델한테 가겠습니다.”
“좋아요... 손 잡아주세요.”
인자한 미소를 지은 나는 아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델이 내가 준 여우 목걸이를 꼭 쥐며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심신이 지치고, 안정될만한 무언가가 있으면 잠을 깊게 자는 경향이 있다.
이는 아델도 다르지 않았다.
푹 잠들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마.
**
찌르르...
눈앞에서 깨끗한 새소리를 내며 평온하게 움직이고 있는 아이테르.
디바이스 개조 툴을 가지고 와 어느 고급호텔에 들어온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손가락을 땄다.
새끼손가락에 한 방울 맺힌, 내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악의가 들어가 있는 피.
초소형 스포이트에 피를 옮겨놓은 나는 긴장한 몸을 풀었다.
아델의 아이테르 침식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
세화와 유리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악의의 양은 나노... 요크... 아니, 쿼크나 렙톤보다도 더욱 작게.
그야말로 티조차도 나지 않을 정도의 쥐좆만한 양을 넣어야 한다.
딱 한 번만 넣고, 아델과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몸집을 불리도록 만들면 돼.
절로 식은땀이 난다. 이토록 긴장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마치 세수를 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싹 쓸어낸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디바이스에 몰래 만들어둔 미세한 통로에 스포이트 구멍을 끼웠다.
그리고는 악의를 조절해 아주 조금 흘려 넣었다.
그때,
끼이이익-! 끼이이이이이익!
아이테르가 듣기 좋은 비명소리를 냈다.
악의가 섞이기 시작하며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다.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악의만 넣었는데 세화, 유리아 때보다 반응이 더욱 격했다.
신성력과 동화되었기 때문이겠지?
이런 격렬한 반항은 예상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다.
나는 옆에 놓아두었던 손가락 한 마디만한 리모컨을 조작했다.
실비아와 아델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두었던 봉인장치였다.
버튼이 눌리자마자, 디바이스에서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튀어나온 폴리머스가 아이테르를 꽁꽁 묶었다.
끼이이익! 끼익! 끼이익!
고통스런 소리를 내뱉던 아이테르는, 곧 머리부근이라 생각되는 최상단을 제외하면 잠잠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절대 끊을 수 없는 올가미에 봉인된 신 같았기에,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띄워졌다.
‘얌전히 있어라...’
얼마 뒤, 고문을 받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리던 아이테르의 움직임이 멎었다.
나는 잠깐 텀을 둔 후, 조심스럽게 리모컨을 눌러 봉인을 해제해보았다.
그러자,
끼윽... 끼윽... 끼으윽... 찌르르...
고통스러움에 헉헉거리던 아이테르가 다시 맑은 새소리를 냈다.
침식이 된 건가? 아니면 정화되어버린 건가?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힌 나는 아이테르를 확대해보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다섯 번을 넘어 그 이상으로.
손가락을 수십 번 움직여 화면을 확대한 나는, 손바닥이 꿰뚫려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됐다!’
아이테르의 가장자리 부근이 새카맣게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환호성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참아낸 나는, 아이테르가 허튼 수작질을 하지 못하도록 다시 봉인시켰다.
그 뒤 침대로 가서, 체면도 잊고 얼굴을 처박은 채 끅끅 웃었다.
아직 할 일이 남긴 했다.
아델의 손목에 디바이스를 채워보는 게 마지막 과제.
여기가 가장 고비지만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신성력이 가미된 아이테르가 침식되었다는 건, 신성력과 무사히 동화되었다는 뜻과도 상통했으니까.
아델은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일만 끝나면, 그녀의 마음은 서서히 악하게 변할 것이다.
로사리오가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