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2 악의 주입 계획 #2
@@
“그간 잘 지내셨죠?”
예의바른 실비아의 말투.
박사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응. 이젠 완전히 돌아왔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
“아니에요...!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기뻐요. 그런데...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왠지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껴져요.”
“내 분위기가?”
“네... 뭔가 약간 차가워... 아니다. 그냥 잊어주세요. 제 착각인 것 같아요.”
박사는 실비아를 보며 눈을 가라앉혔다.
눈치가 꽤나 빠르긴 하지만... 자신이 적이라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을 터.
상황은 완전히 통제 하에 있다. 그거면 된 거다.
잠시 뜸을 들이던 박사는, 지혁과 상의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착각이 아닐 거야.”
“네...?”
“너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실비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정색한 박사가 커피를 홀짝이고는 말을 이었다.
“지혁이한테 물어봤고, 답을 들었어. 네가 나한테 전화하기 전에, 이미 너희 둘은 아이테르를 충전했어. 맞지?”
“.....”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실비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탁상에 거의 박다시피 한 그녀가 순순히 인정했다.
“네... 죄송합니다...”
“나무라는 게 아니야. 네 마음도 이해해. 아델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하는 거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던 실비아는 박사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거짓말이 들통 나니 쥐구멍에라도 숨어들어가고 싶다.
박사는 자신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을 텐데... 이번 일로 이미지가 완전히 깎였을 것이다.
“맞아요... 잘못했습니다...”
“크게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거짓말은 나도 자주 했었고, 난 네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야.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충전했는데 어떻게 널 나무랄 수 있겠니? 내가 세화한테 항상 하는 말이 있어. 정의와 도덕은 다른 거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정의와 도덕은 다르다...
속으로 여러 번 곱씹으니 죄책감이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좋은 선택이었던 듯싶다.
“그럴게요...”
“난 널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긴 할 거야. 근데 만약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뒷감당은 네가 전부 해야 해. 각오할 수 있어?”
“그, 그건 당연해요...! 제가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구걸한 거니까, 다 책임질게요...”
“좋아. 나는 오늘 아델을 불러서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이번 일을 캐낼 거야. 그때 아델이 이 얘기를 꺼낸다면, 처음 듣는 척하면서 그 아이를 구슬려볼게.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럼... 지혁이는 제가 설득할까요?”
“아니,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줄게. 끝나면 결과도 알려줄 거야.”
“아...!”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진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하는데, 실비아는 현 상황만 무마하고 싶어 정신이 없었다.
급박하긴 한 상태라 이해는 하지만 말이다.
지혁의 말처럼 판을 멋대로 짤 수 있어서 쉽긴 하다.
순진한 아델이야 실비아를 향한 마음을 콕콕 건드려주면 금방 요리할 수 있으니까... 나머진 지혁에게 달린 셈이었다.
“아냐. 다만 잘 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이건 알아둬.”
“네, 박사님...!”
@@
박사는 멀리서 다가오는 아델을 보고 잔뜩 긴장했다.
마기가 감지당할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약을 먹긴 했고, 마르셀라의 실력을 믿고 있었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박사님! 오랜만이에요!”
다행스럽게도, 자신을 향해 힘찬 인사를 하는 아델은 평소의 그녀답게 활기찼다.
눈치채지 못했구나. 안도한 박사가 방긋 웃었다.
“안녕, 아델. 여전히 텐션이 높네? 보기 좋아.”
“고맙습니다! 휴가는 잘 다녀오셨나요?”
“응. 잘 다녀왔어. 어서 앉아.”
“네!”
자리에 앉은 아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음료를 보고 눈을 빛냈다.
“이거 딸기 쿠키 프라페죠?”
“글쎄...? 달짝지근한 거 아무거나 달라고 했는데...”
“맞을 거예요!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건데... 감사해요!”
박사가 헛웃음을 켰다.
프라페 하나에 물개박수까지 치며 좋아라 하는 모습이 아이 같다.
그래도 귀엽다. 왜 지혁이 아델을 아끼는지 알 것 같았다.
잠깐 동안 그녀가 음료를 마시는 모습을 보던 박사가 용건을 꺼냈다.
“내가 갑작스럽게 널 부른 이유는... 개인 상담을 진행해보기 위해서야.”
“개인 상담이요?”
“응. 속에 쌓아둔 고민거리가 있으면 들어주면서 공감해주고, 해답을 줄 수 있다면 주고 싶어.”
“아하...”
“지금 지혁이랑 실비아의 상담을 끝낸 상태인데... 실비아가 약간 이상해.”
빨대를 쫍쫍 빨아대던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실비아가 약간 이상하다라? 그게 무슨 소리일까?
혹시 아이테르 충전에 대한 강박관념을 박사에게 말한 걸까?
“언니의 어떤 점이 이상하셔요?”
“모르겠어. 비밀이 있는 듯한데,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네. 혹시 너와 관계된 일이니?”
아직 말하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실비아도 참 바보다. 박사 같은 연륜이 있는 사람이 상담을 해준다고 할 때, 어떻게 충전을 하는 게 좋겠냐고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하지.
“아휴...”
귀여운 한숨을 내쉰 아델이 말했다.
“그게요... 이건 제 고민이기도 한데, 언니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들은 박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델은 그런 박사의 해답을 기다리며 애꿎은 프라페를 휘저었고 말이다.
이윽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박사의 말문이 트였다.
“그러니까... 실비아가 지혁이와 충전을 하고 싶은데, 너는 무척 껄끄럽다 이거구나?”
“맞아요. 언니의 입장은 이해가 가지만, 지혁 씨는 저만 바라보는 외골수여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기가 조금 그래요.”
아델만 바라본다? 웃기는 소리였다.
그가 하반신을 얼마나 놀렸는지 알면 저런 순진한 눈망울을 할 수나 있을까?
아마 어마어마한 분노를 뿜어내며 지혁을 강제로 정화시킬지도 모른다.
“지혁이만 괜찮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해도...”
“요즘 마물들의 동향이 이상해. 이블리언 탐색기가 탐지하지 못하는 마물들도 나타나고 있어. 타이라트가 우리 쪽 상황을 전부 파악한 것 같아. 어제도 세화와 유리아가 태평양 한가운데에 나타난 B급 마물 두 마리를 비밀리에 처리했어.”
“그, 그래요...?”
아니, 그렇지 않다. 지어낸 얘기였다.
그럼에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실비아와 아델을 뺀 모두가 한통속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확인하려 해봐도 자신의 대답과 똑같은 답이 튀어나올 것이다.
이미 두 사람은 지혁이 깔아둔 늪에 깊숙이 발을 담갔다.
“네 신성력을 제외하면, 비스트 슬레이어 중에서 실비아가 가장 강해. 그렇지?”
“네...”
“방금도 네가 그랬잖아. 실비아의 지구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렬하다고. 정의감도 투철한 그런 인재가, 아이테르 에너지가 없어서 속앓이를 하고 있으면 어떡해? 지구의 상황을 보니까 슬슬 결전을 준비해야할 것 같은데... 여유부릴 시간이 없어.”
박사는 지금 지혁을 빌려 달라는 권유를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의중을 파악한 아델이 울상을 짓자, 박사가 약간 나긋해진 투로 물었다.
“네가 이해해주면 안 되겠니?”
“지, 지혁 씨의 의중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지혁이만 설득하면 돼?”
“네...?”
“그럼 괜찮은 거야?”
‘안 괜찮은데에...’
지혁은 운영하는 회사의 돈까지 연구실 운영비로 충당하는, 사명감이 아주 투철한 남자다.
박사가 대의를 들먹인다면 어쩔 수 없이 승낙할 것 같았다.
아아... 너무 가혹하다! 어찌 이런 시련을 자신에게 준다는 말인가!
연신 ‘흐잉...’하며 곤란한 소리를 내던 아델은, 이어지는 박사의 말에 귀를 쫑긋했다.
“네가 승낙만 해준다면, 지혁이를 설득한 뒤에... 최대한 네가 기분이 나쁘지 않는 방향으로 충전을 진행해볼게.”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말 그대로야. 서로 몸을 맞대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애무 같은 걸로 충전을 하겠다 이거지. 예를 들자면 수위가 높은 마사지?”
아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지혁이 해주었던 오일 마사지가 생각난 것이다.
처음 받았을 때 느꼈던, 정신을 잃을 정도의 황홀함.
실제로도 혼절하기까지 했다.
“아하... 마사지요... 마사지... 아... 갑자기 배고프다아...”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는 아델.
박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뭔가 있었나보네?”
“그게... 비밀이에요... 물어보지 마셔요...”
“응. 그렇게 할게. 어쨌든... 이 정도로 타협을 보면 안 될까?”
“흐아아... 저는요... 그...”
컵을 부서져라 쥔 아델이 눈을 딱 감았다.
결전 이야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큰일이 나기 직전 같은데...
그러면 지구와 지구인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양보해주는 게 옳은 일인 것 같긴 하다.
실비아가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기가 어렵다.
그래, 이번만 허락해주자. 사랑하는 언니와 지구를 위해서.
“지혁 씨만 괜찮다면... 아주 약한 수위로 충전을 허락할게요... 어느 정도냐면요... 마사지를 하되, 가장 은밀한 부위는 만지지 않는 정도로...”
박사는 기특한 눈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조건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승낙을 받기 위한 거짓말이었으니까.
“아델,난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큰 결정을 해줬어. 고마워.”
자랑스럽다고 하니 기분은 좋지만, 그래도 너무하다...
속으로 꿍얼거린 아델이 소심하게 말했다.
“야,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물론이야. 배고프다고 했지? 같이 밥 먹으러 갈까?”
“그냥... 쉴래요... 지혁 씨한테는 박사님이 잘 말씀해주셔요...”
“알았어.”
힘없이 일어난 아델은, 박사를 향해 구십 도 인사를 하고는 카페를 나왔다.
상담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싱숭생숭하다.
좋게 생각하자고 다짐을 해도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박사가 불렀을 때 나오지 말 걸 그랬나보다.
후회의 후회를 거듭하며 집으로 돌아간 아델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던 실비아가 자신을 반기자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왔니?”
“네... 박사님이랑 상담하고 왔어요...”
“그래? 표정을 보니까 별로 같은데... 어땠어?”
“그냥...”
아델이 뒷말을 삼켰다.
고민거리가 있음에도 자신에게 피해를 줄까봐 말하지 않은 실비아에게 고마워서였다.
입을 삐죽 내밀며 울음을 참아낸 아델이 힘겹게 대답했다.
“그냥 그랬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니?”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저 이만 들어가서 잘래요...”
“아, 그래... 밥은 안 먹어? 네가 좋아하는 까르보나라 해놨는데...”
“그래요...?”
까르보나라... 배고팠는데 먹고 자야겠다.
아델이 흐느적거리며 식탁에 앉자, 실비아가 잽싸게 일어나 프라이팬에 있는 까르보나라를 그릇에 퍼서 내놓았다.
“모자라면 말해. 금방 더 만들 수 있어.”
“네에... 잘 먹겠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식욕은 돋아나는 자신이 어이가 없다.
내일이면 실비아와 지혁은 완전히 상반된 반응을 보일 터.
박사가 지혁을 설득하면 곧바로 그에게 전화해야겠다.
아니다, 아예 만나러 가서 무조건 미안하다고 빌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