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1 악의 주입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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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
“.....”
“나 좀 봐봐... 응?”
거의 울먹거리는 듯한 말투에, 실비아와 등져 누운 상태였던 아델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신이 흥분해있었던 건 인정한다. 실비아는 그저 그래도 되겠냐고 물어본 것뿐이었다.
하지만 너무 충격적이었다. 남자친구를 공공재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기분도 나빴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아델이 삐친 투로 말했다.
“몰라요.”
“미안해... 방금 내가 했던 말은 취소할게...”
실비아의 사과에, 아델이 이불을 내리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촉촉해진 눈가를 쓰윽 닦아내며 사랑하는 언니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실비아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급한 마음에 그만...”
“.....”
실비아로서도 꺼내기 힘든 말이었을 터였다.
자신에게 말하기까지 수많은 고민을 했을 테고, 그 증거가 식탁에서의 우물쭈물한 태도.
언제나 당당하던 실비아가 이토록 저자세로 나오는 건 처음 봤다.
그만큼 지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하다는 뜻.
그리고 아델은 실비아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아이테르를 충전해야했을 때, 저만큼은 아니었더라도 상당히 조급했었으니까.
아델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자, 실비아가 냅다 말했다.
“너한테 너무 한심한 짓을 해버렸어...”
“하, 한심하다니요... 그렇지 않아요. 언니의 마음은 이해해요...”
“그래...?”
“네... 언니의 제안은 조금 고민을 해볼게요... 하지만 긍정적인 대답은 바라지 마셔요...”
실비아의 안색이 제법 밝아졌다.
방법을 바꾼 게 주효한 듯했다.
역시 아델에겐 동정심 유발이 최고였다.
이용하는 기분이라 정말 미안하긴 하지만... 상황만 수습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다시 표정을 싹 굳힌 실비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나로 인해 너희 둘 사이에 아주 조금의 문제라도 생긴다면 정말 힘들 거야. 세화나 유리아, 혹은 박사님한테 조언을 구해볼게...”
“지, 지혁 씨와 저희 사이에 문제는 절대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굳건할 거예요!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물론 너희 둘 사이는 평생 좋을 거야. 그냥 노파심에 말한 건데... 기분이 나빴다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나 진짜 한심하지? 네 생각도 헤아리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자존감이 확 낮아진 실비아가 몹시 안쓰럽다.
여기서 지혁을 만나러 갔다가는... 실비아는 홀로 눈물을 삼킬지도 모른다.
오늘은 언니와 있어야겠다고 다짐한 아델이 실비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언니... 저희는 지금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잖아요? 그러니까 공원에 산책 갈래요?”
“난 좋지만... 너 지혁이랑 데이트해야 되잖아.”
“오늘은 취소에요. 언니랑 같이 있고 싶어요.”
“그래줄 수 있니...?”
“물론이에요. 저 금방 씻고 올 테니까, 언니도 씻으셔요. 오늘 하루 종일 함께 놀아요.”
속으로 안도의 안도를 거듭한 실비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희망이 보인다. 설득이 가능할 것도 같다.
그리고 또 좋은 생각이 났다.
잔머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방법도 같이 써야겠다.
“응... 고마워.”
**
[오늘은 언니랑 있을게요. 미안해요, 지혁 씨.]
아델의 문자를 본 나는 괜찮다는 답장을 보내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실비아가 아이테르 충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구나.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 때가 됐다.’
아델에게 악의를 주입할 시간이 다가온다.
심장이 쿵쿵 뛴다. 기대돼서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아.
천장을 바라보며 히죽거리던 나는 보영에게 연락을 해두고 연구실을 나갔다.
현재 WW엔터와 계약을 해지한 보영은 소속사를 옮기고 휴식기를 가진 상태다.
일감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지만, 그녀가 일부러 받지 않았다.
현재는 스텔라를 가르치며 쉬는 중이었다.
전 매니저이자 현 소속사 대표가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놈이야 뭐... 보영이 하자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일 뿐이니 알 바 아니었다.
강남구의 최고급 아파트 단지로 진입한 나는, 경비원이 인터폰으로 보영에게 연락을 한 뒤 차단기를 열자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이후 대충 주차를 해놓고 엘리베이터를 타서, 가장 꼭대기 층을 눌렀다.
보영이 이번에 새로이 구입한 펜트하우스가 있는 층.
그곳에서 내린 나는, 단 하나밖에 없는 현관문 앞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다.
맑은 종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후, 편한 차림의 보영이 문을 열고 날 맞이했다.
“오셨어요?”
“잘 지내고 있었지?”
“네. 들어오세요.”
신발을 대충 벗고 거실을 둘러본 나는 양쪽 입꼬리를 쭉 올렸다.
창문에 죄다 암막커튼을 설치해놓았기에, 널따란 거실은 대낮임에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다섯 개의 침실도, 주방과 보조주방도 마찬가지로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웠다.
전등 빛도 주황색이라 뭔가 묘한 분위기를 풍겨서 좋다.
안 그래도 각종 음흉한 일을 꾸미고 실행하기에 딱 좋은 장소인데, 여기서 컴컴하기까지 하니 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진다.
보영이가 간만에 내 마음에 쏙 드는 짓을 했구나. 따로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속으로 감탄을 거듭하며 집을 둘러보고 있던 내게, 신발을 정리한 보영이 다가와 말한다.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좋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길 산 거야?”
“그냥... 보안도 좋고, 스텔라도 여기서 가르칠 겸 매입했어요.”
“보안?”
“최근에 파파라치가 자주 보이기 시작해서...”
잘 하던 활동을 접으니 뭔가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붙는 모양이었다.
보영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뭐라도 건지면 특종감이니까.
“몇 놈은 떼어내 줄게.”
“감사합니다... 커피라도 내올까요?”
“됐고, 보고부터 듣자.”
“네.”
소파에 앉은 나는 편한 자세로 보영과 대화를 나누었다.
“네가 스텔라의 뒤에 있다는 걸 아는 놈들은 다 죽었어. 이제부터 웬만해선 조심히 움직여.”
“그럴게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로 인해 마르셀라에게 보영을 권속으로 삼은 걸 들키긴 했지만, 안전가옥이야 얼마든지 몰래 새로 만들 수 있어서 괜찮다.
“스텔라 얘기나 해볼래?”
“실력은 나날이 늘고 있고, 인성도 밝아서 문제는 없는데... 동생이 계속 사고를 친대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보군.”
“그래도 예전보단 덜 치긴 해요.”
“계속 소식을 받되, 개입하려고 하지는 마. 마음대로 하게 둬.”
“알겠습니다.”
스텔라의 동생은 내가 잘 써먹은 다음 안식을 내려줄 것이다.
그때까진 마음껏 활개를 치도록 둘 예정이었다.
“스텔라한테 금전적인 도움은 주고 있어?”
“빠듯할 정도로만 주고 있어요.”
“좋아. 스텔라의 데뷔 예정일은?”
“곧 제가 다시 활동을 재개할 텐데, 그때 소개해주려고 해요. 실력이 탄탄한 만큼 화제를 몰고 올 거예요.”
스텔라는 보영의 콘서트에 잠깐 출연하기로 계획되어있었다.
그때 구경이라도 가줘야겠다. 얼굴을 안 본지 너무 오래됐어.
“내 언급은 계속 삼가고 있지?”
“물론이에요.”
상황은 잘 흘러가고 있었다.
아델도, 실비아도, 스텔라도 모두 내 손 안에서 움직이고 있어 안심이고.
다만 마계가 걱정이었다.
배신자만 아니었다면 마음을 완전히 비울 텐데... 이런 거지같은 일이 하나씩은 꼭 일어난다는 말이야.
“이 외에 보고할 사항은 없어요.”
“수고했어. 조금만 쉬다 갈게.”
“네, 대표님.”
소파에 누워 보영의 시중을 받으면서 밤까지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던 나는, 박사가 집에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오자 벌떡 일어났다.
적응이 끝났구나. 그럼 당장 달려가야 맞지.
보영이는 나중에 예뻐해 주자.
**
젊어진 박사의 얼굴은 아름답다는 말 외엔 나오지 않았다.
새하얗고 탄력적인 피부, 뭘 바르지 않았는데도 윤기가 나고 빨간 입술, 그리고 섹시해 보이는 눈매까지... 완벽했다.
저 얼굴이 탈피하기 전 박사의 젊었을 적 얼굴이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였다.
마족으로 다시 태어난 박사의 외견은 인간 때보다 훨씬 고혹적이었고, 치명적인 매력을 풀풀 풍겼다.
“예쁘다. 근데 실비아랑 아델이 지금 누나의 모습을 보면 의심하겠어.”
부드러운 미소를 띤 내 말에, 박사가 자신의 입술을 핥더니 우물쭈물 대답한다.
“알아. 아직 변신을 덜한 상태라서 그래... 그냥 마족의 특성만 지워놨어...”
“왜?”
“이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마기는 걱정하지 마. 마르셀라가 신약을 개발했는데... 변신하고 먹으면 마기도 지워지고 외형도 유지할 수 있대...”
“부작용은 없어?”
“하루 걸러서 먹으면 없어...”
활동은 이틀에 한 번씩이라고 봐도 되겠구나.
아무리 마르셀라가 천재라지만, 아이 때문에 제약이 걸린 듯하다.
그러려니 한 나는 양팔을 좌우로 활짝 벌렸다.
그러자 박사가 ‘흐응...’하는 추임새를 넣더니, 내 품으로 달려오듯 안겼다.
그런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손을 올린 내가 말했다.
“어서와, 누나.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그간 속 썩여서 미안해요...”
마음고생에서 완전히 벗어난 말투.
위태롭게 꺾이려 했던 가지가 새로이 붙어 더욱 튼튼해진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
날 향한 충성심과 사랑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이래서 타락을 멈출 수가 없어. 빨리 실비아와 아델에게도 이 마왕님의 은총을 하사해주어야겠다.
“복제연구는 바로 시작할게. 마르셀라가 기초를 정말 잘 다져놨더라.”
이어지는 박사의 말엔 약간의 가시가 박혀있었다.
화가 난 건 아니고, 여태까지 자신을 속였던 것에 대한 투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박사는 내가 자신의 연구를 훔치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알았어. 두 사람이 상의하면서 해.”
“임상시험이 필요하면 아무 인간들이나 가져다 써도 돼?”
이렇게나 꼴리는 말을 해주다니!
아랫도리가 순식간에 솟아오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응...”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씻고 올게.”
박사의 새하얀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간 나는 옷을 훌러덩 벗고 샤워를 시작했다.
마음만 같아선 당장 덮치고 싶었지만, 마족이 된 박사와의 첫 관계다.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해야 맞다.
오랜 시간동안 온몸을 깔끔하게 씻은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밖으로 나왔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박사가 침대에 앞으로 누워선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 응. 응. 난 네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해. 엄청 중요한 일이잖아. 아냐... 고맙긴... 오히려 내가 고맙지. 지혁이는 동의했다고 했지? 알았어.”
‘실비아인가?’
맥락상으론 맞는 것 같은데... 뭐지?
박사는 몇 분간 실비아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를 격려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후 날 돌아보며 물었다.
“실비아가 너랑 아이테르 충전을 하고 싶다는데... 네가 허락했다고 그러더라. 맞아?”
“이미 했는데? 어제 모텔에서.”
“그래...? 그럼 실비아가 거짓말을 했네.”
“무슨 소리야?”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통화내용은 이랬다.
지구를 지키고 싶던 실비아는 아이테르 충전이 급했고, 좋아하는 이성은 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나와 충전을 하고 싶어서 아델에게 그리 해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반발이 너무 심했다고 한다.
현재 에둘러 설득하고 있기는 하지만 요원할 것 같아서, 박사에게도 부탁을 한 거다.
아델에게 대의를 생각하라고 한 마디 해줄 수 있냐고.
“그렇단 말이지...”
모든 내막을 파악한 나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실비아가 이빨 한 번 제대로 터는구나.
하긴, 솔직하게 말하기엔 아델의 반응이 두려웠겠지.
나와의 일은 승낙을 받은 뒤에 했던 걸로 얼버무릴 셈인가?
실비아에게 있어선 위험한 도박인데...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렇다면 도와주는 쪽으로 가야겠다.
죄의식도 약간이나마 덜어주마.
그러니까 실비아야, 나중에 타락하면 이 마왕님을 극진히 모시도록 해라.
이처럼 자비로운 마왕이 세상에 어디 있냐?
“어떡해? 그냥 둬?”
박사의 물음에 이를 드러낸 내가 반문했다.
“누나, 마르셀라가 개발한 신약... 그거 아직 안 먹었지?”
“응.”
“내일 먹고 실비아랑 아델을 만나줄래? 각자 따로.”
“만나서 어떻게 할까?”
“일단 실비아부터 만난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