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5 뭔가 잘못됐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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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실비아는 아주 조심스럽게 아델의 방문을 열었다.
이불을 걷어찬 채로 잠들어있는 아델.
그녀가 꼭 쥔 손에는 목걸이 줄이 삐져나와있었는데, 지혁에게 받은 여우 목걸이를 쥐고 잔 듯했다.
‘자면서까지 지혁이를 생각하는 건가?’
어쨌든 저럴 정도로 지혁을 사랑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문고리를 잡고 아델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실비아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아델을 안아든 채 정원을 거닐고, 벤치에 앉아 온갖 애정표현을 했던 두 사람.
그때, 자신은 저런 달달한 사랑을 하는 아델을 향해 시기심, 질투심이 생겼었다.
굳게 믿어왔고 언제나 챙겨주어야 하지만, 때때론 의지가 되는... 그러한 아델에게 나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미안했다.
소리 내지 않고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조심스레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았고, 아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웅...”
잠꼬대를 하더니 헤헤 웃는 아델.
그 무방비하고 순수한 모습을 본 실비아는 심장이 너무나도 아려왔다.
순진무구한 이 모습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혁이랑 거리를 둬야겠어...’
그에게 더 빠져들기 전에 관계를 끊어내자.
그랜드캐니언에서 있었던 일은 그저...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일어난 일탈일 뿐이다.
어차피 제대로 만나지도 않은 관계잖아? 이토록 전전긍긍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그리 생각한 실비아가 아델을 깨우려고 할 때,
우웅-!
실비아의 휴대폰이 진동을 발했다.
놀란 그녀가 아델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도 아델은 깨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안도한 실비아는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다.
[오늘 점심에 식사 한 끼 해요.]
지혁의 문자였다.
휴대폰을 꽉 쥔 실비아는 자신의 마음이 요동치는 것 같자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거리를 두자고 다짐했잖아! 왜 갈대같이 흔들리는 건데?
스스로를 나무란 그녀가 답장을 보냈다.
[미안해. 오늘은 안 돼.]
[12시에 일산 XX 레스토랑으로 오세요.]
[싫다니까? 다른 사람이랑 먹어.]
[기다릴게요. 오기 싫으면 안 와도 돼요.]
뭐 이런... 자기 할 말만 하다니.
헛웃음을 켠 실비아가 빠르게 손을 놀렸다.
[기다리지 마.]
톡을 보냈는데도, 그리고 읽었는데도 지혁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포기한 건가? 어쨌든 자신은 단호하게 거절했으니까... 안 가도 되겠지.
채팅방을 나가면서까지 증거를 없앤 실비아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자, 아델이 타이밍 좋게 눈을 떴다.
“.... 언니... 언제 왔어요...? 운동 갈 시간이에요...? 금방 일어날게요...”
“아냐. 그냥 너랑 아침 먹으려고... 우동 만들어놨는데 먹을래?”
아델의 귀가 쫑긋했다.
“우동이요...? 고수 뺐어요...?”
“당연히 뺐지.”
“먹을래요.”
싱글벙글해져선 양팔을 들어 올리는 아델.
실비아는 아델의 팔을 붙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이후 눈곱을 떼는 아델을 바라보며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얼른 세수해.”
“네, 언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아델이 끙끙대며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휘청휘청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실비아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일산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는, 웨이터가 실비아를 안내해주는 모습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후줄근한 트레이닝 복을 입은 그녀는, 날 보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물을 채워주려는 웨이터를 돌려보낸 내가 말했다.
“오셨네요.”
“밥만 먹고 갈 거야.”
굳은 결의가 서린 표정과 말투를 보아하니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던 것 같다.
돌아온 아델을 보고 죄책감을 팍팍 느꼈구나.
다행이다. 오늘 만나지 않았다면 완전히 떠나보낼 뻔했어.
“그러세요. 주문은 제가 해놨습니다. 그리고 디바이스에 대해서 말인데요.”
“뭔데?”
“오늘 중으로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저, 정말...?”
실비아가 목소리를 높이려다 입을 앙다물었다.
주변 사람들이 들을까봐 우려한 것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진짜야?”
“네. 그러니까 저녁이나 밤에 부르면 연구실로 오세요.”
“아, 알았어. 근데 넌 출장을 갔었다고 아델한테 들었는데...”
바빴는데 디바이스를 만들 시간이 어디 있었냐는 소리였다.
“잠 줄여가면서 만들었어요.”
“.... 고마워... 진심이야.”
지금은 고마워하지만, 나중엔 아이테르 충전 때문에 곤란할 걸?
그리고 결국 너는 날 선택할 거다.
당장 충전이 급한데, 네 눈에 차는 남자가 있냐? 날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없잖아.
그러니까 자꾸 엇나가려고 들지 마라. 골치 아팠던 건 박사로 족하니까.
“당연한 일을 가지고 그렇게 감사인사를 하면 사람들이 얕봅니다.”
“예의가 바른 게 뭐 어때서?”
“요즘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예의바른 사람은 손쉬운 먹잇감이 돼요.”
“웃기시네...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길 잠시, 서버가 에피타이저를 가지고 왔다.
온갖 희귀한 재료가 곁들어진 요리에 대해 짧고 굵게 설명을 들은 내가 히죽 웃었다.
“여기 음식 맛있으니까, 종종 와요.”
“.... 아델이랑 오면 되잖아.”
“아델은 이런 거 못 먹어요. 입이 짧아서.”
“걔가 그렇기는 하지... 면류나 치킨, 피자 같은 것만 좋아해.”
“그러니까 저랑 와줘요. 이런 거 먹고 싶을 때 못 먹어서 힘들어요.”
실비아가 포크를 든 채로 우뚝 멈추었다.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깊은 고민을 하는 것 같다.
이윽고 실비아의 입이 열렸다.
“가끔... 동료로서 가끔이라면 좋아.”
거봐, 넌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다니까?
“네. 동료로서 가끔요. 이제 얼른 먹죠. 이 에피타이저는 식기 전에 먹어야 맛있어요.”
“알았어...”
**
푸쉬익! 하는 힘찬 소리와 함께, 연구실 문이 열리면서 실비아가 들어왔다.
그녀는 얼굴에 얕은 화장을 한 채였다.
머리는 옆머리가 살짝 꼬아져서 내려오는 포니테일로 묶었고, 아이라인도 약간 날카로워보이게 제법 잘 그렸다.
틴트도 어울릴만한 빨간 것으로 바른 상태라, 안 그래도 섹시한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옷이야 뭐... 그냥 청바지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회색 롱코트를 걸친 상태지만, 저 정도 얼굴이면 뭘 걸치든 예쁘니까 넘어가자.
실비아는 기대감이 서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고대하던 디바이스가 완성됐으니 그럴 수밖에.
나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실비아가 안달이 난 듯,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빨리 보여줘.”
부드럽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꼭지점 쪽이 조금 패여 있는 정사각형 디바이스를 들고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버튼을 눌러 아이테르를 옮기기 위한 대롱이 튀어나오도록 했다.
“보관함 꺼내세요.”
“아, 응...!”
멍하니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실비아가 재빨리 아이테르 보관함을 꺼냈다.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대롱 부분을 보관함 위쪽에 가져다댔다.
“열어요.”
“지, 지금...?”
“네. 불안해하지 마세요. 아델 때도 이렇게 했으니까.”
“알았어...”
실비아가 이토록 긴장한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동굴에서 그렇고 그런 일을 할 때 외엔 처음인가? 아마 그런 듯싶다.
떨리는 손으로 보관함을 조작한 실비아는, 보관함 윗부분이 작게 열리고 그곳으로 내가 대롱을 집어넣는 걸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이어서 보관함 안에 있던 아이테르가 대롱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자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했다.
냉정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꽤 귀엽기도 했다. 아델만큼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아이테르는 곧 디바이스 가운데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이후 잠깐 활발하게 움직이다가, 아델 때처럼 알록달록한 빛을 온 사방으로 뿌려대며 연구실 안을 비추고는 이내 수그러들었다.
틱!
버튼을 눌러 대롱을 제거한 나는, 실비아의 오른쪽 손목에 디바이스를 채워주었다.
“조작방법은 아델에게 들으셨죠?”
“아... 응... 다 외우고 있어.”
“해보실래요? 일단 아이테르 충전량부터 확인해보세요.”
“그, 그래... 잠깐만...”
손목을 들어 올려 디바이스를 낱낱이 살피던 실비아는, 가운데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흰색 숫자가 디바이스 위의 허공에 나타났다.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는 에너지.
한 자리 숫자를 본 실비아의 얼굴이 침울해졌다가, 금세 다시 돌아왔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내가 미안한 투로 말했다.
“저 때문에 많이 없어졌네요. 제가 그랜드캐니언에 같이 가자고만 안 했었어도...”
“무슨... 그때 내가 같이 안 갔으면 넌 죽었어. 나도 기쁜 마음으로 널 도운 거니까, 신경 좀 그만 써.”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 가지고 감사인사를 하면 사람들이 얕본다며? 예의바른 사람들은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고 일장연설을 하더니... 너도 똑같네?”
“아니죠... 그 말은 실비아 씨 같은 순진한 사람들한테 국한한 말이었어요. 저는 이 세상에 적응한지 오래니까 예외고요.”
그 말에 실비아가 실소를 터뜨리더니, 내 엉덩이를 발로 약하게 찼다.
긴장이 확 풀렸구나. 역시 우린 이렇게 티격태격해야 어울려.
아픈 척 오버를 하면서 실비아의 장단에 맞춰준 내가 말했다.
“실비아 씨의 활동명은... 제가 깊은 고민을 한 끝에 캐롤라인이라고 정했어요. 줄여서 캐롤이라고 부를게요.”
“캐롤라인...? 캐롤?”
“네. 이미지랑 딱 어울리지 않아요?”
“내 이미지가 어떤데?”
“차갑지만 따뜻한?”
“뭐야 그 말도 안 되는 느낌은...”
어이가 없었는지 킥킥거린 실비아.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한테 선택권은 없는 거야?”
“생각해두신 이름이라도 있을까요?”
“아니, 없어. 캐롤라인으로 할게.”
실비아는 연신 ‘캐롤’이라는 이름을 되뇌며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이름이 마음에 든 것 같다.
“슈트는 아직이지만... 조만간 아델과 함께 만들어드릴게요.”
“필요 없는데...”
움직임에 자신이 있는 말투였다.
고인물도 한 번씩 실수한단 말이야! 내 말대로 해!
“실비아 씨가 빠른 건 인정하지만, 마기를 사방팔방으로 뿌리는 마물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눈 먼 공격에 맞기라도 하면 위험해요. 유리아 씨나 세화도 다친 적이 있으니까 제 말대로 해요.”
“그래...?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무기도 폴리머스로 만들 때까지는 기존에 쓰던 걸 사용하고 계세요.”
“응.”
“혹시 무기를 잠깐만 살펴봐도 될까요? 비슷한 디자인으로 만들어드리고자 하는데...”
“물론이야.”
실비아가 품에서 손바닥 크기만 한 무언가를 두 개 꺼냈다.
예전에 보았던 통신기와 비슷한 물건이었다.
그녀가 가운데를 꾹 누르자,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게 40센티 정도 되는 검집으로 변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한 차례 탄성을 터뜨린 내가 물었다.
“편리하네요. 그것도 보관함인가요?”
“응. 아예 가져가서 연구해도 돼.”
완전히 날 신용하는 실비아에게 기꺼운 마음이 든다.
역시 착한 척, 정의로운 척이 최고야.
“그럴게요.”
그렇게 실비아에게서 쌍검을 받아 살펴보려는 찰나,
삐빅-! 삐빅-!
[경고, 이블리언 에너지가 감지되었습니다.]
연구실에 달린 스피커에서 긴박하지만 무감정한 경고음이 들려왔다.
연구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상황판을 유심히 바라보던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뭔가 잘못됐다.’였다.
나는 오늘 마물을 내보낼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