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0 권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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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
또 그 꿈이다.
에드워드가 떨어지고 있고, 절벽 끄트머리에서 자신과 지혁이 진한 키스를 하는 꿈.
허나 이번엔 달랐다.
여태껏 제 3자 입장에서, 마치 영혼이 된 것처럼 허공을 부유하며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1인칭이었다.
당사자인 본인이 되어 지혁과 입술을 맞댄 채 혀를 섞고 있다는 뜻이다.
지혁과의 달콤한 키스에 집중하던 박사는, 그가 눈을 번쩍 뜨자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고야 말았다.
자신의 몸이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쭈욱 늘어나는 기분을 느낀 박사는,
“핫!”
그대로 깨어나 상체를 일으켰다.
땀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몸은 현재 나신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박사는, 옆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흠칫했다.
“우리 아이는 괜찮아. 아무 일 없어.”
침대 옆엔 의자를 끌고 온 지혁이 앉아 아주 온화한 눈빛으로 박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잃었던 상황을 상기해낸 박사의 숨이 다시금 가빠져왔다.
자신은 지혁을 만나고 혼절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아니, 심리가 안정될 정도로 잔잔한 기운을 뿜어내던 지혁을.
하지만 현혹되면 안 된다. 저놈은 가짜였다.
타이라트가 지혁의 탈을 쓴 게 분명하다!
벽에 찰싹 달라붙은 박사가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리고는 소리쳤다.
“가짜... 넌 가짜야!”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해해. 믿기지 않았을 테니까.”
“.....”
“뭐든 증명해줄게. 속초에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누나의 임신까지...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 난 누나와의 추억을 전부 간직하고 있어.”
사탕발린 말로 추억을 되살리려 해봤자 소용없다.
저 모습은 진짜 지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으나... 믿음이 가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눈빛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지혁의 눈엔 사랑이라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집에서 항상 보던... 지혁 특유의 부드러운 눈빛.
타이라트가 저런 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지혁이 타이라트였겠지.
박사가 이불을 쥔 주먹에 힘을 잔뜩 주었다.
엄청난 배신감에 치가 떨리는 것이다.
지혁은 자신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일부러!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쓰레기 새끼...!”
쥐어짜내는 듯한 박사의 욕설에, 지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누나한테 접근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 세화를 비롯한 비스트 슬레이어들만 내 권속으로 만들 생각이었지. 근데... 누나가 정말 탐나더라. 갖고 싶었어.”
“입 닥쳐...! 닥쳐!”
“누나와의 생활은 즐거웠어. 정말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꼈지.”
“개소리 하지 마!”
“나는 진심이야.”
“너는 날 속였어... 날 속이고 세화의 피 같은 걸 먹이도록 해서, 에드워드를 버리게 하고 가치관이 바뀌도록 만든 거야...!”
박사는 지혁이 자신에게 꾸준히 악의를 주입해왔다고 믿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슴으로만 그리 믿는다고 해야 옳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여기에 잡혀오기 전까지, 지혁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진심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누나는 인간이야. 아이테르도 없지. 정신력은 꽤나 강하지만 보통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아. 세화의 피에 담긴 마력은 다른 말로 악의라고 부르는데, 누나와 비슷한 다른 평범한 사람에게 악의를 주입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아? 아예 노예가 돼. 채보영 알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지혁에게 마약을 권유한 주범인데.
“설마 채보영도...?”
“맞아. 지금 날 위해서 일하고 있지. 걔는 누나 같은 모습이 전혀 없어. 능동적이긴 하지만 내가 지시한 명령만을 위해, 그걸 최우선 과제로 삼고 움직여. 의심? 당연히 있을 수가 없지. 참고로 걔한테는 누나보다 훨씬 적은 양의 피를 주입했어.”
“나는 세화의...”
“그래. 세화의 피를 먹었지. 근데 세화가 왜 누나한테 자꾸 날 믿으라느니 같은 말을 했을까?”
“왜... 그랬는데?”
“이런 상황이 왔을 때, 누나가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지금 누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 있음에도 꽤나 침착해. 왜? 나에게서 세화와 있을 때랑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으니까.”
그랬다.
현재 박사는 지혁이 미세하게 뿜어내는 기운을 포근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마저도 절로 안정이 되어갔다.
그래서 현재 미치고 팔짝 뛸 상황임에도 발광을 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냉정해질 수 있었다.
원래였다면 정신을 몇 번이나 놓아버렸을 텐데 말이다.
“누나가 왜 세화, 유리아, 그리고 내 기운을 익숙하게 생각하는지 알아? 피를 먹어서? 물론 그 이유도 있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어. 누나의 뱃속에 자리한 아이가 마기를 품고 있어서 그래.”
“뭐...?”
“나도 몰랐어. 난 아이에게 악의를 주입하지도 않았거든. 그런데 세화의 피를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걸 보고 확신이 서더라. 애초에 당연한 일이긴 했어. 마족과 인간의 유전자가 섞인 아이니까, 당연히 마기도 품고 있었겠지.”
“.....”
“세화의 피에 담긴 마력, 마기는 내 거야. 애초에 마족이 된 세화는 내 힘을 얻어 쓰고 있어. 누나는 지금 세화가 하는 말을 법처럼 생각하게 됐지? 내 말도 마찬가지일 거야. 지금 전부 믿어주고 있잖아.”
“아... 아아...!”
“지금까지 세화가 했던 모든 말은 다 나와의 만남을 대비한 일이었어. 내 말에서 믿음을 느끼게끔, 그리고 누나의 이성이 유지되게끔.”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현재 자신은 지혁과의 대담 초창기에만 약간 불신의 마음을 가졌을 뿐, 지금은 그의 말을 모조리 믿고 있었다.
화병이 나서 죽어버릴 것 같은데도, 지혁의 모든 설명을 마음속 깊이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세화의 말처럼 지혁을 그녀보다 더한 영혼의 안식처... 아니, 더 나아가 유일한 안식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혁이 밉긴 했지만 싫어지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고, 사랑하는 마음도 그대로였다.
이 또한 세화의 피에 있는 효과일까?
그렇지 않다. 이건 온전한 자신의 감정이었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장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세화가 했던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세화는 대리인이었다. 지혁의 마음을 전달해주는 대리인.
그녀가 한 모든 말은 지혁이 하고자 했던 말인 거다.
지혁과 타이라트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괜한 대상을 사모하지 않도록 돌려서 말을 했던 것이다.
“약간 강제력이 있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다시 돌아가서... 누나는 채보영처럼 한 번에 떨어지지도 않았고, 자연스럽게 내 마기를 받아들였어. 우리 아이가 누나의 체질을 변화시키고 있었던 거야.”
뱃속의 아이가 자신을 천천히 마족으로 바꿔가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세화의 피... 아니, 지혁의 마력을 먹고도 정신이 나가버리지 않았던 것이고?
설명을 듣다보니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었다.
바로 자신이 마족으로 변해가는 꿈이었다.
이 꿈을 꾼 이유가 아이 때문이었나보다.
“원래는 나에 대한 진실을 아주 천천히, 하나하나씩 알아가게 하려고 했었어. 근데... 시간이 없어져서 어쩔 수 없게 됐어.”
“어쩔 수 없다니...?”
“아델 때문이야. 아델의 신성력이 내 몸에 영향을 줘. 마기를 점점 지워가고 있어. 이로 인해 내게 반기를 든 마물들도 나타났지. 최근 세 마리의 S급 마물이 동시에 나타났었잖아?”
“그럼 그 놈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었어...?”
“맞아. 그래서 쳐냈지. 나는 비스트 슬레이어처럼 강하지 않아. 이런 내게 마기가 없어지면 속 빈 강정밖에는 안 돼.”
이제야 지혁이 새로이 제작할 디바이스에 통제장치를 넣자고 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는 아델이 아이테르의 힘과 신성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전말을 알게 된 박사가 멍하니 지혁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지. 때마침 누나가 날 속이면서까지 뒷조사를 하려던 걸 알아차렸고... 그때 결정했어. 누나를 마족으로 만들겠다고.”
“그, 그냥 돌아오라고 한 마디만 했으면 됐잖아... 보고 싶다고 단 한 마디만 했다면 모든 일을 접고 돌아갔을 텐데... 왜 이런 짓까지 하면서 날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데...?”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누나가 정말 집으로 돌아왔을 것 같아? 아닐 걸? 게다가... 아이가 더 자라면 자연스럽게 마기를 풍겼을 거야. 그걸 알게 되면 당장 손을 쓸 사람이 누굴까?”
아델이었다.
아델의 신성력은 마기와 완전한 상극. 정화는 물론 소멸까지 시킨다.
만약 아이의 마기를 눈치챈 아델이 신성력을 사용한다면?
아이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었다.
소멸하지 않고 정화만 된다? 다행이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지혁의 본질은 마족. 그런 마족의 아이를 배었는데 마기가 사라진다면... 그냥 빈껍데기와 다름없어지잖은가.
그렇게 된다면 정말 절망스러울 것 같았다.
아이의 부모는 지혁과 박사 자신이어야만 한다.
“.... 지혁아... 난...”
“사실 말은 누나를 마족으로 만들겠다고 했지만, 여기서 멈출 수도 있어.”
“뭐...? 그럼 아이의 마기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현재 세화와 유리아는 마기를 감추는 약을 먹고 있는데, 그걸 개량하면 아이의 마기도 들키지 않게 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아마도라니... 확신이 아니잖은가.
게다가 지금 이런 상황을 겪고도 평소처럼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절대 못한다.
또한 지혁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거의 호소하듯 말하는 그에게서 진정성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여전히 지혁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더라도 지혁과의 관계를 없던 일로 하기 싫었다.
에드워드와의 추억? 이미 갖다 버리고 깨끗이 잊은 지 오래다.
지혁의 공정과 세화의 피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토록 괴로워하는 이유가 뭘까?
지혁이 자신을 완전히 속여서? 인간인 상태로는 지혁과 진정으로 맺어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아마 둘 다인 것 같다.
“속여서 정말 미안해.”
박사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한 지혁의 사과.
흠칫한 그녀가 물었다.
“이, 이것도... 피... 아니, 마력의 효과야...?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어?”
“그럴 리가... 절대 아냐. 그냥 누나의 얼굴표정을 보고 눈치껏 읽어내는 거지.”
이런 독심술은 반칙이었다.
뿔이 났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지혁아...”
“누나의 선택을 존중할게. 누나가 마족이 되든 말든 우리는 가족이야. 그건 변함없어.”
우리는 가족이다.
세화에게 들었던 때보다 훨씬 두근거리고, 설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마족이 되어 모든 번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박사의 이런 흔들리는 모습에, 지혁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누나를 사랑한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절대로.”
당장 이 자리를 뛰쳐나가도 모자랄 판인데,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두근댄다.
마족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샘솟는다.
‘마족... 내가 마족이라고...?’
애초에 세화의 자비로움을 느꼈을 때, 마족이 되는 쪽으로 노선을 정하려고 하긴 했다.
지혁이 타이라트임을 안 이상, 그리고 그의 아이를 밴데다 사랑하는 마음까지 굳건한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기도 했고.
허나 걸리는 게 있었다.
유리아나 세화처럼 지혁을 주인님이라고 호칭하기가 싫었다.
예전처럼 서로 사랑을 나누며, 동등한 입장에서 걸어가고 싶었다.
“난... 무서워... 변하면 내가 아니게 될까봐...”
박사의 걱정에, 지혁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켜주려고 했다.
“누나는 누나야. 본성은 절대 달라지지 않아.”
“어떻게 확신해? 난 이미 세화의 피를 먹고 달라졌는데...”
“장담할게. 누나가 마족이 되어도 우리 관계는 평소와 같을 거야.”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아니, 많이 안정이 되었다.
박사는 자신이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지 깊은 고민을 했다.
이윽고 마음의 결정을 거의 다 내린 박사가 물었다.
“마족이 되려면 뭐가 필요한데...?”
“누나가 필요한 준비물은 딱 하나야. 의지.”
“의지... 로만 된다고...?”
“누나는 지금 세화와 여러 일을 겪으면서 마기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됐어. 아까도 말했지? 세화의 마력은 곧 내 마력이라고. 남아있는 약간의 미련만 버리면 돼.”
남아있는 약간의 미련...? 그게 뭘까?
지혁을 의심하고자 하는 마음?
이도 아니라면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
“이해가 안 돼...”
“그냥 진심으로,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겠다고, 가족이 되겠다고 내 앞에서 맹세만 하면 돼. 세화가 그랬지? 가족이 되고 싶으면 말하라고.”
“.... 설마 세화는 그 말을 너한테 하라는 의미로...?”
“정확해.”
아무래도 그게 마족이 되는 키워드인가보다.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은 박사는, 마지막 결정을 하기 전에 한 가지 다짐을 받기로 했다.
“하, 하나만 약속해... 날 아랫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겠다고...”
“내게 영원히 예속되기만 할 뿐, 우리 관계는 변함없을 거야. 모든 걸 걸고 약속할게.”
예속이라? 약간 불안한 단어이긴 하지만... 지혁을 떠날 수 없다는 뜻도 있었다.
애초에 그의 곁에서 떠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이는 문제가 안 됐다.
더군다나 모든 걸 걸고 약속한다고 하니...
‘하자...’
자신에겐 지혁이 전부다.
오직 그만 곁에 있으면, 인간이길 포기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하니 괴로웠던 마음이 전부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관점... 그래, 관점의 차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오히려 좋잖은가.
하등한 종족에서 벗어나 더욱 상위의 존재로 거듭나게 되니까.
결심을 마친 박사가 지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해야만 의식이 진행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지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박사가 입을 열었다.
“난... 마족이 될래... 너와 가족이 되고 싶어...”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그 맹세를 내뱉자, 지혁이 정말 멋진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고마워, 누나.”
그 순간,
푸화악-!
지혁의 몸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마기가 피어나와 박사의 온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허억...!”
아프진 않았다. 그저 세찬 강풍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듯한 느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기운을 받아들이던 박사는,
뿌득-! 뿌드득!
갑작스레 등과 허리 쪽에서 뼈가 재구성되는 소리에 당황해했다.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느낌이 낯설기만 할뿐.
하복부에서도 무언가 간질간질하고 야릇한 느낌이 일어난다.
정말 생소한 기분이었지만, 변화의 과정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마족이 되어간다. 지혁에게 예속되어간다.
모든 번민에서 벗어나, 오직 그만을 위한 권속이 된다.
이제... 행복하기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