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9 마지막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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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준비는 하셨나요?”
유리아의 방 앞에 선 세화의 물음.
박사가 심호흡을 후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도 긴장됐다.
우연찮게 알아낸 진실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멘탈이 바스라지고 다시 재조립되는 와중에서도 이성을 조금이나마 유지하는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다.
박사가 정신을 꽉 붙들고 있을 때, 세화의 진중한 말이 들려왔다.
“유리아 언니에게 박사님을 건드리지 말라 말해놓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명령을 내려놓았다는 뜻인데...
그러면 유리아는 세화보다 낮은 계급인 건가?
일단 그녀가 마족인 건 확실하지만, 모든 건 직접 들어봐야 성이 찰 것 같았다.
“.... 너는 들어가지 않을 거야?”
“같이 들어가긴 하되, 저는 대화가 끝날 때까지 철저히 방관만 할 거예요. 유리아 언니에 대해 궁금한 건 직접 물어보세요.”
“유리아가 내게 진실을 알려줄까?”
“분명히 알려줄 거예요. 만약 유리아 언니가 거짓말을 할 경우, 제가 정정해드릴게요. 이러면 됐죠?”
세화의 말은 신용이 간다. 그렇다면 문제는 전혀 없었다.
준비를 마친 박사가 고개를 위아래로 한 차례 주억거렸다.
그러자 세화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는 방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라는 제스처에, 박사가 조심스레 발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존에 봤던 것과 똑같은, 사면에 새하얀 벽으로 도배된 병실 느낌을 풍기는 방 안.
침대엔 다리를 꼰 유리아가 걸터앉아 도도한 표정으로 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묶여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
공기마저도 냉랭해 숨을 마실 때마다 폐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유리아의 눈매가 저렇게 매서웠었나...?’
현재 상황 때문에, 그리고 유리아가 적의 편이란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그리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위압감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박사.
잠깐 침묵하던 그녀가 물었다.
“언제부터였어...?”
그 말에 유리아의 광대가 올라갔다.
콧방귀를 낀 그녀가 대답했다.
“언제부터 변해있었냐고요? 한참 전부터요. 리옹에서 절 부를 때보다 훨씬 전부터, 저는 주인님의 종이었어요.”
박사가 이마를 짚고 휘청거렸다.
지금 유리아가 타이라트를 주인님이라고 지칭한 건가? 부모님의 원수를?
게다가 자신 스스로를 종이라고 낮춘 거야?
대체 타이라트는 뭐하는 존재일까? 어떤 방법으로 유리아를 이렇게 타락시킨 거지?
벽에 몸을 기대어 몸의 중심을 잡은 박사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너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잖아... 타이라트를 죽이겠다는 일념이 있었잖아. 부모님과 네 약혼자, 그리고 왕국의 복수를 해야 하잖아...”
“복수요? 아니에요. 저는 아버지였던 놈이 주인님의 자비를 거절한 게 너무나도 싫어요. 왕국을 다스려준대도 권력에 맛 들려선 백성들과 여러 기사, 병사는 물론, 심지어 어머니까지 사지로 내몰았죠.”
유리아의 왕국은 뜬금없는 침공을 받았다.
그래서 유리아가 타이라트에게 복수하기 위해, 더 이상의 무고한 피해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마법사들이 만든 포탈을 타고 지구에 온 거다.
헌데 피해자가 침략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다니...
앞서 주인님이라 부른 것도 그렇고, 유리아는 상상이상으로 떨어졌다.
“유리야... 환생한 네 아버지는...? 지금 지구에 있는 김태곤은 어쩌고...?”
유리아가 풉 하는 조소를 터뜨렸다.
명백한 비웃음. 등줄기에 소름이 돋은 박사가 눈을 크게 떴다.
“박사님, 쓸데없는 신파극은 그만두죠? 그리고 환생이 정말 실재한다고 믿으세요? 주인님께 거둬지기 전의 저는 철석같이 믿긴 했지만, 박사님은 그 정도로 순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김태곤은 분명히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직접 정보를 확인해보기도 했었고, 지혁과의 사업 연계까지도 체크했었다.
얼굴까지 봤다. 김태곤은 중절모와 수트가 잘 어울리는 중후한 중년인이었다.
그런데도 유리아가 김태곤을 애초에 없는 사람인 양 취급한다는 건...
‘김태곤은 만들어진 인물이었던 건가...?’
환생이라는 구실로 유리아에게 접근하기 위한, 의도적으로 조형된 존재.
아니, 이보다 더 복잡할 것이다.
유리아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는 환생한 김태곤이었다.
그가 유리아와 계속 붙어 지내면서, 그녀의 가치관을 뒤흔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굳건한 유리아의 정신을 깰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서, 설마... 김태곤은 타이라트가 변장한...”
입가에 손을 올린 박사의 중얼거림에, 유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잘 유추해내셨네요.”
가설을 직접 증명해주는 유리아.
박사는 거의 쓰러질락 말락 비틀거리면서도 지혁을 생각했다.
지혁이 최근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유도 김태곤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지혁의 사업 파트너였으니까 붙어있는 시간이 많을 터.
그때 사탕발린 말로 지혁을 꼬드긴 것이 확실하다.
박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리고 있을 때, 유리아가 이런 말을 했다.
“박사님, 제가 조언 하나 할까요?”
“....?”
“박사님 스스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는 일은 하지 마세요. 믿어왔던 것이 무너지면 감당하기가 힘드니까요. 그냥 저한테 다 물어봐요. 대답해준다고 했잖아요.”
믿어왔던 게 무너진다고? 이해가 잘 안 됐다.
그러나 망상은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이해했다.
확실히... 유리아에게 물어보고 답을 듣는 게 나았기에, 식은땀으로 얼굴이 흠뻑 젖은 박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좋아.”
“다음 질문?”
“너도... 세화처럼 본모습이 있어?”
그 말에 유리아가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오더니, 박사의 앞에 정면으로 섰다.
이후 사악한 미소를 짓고는 힘을 집중했다.
이윽고,
푸화악-!
유리아의 발끝에서부터 강맹한 기운이 솟아나더니, 유리아의 전신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세화와 똑같은 음문이 하복부에 생겨나고, 손톱이 뾰족해지고, 입술이 빨갛게 진해지고, 홍채가 보라색,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고...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격한 변화였다.
세화의 부드러운 변화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전체적으로 세화와 비슷한 형식으로 변신했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머리카락이었다.
연보라색인 세화의 머리카락과는 달리 유리아의 머리는 심연처럼 어두웠다.
마치 그녀의 현 마음처럼.
‘무서워...’
세화와는 다르게 정말 무서웠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적들의 머리통을 꿰뚫을 것 같은 느낌.
덜덜 떨면서 유리아의 본모습을 지켜보던 박사는, 그녀가 풍기는 검은 기운에게서부터 익숙한 느낌을 받자 눈을 지그시 떴다.
세화 때와 같은 느낌이다. 이게 대체 뭘까?
박사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해 그 기운을 파악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유리아가 곧바로 변신을 풀자 기운이 사라져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해요. 다음 질문이 있나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유리아는 자신에게 호의가 아닌 적의를 가지고 있으니까.
계속 변신해 달라고 해봐야 들어주지도 않을 테지.
마음을 억눌러 공포심을 가라앉힌 박사가 진심으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왜 날 가지고 논 거야...? 날 여기로 데려올 생각이었다면, 리옹에서부터 납치했으면 됐잖아. 왜 굳이 날 따라다니면서 도와줬어? 어디까지 알아내나 보려고?”
“잘 아시네요. 박사님의 이런 일탈 때문에 주인님이 정말 곤란해 하셨어요. 여기까지 와서도 자꾸 튀시더라고요? 그래서 계획이 또 어긋나버렸어요.”
“계획이 어긋났다니...?”
“원래는 계속 연기를 해서 박사님의 정신을 구덩이까지 처박을 계획이었거든요. 근데 뭐... 이젠 상관없어요. 마력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공정은 충분히 진행됐으니까.”
무시무시한 말에 박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력...? 공정...?”
“박사님이 저를 발견한 경위가 어떻게 되죠?”
경위라... 분명 지혁에게 통신을 하려다가, 미세한 발소리를 듣고 몸을 숨겼었다.
원래라면 듣지도 못했을 그 소리를 듣고 말이다.
당시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유리아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으로 보아...
“혹시... 지금 내가 변하고 있다는 거야?”
“맞아요. 그렇게 된 원인은 박사님이 잘 알고 있으리라 믿어요.”
피... 세화의 피가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었는데, 그 효과로 인해 오감이 민감해진 듯했다.
게다가 마력이라고 한 것을 보았을 때, 세화의 피엔 마족 특유의 마력이 섞여있는 듯했다.
그래서 자신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된 건가?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하고 있던 박사는, 이어지는 유리아의 말에 흠칫했다.
“만약 박사님이 리옹에서 생각했던 사건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다면, 지금쯤 아주 편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을 거예요. 주제넘게 자꾸 저희 뒤꽁무니를 쫄쫄 쫓아다니려고 하니까 박사님을 주인님의 권속으로 만들어버릴 수밖에 없잖아요.”
“권속... 이라고...? 내가 타이라트의...?”
“나머지는 세화에게 들으세요. 제 역할은 여기까지인 듯싶네요.”
말을 마친 유리아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마물 포탈이 눈앞에 나타나더니,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는 유리아를 삼키고 사라졌다.
말 같지도 않은 광경에 벙 찐 박사가 입을 벌리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자신이 타이라트의 권속이 된다는 것... 이걸 알아보는 게 급선무였다.
“이세화...!”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세화에게 다가간 박사가 물었다.
“유리아가 했던 말이 사실이야? 네가 나한테 피를 먹인 이유가... 날 타이라트의 권속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어...?”
“박사님. 일단 진정하세요.”
“설명해줘...! 설명을 들어야 진정이 될 것 같아...!”
“.... 알았어요. 유리아 언니는 진실만을 얘기하긴 했어요.”
“이...!”
“하지만 저는 강제로 박사님에게 뭘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선택은 오로지 박사님의 몫이에요. 이와 관련해서 제가 저번에 했던 말을 생각해보세요.”
저번에 했던 말...?
아, 세화가 본모습을 보여준 이후, 가족이 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세화의 가족이란 곧 마족을 뜻한다.
그리고 세화는 이 선택을 자신에게 맡겼다.
온몸을 잠식했던 배신감이 상당히 옅어진 박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럼 난... 강제로 변하지 않는 거지...? 그런 거지...?”
“네. 물론이에요.”
“흐윽...!”
예전의 박사였다면 세화의 말을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가 충분히 주입되고, 세화에게 사육된 박사의 마음은 그녀를 의지할만한 존재로 비추고 있었다.
이런 박사의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세화가 천천히 다가와 박사를 끌어안았다.
“저희는 박사님을 너무나도 사랑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박사님에게 모든 걸 맡길게요.”
박사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또 다시 ‘저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한참동안 세화와 포옹을 하던 박사가 이에 대해 물어보려는 순간,
고오오...!
어디선가부터 거뭇한 기운이 방 안으로 파고들더니 박사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를 눈치챈 박사는 세화에게서 떨어지고 그 기운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는 움찔했다.
세화와 유리아의 본모습을 보았을 때 느꼈던 친숙한 감정이 검은 기운에게서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도 훨씬 강했다. 마치 영혼과 영혼으로 이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 느낌을 상중하로 나누자면, 유리아의 기운이 하, 세화의 기운이 중, 그리고 지금 검은 기운은 상이었다.
세화에게서 떨어진 박사가 손가락으로 기운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너도 보여...?”
“보여요.”
“확인할 게 있어... 그래도 돼?”
“당연해요. 근데... 가기 전에 한 가지만 알아두셨으면 해요. 저 기운은 박사님의 진정한 안식처라는 걸요. 그것만 생각해줘요. 아셨죠?”
“진정한 안식처...?”
“네. 명심하세요.”
저 기운은 자신의 진정한 안식처다.
세화의 이 말을 뇌리 깊숙한 곳에 집어넣은 박사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방을 나섰다.
검은 기운은 복도 끝으로 이어져있었다.
그리고 그 끝엔, 자신의 방이 있었다.
두근!
심장이 또 뛴다.
아까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기 직전 받았던 불쾌한 감정이 아니었다.
이건 그리움이었다.
무언가 애착이 느껴지는... 그러한 그리움.
박사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처음엔 느릿느릿, 그 다음엔 경보 수준, 복도 3분의 1을 지나쳤을 때쯤엔 전력질주를 하는 선수마냥 달렸다.
곧이어 방 앞에 도착한 박사는, 거칠어진 숨을 수차례에 걸쳐 진정시키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다.
철컥!
조심스레 문을 열자마자 본 장면은, 마치 화재라도 난 것처럼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시꺼먼 연기였다.
그 가운데는 연기가 상대적으로 흐릿했는데, 거기 어떠한 존재가 서있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훤칠하고 덩치가 큰... 남성처럼 보이는 형상이었다.
“.....”
타이라트가 분명하다. 이런 기운을 내뿜을 수 있는 존재는 그밖에 없다.
하지만 왜 타이라트에게서 그리움을 느끼는 걸까? 세화의 피 때문에?
세화와 유리아는 자신을 그의 권속으로 만들기 위해 피를 주입했다고 했으니, 아마 맞을 터였다.
‘정신만 바짝 차리면 돼...! 현혹되지 말자!’
짧은 시간에 속으로 수백 번을 다짐한 박사는, 손으로 연기를 헤치면서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그 존재에게 점점 가까워질수록, 박사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지금까지 찾고자 했지만 도저히 발각되지 않았던 타이라트.
드디어 정체를 알 수 있다.
‘보이지가 않아...’
거의 지척까지 왔음에도 타이라트는 연기에 감싸여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일단 짧은 머리와 근육질 몸매인 건 알겠는데... 빨리 면상을 보고 싶었다.
박사의 호기심과 불안함이 최대치에 오른 순간, 타이라트를 가리고 있던 연기가 완전히 걷혔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본 박사는 눈을 부릅뜬 채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또다. 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보고 싶었던 사람이.
“안녕, 누나.”
그리고 그의 입에서부터 그리워 마지않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아...!”
박사는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