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8 두 번째 붕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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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님.”
“.....”
“박사님?”
침대에 등을 기대고 상념에 젖어있던 박사는, 마르셀라가 몇 번을 더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응?”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냐... 그냥 오늘따라 머리가 아프네.”
“그래요...? 두통약이라도 드릴까요?”
“아니, 됐어. 잠자면 나아지겠지. 오늘 연구도 재밌었어.”
“저도요. 그럼 나가볼 테니 이만 쉬셔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간 마르셀라.
박사는 잠깐 텀을 두면서 시간을 끌다가 방문을 잠갔다.
이후 천장을 한 차례 쓰윽 둘러보고 카메라가 없는 걸 다시 체크한 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리고는 바지 안으로 자신의 손을 집어넣었다.
이곳의 생활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가장 보고 싶은 한 사람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건 바로 지혁이었다.
‘지혁아...’
마르셀라와 연구를 하다가도, 세화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가도 계속 생각났다.
특히 이렇게 혼자 있을 때면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까지 왔다.
결국 박사의 지혁을 향한 그리움은, 자위라는 방법으로 표현됐다.
하지만 손가락 두 개를 붙여 음부 안에 넣고 천박하게 쑤셔보아도, 지혁의 남근이 들어온 것처럼 몸을 꿈틀대보아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당연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사랑을 나누는 것과,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자위하는 건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도구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마저도 없었고, 자괴감이 대단했다.
차라리 자존심 같은 건 전부 내팽개치고, 세화에게 피를 달라고 구걸하고 싶었다.
피라도 먹으면 기분이 황홀해지니까.
“하아...”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어떻게든 성욕을 느껴보려던 박사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스스로를 나무라며 상체를 일으켰다.
자신이 움직이면서 내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방 안.
만족스럽지 않은 자위를 한 것과 조용한 방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외로웠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세수까지 한 후 후끈해진 얼굴을 가라앉힌 박사는 커피포트를 켰다.
간단하게 블랙커피를 타고 탁상에 앉아 홀짝 들이키니 여러 생각이 밀려들었다.
대부분은 지혁, 그리고 세화의 본모습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화가 본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그녀가 내뿜은 기운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었다.
당시에는 세화의 이야기를 듣느라 신경을 썼다가 말았었는데, 대체 왜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머리를 싸매고 또 싸매보아도 도저히 모르겠다.
‘뭔가 근본적으로 끌렸던 것 같긴 했는데...’
약간 모성애 같기도 했고, 첫사랑 때의 풋풋함 같기도 했다.
당시 생각했듯,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궁금했다. 다시 느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 한 번 더 보여 달라고 하자. 세화가 아니라 마르셀라한테.
두 사람은 같은 마족이니 기운이 비슷할 터.
마족의 기운을 자세히 느껴보고, 이번엔 정확하게 파악해보는 거다.
그리 다짐한 박사가 방문을 열었다.
현재 자신은 마르셀라의 연구실과 부엌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는 뜻.
그래도 늦은 밤이라 조심스럽기는 했기에, 박사는 도둑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살금살금 복도를 지나쳤다.
그렇게 유리아가 잡혀있는 방을 지나치던 박사는, 문득 그녀가 걱정스러워졌다.
태도가 반항적이어서 아직도 묶여있을 게 뻔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근육에 문제가 생길 텐데... 상태를 한 번 체크해보자.
그러면서 설득도 해보는 거다. 세화가 기뻐하게끔.
‘만약 이번에도 고집을 부린다면...’
그럴 경우, 자신은 더 이상 유리아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박사는, 자신이 이 방의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뭐 이런 멍청한... 왜 이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켠 박사는, 그냥 마르셀라를 찾기 위해 널따란 연구실 안을 둘러보았다.
오늘 교란기 개량 이론을 토론했기에 그걸 만지작거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마르셀라는 여기 없었다.
삑삑거리는 규칙적인 신호음만 빼면 연구실은 아주 조용했다.
박사는 그러려니 하면서 어두컴컴한 연구실을 지나치려다가, 상황판 앞에 있는 통신장치를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
딱 한 번만... 지혁에게 연락해볼까?
해보자. 아무도 없잖아. 발신위치를 알 수 없도록 주파수를 조절한다면 안전할 거야.
지혁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박사의 이러한 열망은 전신을 장악했고, 이성을 마비시켰다.
자연스럽게 상황판에 앉은 박사가 헤드폰을 착용하려는 순간,
‘응...?’
귀에서 희미한 소리를 포착했다.
뭔가 싶어 귀를 기울여보니, 주방으로 이어진 바깥 복도에서 맨발소리가 들렸다.
걸음걸이가 규칙적인 것으로 볼 때,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세화인가? 아니면 마르셀라?
근데 자신이 이런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청각이 좋았나?
뭐든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박사는 재빨리 헤드폰을 원래 자리에 갖다놓은 후 자세를 낮추었다.
자유를 보장받긴 했지만 이런 시간에 혼자 연구실에 있으려니, 그리고 지금 지혁에게 연락을 하려 했던 상황이라 괜히 찔렸기 때문.
덜컥-!
곧이어 문이 열리면서 걸음소리가 연구실을 가로질렀다.
이후 어딘가에서 멈췄다.
삑, 삑삑삑!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린다.
위치는 유리아가 있는 방.
박사는 누가 그곳에 들어가려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떴다.
‘....!’
어두워서 제대로 분간하기는 힘들었지만, 길고 매끈한 뒤태, 그리고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보니 알겠다.
저 사람은 분명히... 유리아였다.
방 안에 묶여 있어야할 그 유리아 엘레나르 말이다.
철컥!
문이 닫히면서 다시금 고요해진 연구실 안.
상식을 벗어난 장면을 본 박사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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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
물을 최대로 틀어놓은 박사는, 세면대 양옆에 손을 대고 멍하니 있었다.
왜 유리아가 자유롭게 방 안팎을 드나드는 거지?
혹시 빠르게 굴복했나? 자신처럼?
그럴 리는 없었다. 유리아의 성정 상 고작 하루... 아니, 몇 시간 만에 굴복할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혹시 내가 잘못 봤나...?’
아니, 이 또한 그렇지 않다.
현재 피도 먹지 않아서 정신이 멀쩡한 상태고, 그 아름다운 뒤태는 유리아가 확실했다.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마치 누군가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잠깐... 놀아나...?’
그러고 보니 유리아가 조금... 이상했다.
일단 잡힌 경위부터 미심쩍었다.
당시 박사 자신은 세화에게 발각된 이후 유리아에게 신호를 보냈다.
평소의 유리아였다면 냅다 달려왔을 텐데, 자신이 잡힐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미리 잡혔다는 뜻과도 상통했다.
가공할 육체능력을 지닌 그녀는 쉽게 당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디바이스까지 장착하고 있어서, 오감까지 뛰어난 그녀라면 수상한 낌새를 느낀 순간 변신했을 터였다.
결정적으로 유리아를 상처 없이 잡으려면 최소한 S급 마물 두 마리는 붙어야할 텐데, 한국에 쫙 깔린 이블리언 탐색기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었다.
마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백 번 양보해서,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자신이 꿈도 꾸지 못한 어떠한 방법으로 유리아를 쉽게 잡았다고 칠 수 있다는 말이다.
허나 유리아가 잡혀온 이후 보여준 행동은 좌시하지 못하겠다.
예전에 유리아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타이라트에게 복수할 기회와, 인간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냐고.
그에 유리아는 당당하게 후자를 선택했다.
이럴 정도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데 왜 인간들을 사지로 몰아넣지?
또한 그 전...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여 유리아를 리옹으로 불러들였을 때, 타이라트의 흉계에 대한 설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유리아의 태도는 무척이나 침착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따위로... 타이라트의 본거지에 와서 제정신을 차릴 수 없는 걸 감안하더라도, 적에겐 굽히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납득이 안 된다.
이러면 마치 자신에게 벌을 받도록 하기 위한 행동 같잖은가!
두근-!
가슴이 불쾌하게 박동한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자신이 놀잇감이 되어버린 것 같다.
공포영화를 볼 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느낌이다.
세화가 본모습을 보여준 이후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친다.
고난이 닥쳐와도 걱정하지 말라,
자신만이 유일한 안식처다,
널 보듬어주는 존재는 오직 자기뿐이다.
세화는 왜 이러한 말들을 했던 걸까? 그저 박사 자신을 위해서?
당시엔 마족으로 변한 세화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느라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앞으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서 힘들어지면, 내게 기대라고 강권하는 뉘앙스를 풍겼던 것 같았다.
‘뭔가 일어나고 있어... 나만 모르는 뭔가가...’
이러한 상상이 조현병에서 비롯된 거든 뭐든 상관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완전히 미쳐버릴 것 같았다.
확인이 필요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알아봐야 한다!
세면대의 수전을 닫지도 않고 화장실을 나온 박사는 양말을 신었다.
이후 부드러운 슬리퍼를 벗어던진 채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허어억!”
정색을 한 세화가 팔짱을 낀 채 문 앞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박사.
그녀는 그 상태로 팔다리를 움직여 세화에게서 물러났다.
그런 박사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쉰 세화가 천천히 다가가더니 물었다.
“늦은 시간인데 왜 안 주무시고 계셨어요?”
“세, 세화야... 여긴 어떻게...”
“박사님의 방엔 카메라가 없지만, 복도와 연구실은 아니에요. 다 봤어요.”
“.....”
벙 쪄있는 박사를 잠깐 내려다보던 세화는, 화장실로 들어가 수전을 닫았다.
이후 수건을 갖고 와 박사의 얼굴과 팔다리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주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저희 생각이 아니었어요. 저희는 박사님이 더 자연스럽게, 충격을 받지 않게끔 하려고 했어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세화.
세화는 이렇게 된 것이 유감스러운 듯, 구슬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자꾸 튀는 행동을 하세요... 리옹에서도, 여기에서도... 이러니까 저희가 박사님을... 하아... 아니에요.”
박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리옹에서도, 여기에서도.’라는 저 문장에 온갖 설명이 함축되어있었다.
박사는 세화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저 말에 담긴 속뜻을 정확히 파악했다.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는 확신이 선 박사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주 일어난 세화를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물었다.
“지, 지금까지... 날 갖고 논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해요. 저희는 그럴 생각이 전혀...”
짜아악-!
세화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박사가 있는 힘껏 그녀의 뺨을 갈겼기 때문.
뽀얀 피부가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오르는 것을 본 박사는 덜컥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패륜을 저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어서였다.
하지만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핑계대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방 안이 떠나갈 듯한 고함에, 세화가 자신의 뺨을 잠깐 만지작거리더니 박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알았어요. 뭐가 궁금하세요?”
손찌검을 당했음에도 부드러운 세화의 반응에 안도한 박사가 반문했다.
“유리아... 유리아의 정체가 뭐야?”
“예상은 하고 계시는 듯한데... 직접 보여줄게요.”
그 대답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박사가 고개를 주억거리려다가 멈칫했다.
세화가 자신을 능욕할 생각이 없었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왜 ‘저희’라는 복수형 대명사를 사용하는 걸까?
유리아는 아닐 텐데... 그럼 마르셀라를 지칭하는 건가?
이러한 고민을 하던 박사는, 이어지는 세화의 말에 표정을 가라앉혔다.
“박사님이 뭘 궁금해 하시는지 다 알아요. 저는 오늘 모든 진실을 말씀드릴 생각이에요. 일단 유리아 언니부터 만난 후에 다시 얘기해요.”
세화에게서 진심이 전해져 왔다.
배신감이 무지막지하긴 하지만... 뺨을 맞았는데도 보복하지 않고 자신을 걱정하는 그녀다.
믿자. 세화를 불신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