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7 두 번째 붕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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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요?”
“응. 그러면 폭발하지 않고 출력이 높아져. 한 번 조절해봐.”
“네.”
긴장한 듯 대답한 마르셀라가 조절기를 오른쪽으로 올렸다.
그러자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제작대에 놓아둔 광자포의 총신이 빛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셀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 정말이네요...! 대단해요!”
그에 뿌듯한 기분을 느낀 박사가 마르셀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네가 잘 따라와 줘서 그래.”
현재 두 사람은 마르셀라가 개발한 미래무기를 보수하고 있었다.
의료기기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은 박사는, 기브 앤 테이크로 무기에 대한 지식을 마르셀라에게 전수해주었다.
마르셀라와의 대화는 잘 통했다.
의문이 있으면 서로 좋은 질문을 했고, 답변도 막힘없이 나왔다.
잘 맞는 사람과의 과학 토론은 무척 즐거웠다.
그렇게 박사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로, 마르셀라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지식을 공유했다.
솔직히 걱정도 됐다.
지식을 알려주면 마물들의 습격 때 미래무기가 같이 등장할 수도 있고, 마물과 무기를 합친 키메라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었다.
시리아 때 그냥 음모로 끝났던 일과는 달리, 실제로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다 감수하기로 했다. 세화의 뜻에 반하는 놈들은 죽어도 쌌으니까.
어차피 사회에서 저들끼리 급 나누기를 하는 하등한 족속들이었다.
공기만 축내는 그런 놈들은 지구에 필요가 없었다.
삐빅-! 삐빅-!
저녁이 되자 마르셀라의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에서 알람이 울렸다.
그녀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왕비님이 정해주신 시간이 다 됐어요. 이제 돌아가 보셔야 해요...”
“응. 돌아가자. 안대 쓸까?”
“아뇨. 앞으로 안대를 씌우지 말라는 왕비님의 명령이 있으셨어요.”
“그래?”
“네. 기쁘신 것 같네요. 얼굴이 엄청 밝으세요.”
“그야... 기쁘지... 얼른 돌아가자. 늦으면 세화가 화를 낼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박사는 마르셀라와 나란히 걸어가며 유리아가 있는 의료실을 지나쳤다.
칸막이가 쳐져있는 상태의 그곳을 흘겨본 박사가 물었다.
“유리아는 어때?”
“음... 좋지 않아요. 왕비님께 자꾸 반항을 하시는데... 벌 횟수가 열 번 누적되었어요.”
“여, 열 번이나...?”
“네. 하지만... 박사님이 대신 벌을 받을까 우려하신 왕비님께서 용서를 해주신다고 하셨어요.”
박사는 진심으로 기꺼워했다.
3자에게 듣는 자신에 대한 세화의 사랑은 색다른 맛이 있었다.
아까 안대 건도 그렇고, 이번 건도 그렇고... 역시 세화는 자신을 무척이나 아낀다.
그나저나 유리아가 걱정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길래 괜히 욕먹을 짓을 해선 인간들을 백 명이나 죽이려고 드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세화의 참을성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유리아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했다.
아주 과격한 방법을 쓰더라도 말이다.
“걱정이야... 고집이 너무 세.”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르셀라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박사는, 문득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마물일까? 아니면 다른 존재일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박사가 물었다.
“마르셀라, 혹시 넌... 마물이니? 아,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곤란하지 않아요. 저는 마물이 아니라 마족이에요.”
“마족?”
“네. 잠시만요...”
마르셀라가 허리춤에 있는 스커트 단추를 풀더니 살짝 들추었다.
갑자기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에게 당황한 박사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셔츠까지 빼낸 마르셀라가 박사를 불렀다.
“박사님, 여길 봐주실래요?”
“응...?”
“괜찮으니까 배꼽 밑을 봐주세요.”
마르셀라의 권유에, 박사가 머뭇거리면서 스커트 안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자궁이 있는 위치에 왠지 야하게 느껴지는 빨간색 문양이 있었다.
다 큰 처녀의 은밀한 부위에 저런 문양이라?
예전이었다면 역하고 천박하다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현재는 친숙하게 느껴졌다.
왜? 모른다. 그냥 저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 같았다.
“이게 마족의 증표에요. 마족은 마물과 차이가 커요. 마족이 더 상위 존재죠.”
“아... 계급 같은 건가보네? 귀족과 노예 같은 느낌인가?”
“정확해요. 참고로 왕비님도 마족이세요.”
세화도 마족이라?
그렇다면 마족은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걸까?
게다가 마물이 노예 정도의 계급이라면, 마족은 마물을 부릴 수도 있는 듯했다.
회춘 효과까지 있는 것으로 볼 때, 수명도 늘어나는 것 같고...
불로장생은 고금을 막론하고 무척 많은 인간들이 원하는 소원이었다.
자신의 경우 불로를 상상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 직접 겪어보니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박사가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쯤, 옷매무새를 고친 마르셀라가 방긋 웃었다.
“이제 돌아가요.”
“응? 그래... 아, 그리고... 혹시 내 방에 전신거울을 하나 넣어줄 수 있어?”
“왕비님께 여쭈어볼게요.”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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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신인 채로 전신거울을 통해 자신의 몸매를 살펴보던 박사가 탄성을 터뜨렸다.
지금껏 잘 관리하고는 있었지만, 곧 40대가 되는 나이라 거친 피부와 탄력 저하가 걱정이었는데... 이젠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젊어졌다.
화장실에서 이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지금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전성기보다 훨씬 아름다워졌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아름다움은 완벽하지 않다.
불완전함 속에, 개성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
이런 미에 관한 격언들이 전부 개소리처럼 느껴졌다.
잡티 하나 없는 나신을 감상하던 박사가 돌연 입맛을 다셨다.
어딘지 모르게 아쉬웠기 때문이다.
하복부에 문양이 없어서 그런가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궁이 있는 위치를 만지작거리던 박사는, 노크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자 놀라선 몸이 굳어버렸다.
“박사님... 응? 뭐하세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세화.
자신이 발가벗고 있다는 걸 자각한 박사가 몸을 가렸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따졌다.
“드, 들어오라고도 안 했는데 마음대로 열면 어떡해...”
“누가 들어오는 게 싫었으면 문을 잠가놨어야죠.”
“그건 네가 싫어할까봐... 그런데 왜 왔어...?”
“오늘 진짜 열 받는 일이 많아서... 박사님이랑 얘기하려고 왔어요.”
말을 마친 세화가 침대로 가 누웠다.
벗어던진 옷을 대충 입은 박사는 만면에 미소를 띠웠다.
화가 난 상태에서 자신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겠다는 건, 자신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도 되었다.
세화의 옆에 조심스레 몸을 뉘인 박사가 물었다.
“유리아 때문이지?”
“응.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어요. 박사님이랑 너무 달라. 점점 짜증나려고 해요.”
이쯤 되면 현실에 순응할 만도 한데... 유리아는 너무 멍청했다.
성질이 났다. 대체 왜 세화의 심기를 자꾸 건드리는 걸까?
그냥 말만 잘 들으면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데, 이러면 더 이상 커버를 쳐주기도 힘들다.
근심어린 박사의 표정을 보고 기특해하던 세화가 말했다.
“박사님. 그거 알아요? 박사님은 복잡한 생각을 할 때면 눈동자를 위로 치켜세우는 거.”
“내가...? 그랬어?”
“네. 지금 절 걱정하고 있던 건가요?”
“응... 주제넘었지? 미안해...”
“주제넘기는 무슨... 엄청 기뻐요.”
세화는 박사가 벤 베개 위에 손바닥을 펴서 올려놓았다.
그러자 박사가 마치 자연스러운 일인 양, 손바닥 위에 자신의 뺨을 대고 비벼댔다.
한동안 세화의 손길을 음미하던 박사는, 마르셀라가 했던 말이 생각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물었다.
“세화야. 너는 마족이라고 들었는데 맞아?”
“마르셀라가 말해줬나 보네요? 맞아요. 전 마족이에요.”
“그럼... 혹시 이게 네...”
“본모습이냐구요? 아니에요.”
역시 그렇구나.
아까 예상한 게 맞았다.
궁금했다. 세화의 본모습이.
허나 보여 달라고 말하기엔, 세화가 성을 낼까 두려웠다.
이러한 박사의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세화가 킥킥거리더니 묻는다.
“보고 싶어요?”
“응...?”
“제 본모습이요.”
“보, 보여줄 수 있어...?”
“안 될 이유는 없죠.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어요.”
박사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있었다.
만약... 너무나도 못생긴 괴물처럼 변해버린다면, 세화를 볼 자신이 없을 것 같았다.
세화의 피로 노화가 역행하는 것으로 볼 때 그러지는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잖은가.
그래도 확인은 해보고 싶었기에, 박사가 조심스레 말했다.
“보고 싶어...”
“알았어요.”
박사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준 세화가 침대에서 벗어났다.
이후 탁상을 치워 공간을 만들었고, 박사를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그리 말한 세화가 눈을 감자, 그녀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약한 바람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와 세화의 머리카락을 공중으로 띄웠다.
아니, 바람이 아니라 검은 기운이 가진 특유의 효과인 듯했다.
이윽고 세화의 머리카락이 길어지면서, 끝에서부터 연보라색으로 바뀌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복부에서부터 시뻘건 빛이 새어나오더니, 아까 마르셀라의 몸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문양이 생겨났다.
피부가 새하얗게 변하고, 열 개의 손톱 끝이 뾰족해졌으며, 입술은 글로우 틴트를 바른 듯 빨간 광택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 세화의 홍채는 보라색으로 바뀌어있었다.
조명이 원체 흐릿해서 자세히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동공마저도 세로로 찢어진 듯했다.
마치 고양이처럼 말이다.
체면도 잊고 입을 벌린 채로 세화를 지켜보던 박사.
그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한기를 풀풀 풍기는 세화의 본모습은 방금 자신이 했던 말처럼 무척 아름다웠다.
아까 못생겨지면 어떡하지? 라고 생각했던 건 괜한 기우.
전신거울을 보며 바뀐 모습에 만족했던 자신이 초라해질 정도였다.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아름다움. 그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예쁘다는 말밖에는 나오질 않았다.
하등한 인간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귀함도 있었다.
눈매는 매서웠지만 분위기는 온화했다.
마치 세화가 미천한 자신을 까마득한 높이에서 내려다보고, 돌보아주는 것 같았다.
저게 마족일까? 너무나도 닮고 싶다.
숨이 턱턱 막히고 피가 끓는다.
흥분해서가 아니라, 절로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화의 몸에서부터 줄기차게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익숙했다.
박사가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으려고 할 때, 세화가 변신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무거웠던 공기가 걷히면서, 박사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허억...!”
“괜찮아요?”
냉랭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화의 물음.
박사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난 괜찮아... 그냥 놀라서 숨이 막혔던 것뿐이야...”
“잠깐만 기다려요.”
세화가 빠른 걸음으로 냉장고 문을 열더니, 찬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
이후 박사에게 다가가 물을 먹여주었다.
덕분에 제법 진정이 된 박사가 물었다.
“방금 그게... 너야?”
“맞아요. 마족이 된 진정한 저에요.”
“아아...!”
아까의 아름다움을 다시 복기하며 탄성을 터뜨린 박사는, 세화가 어제 했던 말을 상기했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면 가족이 되겠다고 말하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자신도 세화처럼 고고한 마족이 될 수 있다는 뜻일까?
또한 자신의 아이도 저런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태어나는 걸까?
“박사님.”
고민이 깊어지는 박사를 향한 세화의 부름.
퍼뜩 정신을 차린 박사가 대답했다.
“으, 응...?”
“상황이 뜬금없지만 꼭 말해야할 게 있어요. 제가 박사님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말, 기억하시죠?”
방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역시 세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는 존재다.
“기억해... 다 기억하고 있어...”
“앞으로 그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으니까요. 저는 박사님의 영혼의 안식처에요. 힘들면 언제든 제게 기대세요. 박사님을 밀어내지 않고 보듬어주는 존재는 오직 저뿐이에요. 아셨죠?”
듣기만 해도 기꺼워지는 말이었다.
그래,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세화에게 기대자.
몽롱한 표정을 지은 박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