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6 두 번째 붕괴
박사가 지대한 관심을 보인 기계는 의료기기였다.
그걸 자세히 살펴본 박사는 새로이 개안하는 기분이 들었다.
딱 봐도 미래과학의 정수가 녹아든 역작이었다. 이걸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본부에서 사용하는 기기보다 두세 단계는 앞서있었다.
기기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박사는, 세화의 말에 벌어진 입을 다물 지 못했다.
“이건 마르셀라가 만든 거예요.”
“마, 마르셀라가 만들었다고...?”
“네.”
그 젊은 나이에 이런 하이 테크놀로지의 기기를 만들다니...
그 정도로 똑똑하면서 왜 자신에게 미래과학에 대한 것들을 물어봤을까?
조롱을 하려고? 아니면 자신의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테스트?
아니, 마르셀라의 질문 대부분은 미래무기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쪽 방면으로는 지식이 별로 없는 게 분명했다.
박사는 세화와 함께 여러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사용하는 기계 대다수는 연구실에 갖다 놓아도 손색이 전혀 없는 것들이었다.
전부 마르셀라가 제작한 기계들이었고, 특히 위장, 교란 기술이 대단했다.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래서 여길 들키지 않았구나...’
박사는 마르셀라와 함께 일을 하는 미래를 그려보았다.
자신이 무기 쪽을 관리하고, 마르셀라가 다른 쪽을 관리하면서 여러 토론을 나눈다면?
상상만 한 것뿐인데 무척 들떴다.
적아를 떠나 훌륭한 과학자와의 협업은 그 정도로 흥분됐다.
이후로도 오랜 시간 눈으로만 기계들을 살펴보던 박사가 말했다.
“그만 볼게... 계속 보다간 일을 하고 싶어질 것만 같아.”
“일하면 되잖아요.”
“응...?”
“우릴... 아니, 절 위해서 일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널... 위해서...?”
세화를 위해서 일을 한다?
생각하니 왠지 두근거렸다.
이게 긍정적인 쪽으로의 흥분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쪽으로의 흥분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물쭈물하는 박사의 뺨을 어루만진 세화가 생긋 웃었다.
“강요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이상한 말로 박사님을 계도할 생각도 전혀 없구요.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아... 응...”
“자, 이제 산책 갈까요? 오늘 날씨도 어제보단 낫다니까 오랜 시간동안 바깥공기를 쐴 수 있을 것 같아요. 옷은 많이 껴입어야겠지만.”
“저번처럼 테스트를 해본다는 핑계로 날 놔두고 가지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때 내가 얼마나 죄책감이 들었는지... 진심으로 후회했어요. 지금도 그렇고.”
정말 미안한 듯 목소리를 가라앉힌 세화가 박사의 허리를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세 얼굴이 붉어진 박사가 다리를 오들오들 떨었다.
방에서 있었던 낯부끄러운 일이 생각난 것이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댄 세화가 나긋나긋 물었다.
“많이 화났었죠?”
“조, 조금...”
“지금은?”
“지금은... 다 풀렸어...”
대답에 만족한 세화가 박사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박사는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려고 했지만, 세화가 붙잡아줘서 천박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수 있었다.
레즈비언도 아닌 자신이 세화의 손길에 성적으로 흥분하는 이유?
세화의 피 때문임이 분명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싫은 건 아니었다. 정체성도 혼란스럽지 않았고.
그냥... 그냥 인생의 낙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박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풀렸다니 다행이네요. 이제 갈까요?”
“응...”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수그린 채로 세화를 따라가려던 박사는,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지혁의 아이임을, 세화는 알고 있을까?
일단 연구실의 의료기기에선 아직 형태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아이의 유전자 정보를 알 수가 없는데, 이곳의 의료기기도 똑같을까?
아마 그런 것 같았다.
세화가 자신이 가진 아이의 아빠를 알았다면, 이토록 사근사근 대해주지 않았을 터였으니까.
만약... 세화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두려웠다. 그래서 미리 말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먼저 솔직하게 말한다면 용서를 해줄지도 모르니까.
“저... 세화야.”
“네?”
“나 할 말이 있어.”
“말해요.”
“긴 얘기가 될 것 같아... 혹시 방에서 할 수 있을까?”
“긴 얘기...? 그럼 오늘 산책은 뒤로 미룰까요?”
“응. 그래줬으면 해.”
세화가 흔쾌히 승낙했다.
“알았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박사는 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천장을 바라보니 지긋지긋한 카메라가 사라져있었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 하지만 지금은 기쁜 감정표현을 자제해야 한다.
이제부터 심각한 사안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하니까.
세화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는 것을 본 박사는, 그녀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세화야. 그... 혹시... 내 아이 말이야...”
“네.”
“아이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박사는 모른다는 대답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세화의 입에서 나온 답은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그만 얘기해요.”
“응?”
세화의 만류에 혼란에 빠진 박사가 멍해졌다.
그러다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화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
저 얼굴을 본 박사는 확신했다. 세화가 아이의 아빠를 알고 있다는 것을.
박사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식은땀이 흘러나와 얼굴을 적셨고, 시선을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불편해진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세화는 그저 박사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박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난 세화가 다가오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후 박사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아무 말 마세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시구요. 박사님이나 박사님의 아이에겐 그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아요.”
“.....”
“저는 박사님을 정말 사랑해요. 동성애 같은 게 아니라, 그저 박사님이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넘어갈 수 있어요. 나는 박사님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노심초사하던 박사는, 세화의 답을 듣고 얹혀있던 묵직한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세화의 눈엔 진심이 담겨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
어쩜 이리도 자애로운지...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 말을 할 걸 그랬다.
그리고 이런 세화라면 자신의 아이를 맡겨도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뿌득-!
그 순간, 박사의 날개뼈 근처에서 뼈가 결리는 소리가 났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꼬리뼈 쪽도 불편했고, 눈, 그리고 하복부 근처가 가려웠다.
“....?”
아프지는 않았다. 뭔가 야릇한 기분.
자신의 온몸을 살펴보던 박사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세화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산책은 가지 말죠. 푹 쉬어요.”
“쉬어...?”
“네, 한숨 주무세요. 박사님 지금 피곤하잖아요.”
피곤? 지금 자신이 피곤한가?
세화의 말을 들어보니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는 느낌.
그래, 졸려서 그렇다. 세화의 말대로 한숨 자야겠다.
그리 생각한 박사가 대답했다.
“응... 졸린 것 같아...”
“얼른 침대로 가요. 내가 부축해줄게.”
@@
“으음...”
상쾌한 표정으로 눈을 뜬 박사가 상체를 일으켰다.
자신이 얼마나 잔 걸까? 잠에서 깨어났을 때 특유의 멍한 기분이 없는 걸 보면 짧게 잔 듯했다.
그냥 눈만 감았다가 뜬 느낌.
자연스럽게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 박사는, 세수를 하다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어...?”
얼굴이 눈에 띄게 젊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그리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확연한 차이가 났다.
마치... 20대 초반의 전성기 시절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와 붉은 기가 감도는 입술, 그리고 탱탱한 살결이 조화를 이루었고, 색기를 풀풀 풍겼다.
박사는 자신의 팔은 물론 다리, 복부를 살펴보았다.
실핏줄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새하얘진 살갗. 이 외의 변화는 없었다.
침을 꼴깍 삼킨 박사는 잊을만하면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에드워드를 무저갱 속으로 빠뜨린 후, 지혁과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던 꿈속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비슷해보였다.
그렇다는 건...
‘바뀌고 있어...’
자신은 지금 변화하고 있었다.
원인은 분명히 세화의 피.
마물이 된 그녀의 피를 지속적으로 먹으면서 신체에 변화를 겪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마물이 되는 중인 걸까?
인간을 눈 깜짝하지 않고 죽이는, 피와 살을 탐하는 마물로 변하는 걸까?
자신의 아이도 영향을 받고 그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안 돼... 안 돼...!’
겁을 잔뜩 집어먹은 박사가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이후 호출기를 찾으려다가, 문 앞에 세화가 서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언제 와있었던 걸까? 소리조차 나지 않았는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지금은 변화하는 자신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컸다.
세화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박사가 울먹거리며 물었다.
“세화야... 나... 마물로 변하는 거야...? 날 마물로 변하게 하려고 피를 먹여왔던 거야...?”
원래라면 화를 내야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사는 그럴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자신을 무척이나 아껴주는 세화에게 진실을 듣고, 위로를 받고 싶을 뿐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세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사님은 지금 인간이에요.”
“저, 정말...? 마물이 아니야...?”
“당연하죠. 제가 박사님을 본능만 남은 흉측한 마물 따위로 만들 것 같아요? 제 주인님께서 마물로 만들자고 하셔도 무조건 거절할 거예요.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아요. 저 믿죠?”
세화의 호언장담에 박사가 안도했다.
이런 말을 듣고 싶었다. 역시 세화는 최고였다.
“응... 믿어... 무조건 믿어...”
“박사님은 제 피를 먹고 노화가 역행했을 뿐이에요. 지금 엄청 예뻐요. 알아?”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박사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쑥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는 박사의 앞머리를 정리해주던 세화가 말을 이었다.
“나는 박사님을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가... 족...?”
왜 가족이라는 단어에 이토록 심장이 뛰는 건지.
에드워드와 결혼했을 때보다 더 기뻤다.
지혁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동급의 벅참. 박사는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세화를 올려다본 박사가 물었다.
“날 가족이라고 생각해?”
“당연하죠. 그리고 박사님도 날 가족이라고 여겼으면 좋겠어. 내가 박사님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듯, 박사님도 날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물론이다. 아이까지 맡겨도 된다고 생각한 판인데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세화는 이미 자신의 가족이었다. 혈육보다 더욱 큰 유대감이 있는.
하지만 이걸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본능적으로 망설여졌다. 말하면 뭔가가 크게 뒤바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세화가 박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박사님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은데...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거 알아요. 시간은 얼마든지 줄 테니, 결정을 내리면 저한테 한 마디만 해줘요. 나와 같은 가족이 되고 싶다고.”
세화와 ‘같은’ 가족이라?
이제까지 세화가 해주었던 말을 분석해보면, 그녀는 마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인 듯했다.
하긴, 인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마물이라 부르기엔 곤란했다.
그렇다면 대체 세화는 뭘까?
모르겠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머리를 굴리기엔 세화의 품 안이 너무나도 포근하니까.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거면 됐어요. 이제 침대로 다시 돌아갈까요?”
“잠깐만 이렇게 있어주면 안 돼? 나 무서웠어...”
“그래요. 얼마든지 있어도 돼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세화의 손길을 느끼던 박사는, 자신의 날개뼈와 꼬리뼈 부분에 가려움이 느껴지자 몸을 뒤틀었다.
아까 자기 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요새 몸을 통 움직이지 않아서 찌뿌둥해졌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