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3 자발적 사육
@@
창문에 손을 올린 박사는 평온하게 잠들어있는 유리아를 보며 안도했다.
결박은 되어있긴 하지만 자신이 아는 유리아 그대로였다.
흉부도 규칙적이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서, 호흡에 이상이 없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뇌나 근육 문제가 걱정이었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박사가 물었다.
“유리아는 언제 깨울 거야?”
“왕비님께서 원하실 때요.”
“저렇게 오래 재워두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저희가 잘 관리하고 있어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예요.”
예전이었다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당장 자신이 살펴보게 해달라고 떼를 썼을 터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박사는 마르셀라와 세화를 믿고 있는 상태.
그녀가 순순히 대답했다.
“응... 잘 부탁할게.”
“물론이에요. 시간 다 됐어요. 이제 다시 방으로 돌아가셔야 해요.”
마르셀라의 말을 들은 박사가 재빨리 주변을 훑어보았다.
최신식 설비들이 즐비한 장소.
심지어는 못 본 기계들까지 있었다.
비스트 슬레이어 본부처럼 여기도 무슨 연구실인 듯했다.
얼핏 보아도 오버 테크놀로지인 기기들이 많았기에 흥미가 돋아났다.
구경하게 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주제 넘는 발언을 할 때가 아니었다.
“알았어.”
안대와 귀마개를 착용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간 박사는, 마르셀라가 가져다준 소설책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TV와 휴대폰, 컴퓨터조차 없는 심심한 방이라 그런지 책이 술술 읽혔다.
오랫동안 집중한 끝에 두 권의 책을 모조리 읽은 박사는, 할 게 없어져 그냥 자려고 했다.
하지만 세화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상체를 벌떡 일으켜 그녀를 반겼다.
“왔어? 어디 갔다가 와?”
그러자 반투명한 텀블러를 들고 있던 세화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 왔어요. 심심하셨죠?”
“아니... 책 읽고 있어서 괜찮았어. 손에 든 건 뭐야?”
“미숫가루요. 오늘 저녁은 이걸로 드세요.”
박사가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죽을 가져오길 바랐건만 고작 미숫가루라니...
설마 밥을 하기가 귀찮아진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화가 주는 저녁인데 불만 없이 먹어야지.
그리고 미숫가루는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이 차오르니... 오늘을 버틸 수는 있으리라.
세화에게서 텀블러를 받은 박사는 곧장 뚜껑을 열고 입으로 가져갔다.
고소하고 달콤한 맛. 그리고...
‘그 맛이다...’
중독성이 매우 강한 그 맛을 느낀 박사의 정신이 확 나가버렸다.
미숫가루를 벌컥벌컥 들이키려고 하던 그녀는, 세화가 텀블러를 빼앗자 눈이 벌겋게 된 채로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내놔!”
“진정하세요.”
“나 배고프단 말이야! 빨리 줘!”
“흘리면 안 되잖아요. 내가 먹여줄게. 얌전히 있어요.”
그렇다. 저 맛있는 걸 급하게 먹느라 흘리면 안 된다.
세화의 침착한 목소리에 숨을 고른 박사가 재빨리 헤드보드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세화가 다가가 한손바닥을 펴고 박사의 턱을 받쳤다.
“턱 들고... 옳지, 잘했어요. 천천히 마시는 거예요. 아셨죠?”
“응.”
“아 해요.”
순순히 입을 벌리니, 세화가 미숫가루를 조금씩 흘려 넣어주었다.
박사는 미숫가루를 한 모금씩 삼킬 때마다 세화가 자신의 턱을 살살 긁어주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나른해지는 손길이었다. 절로 하품이 나올 만큼.
결국 그런 식으로 미숫가루를 다 먹은 박사가 입맛을 다셨다.
더 먹고 싶었지만 세화가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기 싫어 아무 말도 못했다.
“이리 오세요.”
양팔을 벌린 세화의 말.
박사가 아주 잠깐 머뭇거리더니 그녀에게 안겼다.
왜 세화가 포근한 어머니처럼 느껴질까?
모르겠다. 그냥 이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
“우리 박사님... 엄청 착해졌다. 오늘 완벽했어요. 딱 하나, 방금 미숫가루를 먹을 때 소리를 지르며 떼를 썼던 것만 빼구요.”
“그, 그건 정말 미안하지만... 나도 할 말 있어...”
“해봐요.”
“배가 고픈 상태였는데 네가 강제로 빼앗아버리니까 홧김에... 왜 이런 말도 있잖아...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나한테 화난 건 아니었어요?”
“절대 아냐! 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 그래도 오해하게 한 건 내 잘못이니까 사과하고 싶어. 미안해...”
세화가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다행이에요. 진짜 슬플 뻔했어.”
“용서해줄 거야...?”
“애초에 화나지도 않았어요.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어.”
스위치를 누를 각오도 하고 있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자비로운 세화에게 감사한 마음이 샘솟은 박사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앞으로도 계속 잘해야지.
@@
다음 날 아침.
샤워를 하던 박사는 머리를 감다가 두피에 따끔한 느낌이 일자 눈살을 찌푸렸다.
“아...!”
아무래도 너무 세게 머리의 물기를 씻어내려 했던 모양이었다.
피는 나지 않았기에 안심한 그녀는 샤워를 마저 한 후 테이블에 앉았다.
거기엔 마르셀라가 가져다준 드라이기가 있었다.
어제 세화에게 무척 잘해서 그녀가 상을 내려준 것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를 말리던 박사는, 이번엔 목 뒤가 따끔거리자 드라이기를 껐다.
이후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는 의아해했다.
‘조금... 뾰족해진 것 같은데...’
손톱을 눈 바로 앞까지 가져가 살펴보니, 반원형이 아니라 약간 삼각형 모양처럼 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싶어 손톱 끄트머리를 만져보았지만 찔리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냥 착각을 했을 수도 있다.
머리와 목 뒤에 따가운 느낌을 받아서,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했겠지.
박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것 따위에 신경을 쓰기보단 어떤 식으로 세화의 마음에 더 들지 궁리를 해봐야 한다.
계속 순종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눈에 들기 위해 능력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자신이 잘하는 건 미래과학. 재료만 있으면 뭐든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현 시점의 세화는 자신에게 기계를 만지게 해줄 리가 없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박사는, 인간을 싫어하는 세화가 기뻐할 수 있도록 스위치를 누르게 해달라고 말해볼까? 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 때문에 혼절까지 했지만, 지금 누르라고 한다면 누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턴 쉬우니까.
정말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던 박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방금... 자신이 인간들을 죽이겠다는 상상을 한 건가?
세화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이건 옳지 않았다. 좁은 방 안에 있다 보니 점점 미쳐가는 듯하다.
박사는 탁상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스스로에 대해 반성했다.
그렇게 1분 정도 지났을까? 방문이 덜컥! 하고 열리더니 세화가 빠른 걸음으로 박사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품으로 끌어온 세화가 말한다.
“진정해요. 앞으로 이런 짓 금지야.”
세화의 걱정이 담긴 말투에 돌연 눈물이 나온 박사가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을 달래주러 한달음에 달려온 세화에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카메라로 감시를 한 것이 분명했지만 뭐 어떠한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헤아려주는데.
“너무 힘들어 보여서 내가 다 마음이 아파요. 오늘 바깥구경이라도 해요.”
이것 보아라. 얼마나 착한가?
지금까지 자신은 세화를 오해하고 있었다.
세화는 마물이 맞다. 허나 공감능력이 뛰어났고, ‘아랫사람’을 잘 살핀다.
웬만한 인간들보다 더욱 믿을 수 있는 존재가 그녀였다.
감동한 박사가 세화의 옷자락을 적시던 일을 그만두고 물었다.
“그래도 돼...?”
“절대 딴 짓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해주면 바로 데리고 나갈 수 있어요.”
“물론이야... 약속할게... 맹세해...!”
“알았어요. 그러면 마르셀라한테 안대랑 귀마개를 가지고 오라 할게요.”
“세화야. 귀마개는 빼주면 안 될까? 유리아를 보러 가는 동안에도 엄청 답답했거든... 나가는 동안 너랑 대화라도 나누고 싶어...”
그 말에 세화가 못 말리겠다는 듯 박사를 바라보았다.
애정이 어린 눈길이었기에, 박사는 세화가 자신의 요청을 분명히 수락할 것이라 확신했다.
“진짜 미치겠네... 알았어요. 대신, 뭘 집중해서 들으려거나 하면 안 돼요. 나랑 대화만 하는 거야. 알았죠?”
절대 그럴 의도 따윈 없었는데... 가만 보면 세화도 참 의심이 많았다.
박사가 냅다 대답했다.
“절대 안 해... 걱정하지 마.”
@@
박사는 눈앞에 나타난 새하얀 설원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한 어마어마한 추위와 함께 세찬 눈보라가 고글과 마스크를 때려대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고도가 높은 곳에 있는 모양.
모든 것을 종합해보았을 때... 여긴 남극, 그것도 내륙 중심부였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으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이들의 기지가 여기 있었다니.
남극은 본부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찾아보았던 장소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발견하지 못했다니... 이들의 기술력에 새삼 감탄이 나왔다.
뼈가 시릴 정도로 춥긴 했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바깥공기를 마시니 살 것 같았다.
간만에 뻥 뚫린 느낌을 받은 박사가 앞으로 가려고 할 때, 세화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경고했다.
“눈이 너무 높게 쌓여서 빠질 수도 있어요! 오늘 날씨도 별로니까, 더 이상 갈 생각은 말고 가만히 서있기만 해요! 날이 풀리면 또 나오게 해줄게요!”
바람소리를 뚫고 들어오는 세화의 또박또박한 말.
박사가 큰 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무리 옷을 겹겹이 입었다 해도 그 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세화가 또 데리고 나와 준다니까, 날이 풀리길 기다리자.
“세화야! 나 돌아가고 싶...”
몸을 돌려 복귀의사를 밝히려던 박사는, 세화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자 미간을 잔뜩 구겼다.
지금 자신을 놔두고 먼저 간 거야?
도망쳐도 언제든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건가?
아니면 추위 때문에 제 발로 들어올 거라 생각하나?
이유가 뭐든 슬펐다.
남극의 내륙은 오지 중에서도 오지였다. 자신 같은 일반인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는데, 그냥 놔두고 가다니...
괜히 서러운 마음을 느낀 박사가 황급히 발을 놀렸다.
“가, 같이 가! 기다려!”
뒤뚱뒤뚱 뛰어가던 박사는 겹겹이 입은 옷, 그리고 눈보라 때문에 무게중심을 잃어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아프진 않았지만 세화에게 정말 실망스러웠다.
“아악!”
일부러 주의를 끌기 위해 큰 소리까지 질렀지만, 세화는 자신을 돌아봐주지도 않았다.
오늘 착하다고 칭찬도 해줬으면서... 자신을 아끼는 것처럼 말했으면서 이럴 땐 부축도 해주지 않다니...
속으로 투덜거린 박사가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
‘어...?’
박사는 자신의 코앞에 쌓인 눈, 그 위로 아주아주 약간 삐져나와있는 안테나 같은 무언가를 보았다.
설마 싶었던 그녀가 눈을 파보니, 무전기 같이 생긴 기계가 떡하니 나왔다.
박사는 본능적으로 세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뒤를 보지도 않고 멀어지는 중인 그녀. 박사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세화와 무전기를 번갈아 살폈다.
이게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인간이 쓰던 물건 같은데, 혹시 각국의 남극기지 연구원들이 탐험하다 흘렸나?
아니면 인간들이 접근해서 세화가 다 죽여 버렸는데, 시체를 치우다가 미처 회수하지 못했나?
짧은 시간에 온갖 생각이 밀려든 박사는 이걸 어찌해야할지 고민에 빠졌고, 결론을 내렸다.
‘이건 함정이야...’
딱 봐도 상황이 너무 작위적이었다.
생각해보라. 기지와 가까운 이곳에 박사 자신이 가장 바라는 통신장치가 떡하니 있다?
여태껏 발각된 적이 없는 타이라트의 기지가 이런 걸 놓칠 정도로 허술할 리 없었다.
자신을 테스트해보기 위해 세화가 파놓은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섭섭했다. 자신은 세화를 믿고 있고, 더욱 큰 믿음을 줄 각오가 되어있는데 세화는 아닌 것 같아서.
확실한 증명이 필요했다. 충성심을 보여줄 좋은 방법이 뭐 없을까?
일단 이번 일에 대해선 당당하게 따져서 보상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