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2 붕괴, 중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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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럴 때 내가 쓰는 방법은...”
마르셀라와 함께 미래과학에 대한 토론을 나누고 있던 박사가 눈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마르셀라가 걱정스런 투로 묻는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미안한데 커피 좀 타줄 수 있을까?”
“물론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난 마르셀라가 커피포트를 켰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박사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아리송한 감정이 피어오르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러지...?’
뭔가 이상한데 그걸 알 수가 없다.
무언가를 검색하려고 포털사이트를 켰는데, 내용을 잊어버려서 그냥 자음, 모음만 쓰는 기분이었다.
혼란스러워하던 박사는, 어느 샌가 커피를 다 탄 마르셀라가 잔을 내려놓자 정신을 차렸다.
“잘 마실게.”
“괜찮으신 건가요? 고민이 깊어 보이시는데...”
“난 괜찮아, 고마워.”
애써 억지웃음을 짓는 박사에게, 마르셀라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많이 답답하시죠...? 산책이라도 나가실 수 있도록 왕비님께 말씀드려볼게요.”
산책이라... 바라던 바였다.
현재 자신은 바깥공기가 절실했다.
헌데 세화가 허락해줄까?
어제 자신은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그렇기에 단칼에 거절할 것 같았다.
“아냐... 나중에 내가 직접 말해볼게.”
“알았어요. 배는 안 고프세요?”
별로 고프지 않다. 라고 말하려던 박사가 멈칫했다.
이상하게 눅진한 음식이 당겼기 때문.
어제 죽이 너무 맛있어서 그런가 싶었다.
세 그릇이나 먹어서 물릴 만도 한데 이러다니... 식욕이 왕성해지는 입덧이 오기라도 했나보다.
“고픈 것도 같은데, 혹시 죽을 좀 먹을 수 있을까?”
“죽이요? 그러면 야채죽으로 해드릴까요?”
어제 먹었던 죽은 닭죽이었다.
박사가 조심스레 반문했다.
“닭죽으로 가능해?”
“그럼요. 금방 만들어올게요.”
마르셀라가 방을 나가자, 박사는 침대에 털썩 누워 팔로 자신의 이마를 가렸다.
어제 충격적인 일이 연달아 일어나서 속이 메슥거릴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이곳의 생활에 적응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혁이 보고 싶었다. 그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며칠간 바쁠 거라고 하긴 해놨는데, 연락이 없는 걸 알고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태까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지구를 수십 번이나 뒤져봐도 여길 발견하지 못했는데, 지혁이라고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스로 탈출해야 했다.
‘지혁아...’
그의 얼굴을 생각하니 절로 몸이 달아오른다.
지혁의 우람한 가슴에 안기고 싶다. 달콤하게 사랑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절로 흥분상태에 접어든 박사는 아래로 손을 가져가려다가, 카메라가 있다는 걸 자각하고는 멈추었다.
위로를 하고 싶은데... 저것 때문에 눈치가 보여 못하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마르셀라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식욕이 확 솟은 박사가 얼른 탁상에 가서 앉았다.
그래, 먹어야 일을 도모할 수 있다. 힘을 내자.
그리 생각한 박사는, 마르셀라가 쟁반을 내려놓자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어제 먹었던 것보다 훨씬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닭죽.
안 봐도 맛있을 것이 뻔하다.
기대감 어린 눈으로 죽을 입으로 가져간 박사는,
“....?”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어제의 그 맛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맛은 있었다. 그러나 세화가 만들어준 죽 특유의... 설명하기 힘든 그 맛이 안 났다.
결국 박사는 죽을 몇 숟갈 뜨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맛이 없으세요...?”
초조한 얼굴로 물어오는 마르셀라.
박사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맛있어. 근데... 갑자기 속이 거북해져서...”
“그래요...? 소화제라도 갖고 올까요?”
“아냐. 입덧 같은 게 와서 변덕이 심해졌나봐. 미안해.”
“아니에요. 과일이라도 드실래요?”
“아니, 괜찮아. 그냥... 조금 쉬고 싶어.”
“알겠어요. 그럼 나가볼게요. 죽은 치울까요?”
“응. 그래주라.”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린 마르셀라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쟁반을 들고 나갔다.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간 박사는, 항상 따뜻했던 방이 왠지 모르게 추워진 것 같자 이불을 확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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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님. 일어나보세요.”
귓가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
박사의 눈이 부드럽게 뜨였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옆에 세화가 있자 눈을 비비며 물었다.
“왜...?”
“마르셀라가 걱정하더라구요. 죽을 몇 수저 뜨다가 내려놓았다죠?”
“입맛이 없어져서... 설마 안 먹었다고 해서 벌을 받는 건 아니지...?”
세화가 부드럽게 웃으며 박사를 안심시켜주었다.
“벌은 없어요.”
다행이었다. 또 다시 스위치를 누르긴 정말 싫었다.
안도한 박사가 말했다.
“고마워... 근데 왜 깨웠어?”
“오후 2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에요. 가뜩이나 임신도 하신 분이 굶으면 안 되죠. 걱정돼서 왔어요. 점심 가지고 왔으니까 먹어요.”
오늘의 세화는 정말 살가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만은 기본에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았는데 말이다.
챙겨주는 기분이 들어서 고맙긴 했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 고소한 향기가 풍겼다.
아까 맡았던 냄새. 닭죽이었다.
“또 죽이야...? 다른 걸로 먹으면 안 될까?”
몸을 돌려 죽그릇을 든 세화가 말했다.
“제가 직접 만들었는데, 맛이라도 한 번 봐요.”
박사의 귀가 쫑긋했다.
세화가 만든 닭죽이라면... 그 맛이 느껴질 수도 있었다.
“알았어...”
이불을 옆으로 민 박사가 손을 내밀었다.
그릇을 달라는 뜻. 하지만 세화는 직접 죽을 떠서 박사의 입 근처로 가져갔다.
“아 하세요.”
“내, 내가 혼자 먹을 수 있어...”
“얼른.”
박사가 머뭇거렸다.
개 취급을 당하니 서운했지만,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따라야 맞겠지.
생각정리를 마친 박사가 입을 살짝 벌렸고, 세화가 죽을 먹여주자 오물오물 씹었다.
그리고는 밝아진 안색으로 세화를 바라보았다.
어제의 그 맛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맛있죠?”
“응... 엄청 맛있어...”
“정성을 담아서 그래요.”
박사는 이번엔 저 스스로 입을 벌렸다.
그 자연스러운 행동에, 세화의 눈가가 초승달모양으로 변했다.
그렇게 박사는 말없이 죽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세화가 수저를 줄 듯 말 듯 멈칫할 땐, 안달이 난 듯 몸을 달싹이기까지 했다.
마치 어미새에게 밥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아기새처럼 말이다.
결국 박사는 그런 식으로 죽을 다 먹어버렸다.
입 안에 남은 희미한 맛을 음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킥킥거린 세화가 그릇을 치우자, 박사가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세화야... 더 주면 안 돼?”
“딱 1인분만 만들었어요.”
“더 만들어줘.”
“안 돼요. 자고 일어난 직후니까 많이 먹으면 더부룩할 거예요.”
“부탁해... 나 배고파...”
“안 된다고 했어요.”
박사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안 된다니까 어쩔 수 없지. 세화의 명령은 따라야 한다.
그래야 벌을 피하고 유리아를 지킬 수 있으니까.
그릇에 묻은 잔여물이라도 박박 긁어먹고 싶지만 참자... 유리아를 위해서 참는 거다.
라고 생각하던 박사는, 세화가 분홍색 컵을 내밀자 상념을 털어냈다.
“물 마셔요.”
“전부 마셔?”
“그거야 박사님 마음이죠.”
“응.”
컵을 받아든 박사가 물을 들이켰다.
죽을 너무 맛있게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입 안에 잔향이 남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물에서마저 그 기분 좋은 맛이 느껴졌다.
물을 순식간에 전부 마셔버린 박사는, 체면도 잊고 혀를 내밀어 컵 안의 물기를 핥았다.
“목이 많이 마르셨나보다. 정수기도 있는데 왜 안 마시고 있었대?”
“그게 아니라, 밥을 먹은 직후라 목이 막혀서 그래...”
“그러시구나.”
“응. 근데 저... 세화야. 혹시... 방 안에 있는 카메라 좀 치워줄 수 있니?”
“왜요?”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미칠 것 같아... 날 조사해봤으면 알겠지만...”
세화가 박사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조현병 병력이 있으셨죠?”
“응...”
“카메라를 치우는 건 안 돼요. 박사님은 너무 똑똑하니까요.여기 있는 전자기기들의 부품을 하나씩 빼서 무언가 일을 벌일 것 같단 말이에요.”
“그건 억측이야...! 걸리면 큰일이 날 짓을 왜 하겠어? 게다가 매일 너와 마르셀라가 찾아오기도 하잖아. 절대 딴 짓 안 할게...! 응? 부탁이야...”
거의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한 박사.
세화가 아리따운 미소를 지으며 박사를 안았다.
온몸이 찬 그녀의 품 안.
오한이 찾아올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포근했다.
마치 친숙한 혈연관계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미안해요, 박사님. 아직은 안 된답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얌전한 태도를 계속 보여주시면, 정말 긍정적으로 고민해볼게요.”
박사가 조금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알았어...”
박사는 현재 ‘철석같이’ 같은 부사를 붙일 정도까진 아니지만, 세화를 믿고 있었다.
마물의 말은 믿어선 안 된다는 다짐 따윈 머릿속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세화가 자신에게 시킨 인륜을 저버린 짓들도 지금만큼은 잊어버렸다.
그녀는 이런 자신의 속내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저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죽을 먹을 때처럼.
“마르셀라한테 박사님이 읽을 만한 책 몇 권을 가지고 오라 말해놓을게요. 오늘은 푹 쉬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는 걸까?
뭔가 기분이 업 되는 느낌이다.
“고마워...”
세화는 말없이 박사의 뺨을 어루만져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들뜬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은 박사는 자신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당겨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리고는 거기서부터 올라오는 쉰내에 얼굴이 붉어졌다.
공원에서 잡혀온 이후 샤워를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여러 힘든 일을 겪어오면서 땀으로 절어버린 모양이었다.
세화는 분명히 이 냄새를 맡았을 텐데, 내색이라도 해주지... 정말 창피했다.
박사는 냅다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흐릿한 조명 아래에서 따뜻한 물로 온몸을 깨끗하게 씻어낸 그녀는, 세면대에 자그마하게 설치된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
피부가 조금 창백해진 것 같았다.
입술의 색도 평소보다 진했으며, 얼굴이 젊어지고 고와진 듯했다.
빛을 보지 못해서 그런가? 아니면 조명 때문에 착각을 하고 있는 건가?
이유가 뭐든 나쁘지 않았다. 아름답게 느껴졌으니까.
상쾌한 얼굴로 화장실을 나온 박사는, 마르셀라가 책 두 권을 든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자 생긋 웃었다.
“왔어?”
“네. 왕비님의 명령을 받아서 책을 골라봤어요. 미래과학과 관련된 책은 재미가 없거나 대부분 읽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해서 소설책을 가지고 왔는데, 괜찮나요?”
“뭐든 좋아. 고마워.”
“아니에요.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어요.”
“좋은 소식? 뭔데?”
“왕비님께서 오늘 박사님의 태도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그러니 유리아 님을 뵙게 해드리래요.”
박사의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정말?”
“정말이에요. 하지만 제약이 있어요. 밖으로 나가실 땐 안대와 귀마개를 착용하셔야 해요. 또한 유리아 님께선 주무시는 중이고, 유리창 밖으로만 볼 수 있어요. 그래도 상관없으세요?”
제약이 있긴 하지만 유리아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무사한 걸 두 눈으로 확인만 하더라도 큰 수확이었다.
역시 세화에게 잘 보이려 하길 잘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고분고분 굴어서 여러 혜택을 받아야겠다.
“상관없어. 지금 당장 보러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