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230화 (230/471)

EP.230 박사 타락 계획 #2

“지혁 씨! 여기에요!”

멀찍이서 손을 흔들며 소리치는 아델.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임에도 쾌활한 그녀를 보니 덩달아 텐션이 높아진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10분밖에 안 기다렸는데요. 근데... 잠깐만요...”

아델이 내 주변에서 코를 킁킁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이상하다...?”

다시금 냄새를 맡기 시작하는 아델을 보며 찔끔한 내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향수냄새가 나요. 여자 향수인데...”

아... 난 또 마기를 감지한 줄 알았잖아. 식겁했네.

“회의실에 비서가 있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함께 일을 했고요.”

“.... 그런가요?”

“설마 절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그리 말하자, 아델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절대 의심하지 않아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시지요?”

“아니라면 됐습니다. 이제 선물 주세요. 오늘 주신다고 했잖아요.”

한손을 펼친 채로 아델에게 내밀자, 그녀가 귀여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혁 씨. 오늘은 선물을 드리지 못해요.”

“왜요?”

“실비아 언니가 이상해요. 지혁 씨의 상담이 필요해요.”

당연히 그럴 거다. 아마 실비아에게서 어색한 기운을 느꼈겠지.

근데 그거랑 선물이랑 무슨 상관일까?

심각한 얘기를 하고 싶은데 선물을 주면 분위기가 업 된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까?

일단 맞춰줘야겠다.

“상담이요? 저로 괜찮겠습니까?”

“지혁 씨만 할 수 있어요. 저희 행성의 신도들이 전부 상담을 해준다고 해도, 저는 지혁 씨를 고를 거예요.”

이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사랑이 샘솟는다.

“그러면 조용한 곳으로 가서 대화를 나눠볼까요?”

“호, 호텔은 안 돼요... 거기 가면 지혁 씨는 분명 음흉한 일을 할 테니까요...”

누가 호텔로 간다던? 어이가 없네.

헛웃음을 켠 나는 말없이 아델을 잡아끌고 조용한 분위기의 룸이 있는 칵테일 바로 갔다.

거기서 아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실비아는 아침부터 저기압인 상태로, 아델과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운동을 하러 나갔다고 한다.

저녁에 들어와서도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으려고 했고, 이에 걱정이 생긴 아델이 물어봤으나 얼버무리기만 했다.

“언니가 계속 저를 피하는 느낌이에요... 정말 슬퍼요...”

거의 울먹거리면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아델.

그런 그녀의 팔을 살살 쓰다듬던 내가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쓸쓸한 감정을 느끼고 계신 것이 아닐지...”

“쓸쓸한 감정이요?”

“예. 요즘 아델이 절 만나느라 집을 늦게까지 비우는 시간이 많잖아요? 그 때문에 외로움을 타고 있을 수도 있어요.”

현 상황에선 실비아와 아델을 붙여놓는 게 낫다.

실비아가 내게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색한 분위기는 계속될 테고, 그럼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사이는 멀어질 터.

또한 박사를 타락시키기 위한 시간도 필요하니까, 당분간 아델을 집에 두자.

“하지만 실비아 언니도 운동을 하느라 늦게까지 집에 없는 걸요?”

“그거야 외로우니까 뭐라도 하려고 하시는 거겠죠.”

“그런 건가요...?”

“확실치는 않아요.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아델이 고개를 살짝 돌려 날 올려다보았다.

근심이 깊은 눈빛.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구하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내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할까요? 며칠간 실비아 씨와 함께 있어보세요. 그녀가 운동을 하든 뭘 하든 같이 따라가서 해요.”

“네...? 그럼 너무 귀찮아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로 귀찮아할 사람이었다면 아델이 실비아 씨를 그렇게나 믿고 따르지 않겠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을까요? 지혁 씨가 절 보고 싶어 하실까봐 걱정이에요...”

자신감 봐라? 사실 맞는 말이었다.

매일매일 보지 않으면 힘들긴 해.

“보고 싶긴 할 테지만, 밀린 일을 처리하면 시간이 빨리 흐르겠죠. 이참에 해외로 출장을 가서, 여러 협력업체와 밀린 이야기를 해봐야겠습니다.”

“그럼... 좋아요. 한 번 지혁 씨의 말씀대로 해볼게요.”

“한 가지 약속할까요? 실비아 씨와 함께 있을 땐, 제 이야기는 언급하지 마세요. 완전한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문자도, 전화도 하지 말아요?”

“그건 해도 되죠. 단, 실비아 씨와 있을 때는 삼가세요. 자기 전에, 혹은 목욕을 할 때 정도로 한정하죠.”

아델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와 연락을 잠깐씩만 하자니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비아를 걱정하는 맘이 컸는지, 이내 수긍했다.

“알았어요... 대신 자기 전엔 오래 통화해요.”

“물론이죠. 약속?”

새끼손가락을 아델의 코앞에 내밀자, 그녀가 배시시 웃더니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이제 실비아는 아델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더욱 큰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붙임성 좋은 아델은 계속 살갑게 접근할 테고, 그러다가 홧김에 싸우기라도 하면 베스트.

또한 나와 아델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보이도록 언급을 자제하라고 하긴 했는데, 이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다.

이걸 기회로 생각한 실비아가 내게 더욱 들이대면 좋고, 아니어도 괜찮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박사의 타락.

이렇게 시간을 번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

박사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마르셀라라는 아이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젊은 나이 같은데도 미래과학에 대한 이해도가 무척 뛰어났다.

소위 말하는 천재. 대화를 나누다가 지혁이 생각날 만큼 박식했다.

솔직히 지혁보다 더욱 뛰어난 인재 같았다.

여기가 타이라트의 기지만 아니라면, 마르셀라가 그의 수하만 아니었다면 꼬셔서 본부 소속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였다.

성격마저도 호감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엔 가식 따윈 없었고, 시종일관 살가운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박사 자신을 과학자로서 무척 존경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착한 아이인데 왜 타이라트를...’

무슨 연유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화를 왕비라고 지칭한 것을 보았을 때, 마르셀라는 진심으로 이곳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어쩌면 세뇌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 아닐지도.

그리 생각한 박사가 상념을 날려버리고는 커피를 홀짝였다.

“도움이 됐니?”

마르셀라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많은 도움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캐시 박사님.”

솔직히 죄책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말해주었던 미래과학에 대한 정보를 악용할 우려가 있어서였다.

때문에 대답을 하며 거짓말을 섞고 싶었는데, 마르셀라가 워낙 총명해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인류에게 큰 짐을 지워버리게 된 걸지도 모른다.

“그래...”

이런 박사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했을까?

마르셀라가 조곤조곤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박사님이 허락해주시기 전까진,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새로 얻은 과학지식을 사용하지 않을게요. 애초에 공부를 하려고 여쭤본 것이었어요.”

허락은 당연히 해주지 않겠지만, 적의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숨을 길게 내쉰 박사가 침울해하자, 마르셀라가 말을 이었다.

“박사님이 저흴 믿지 못하신다는 걸 잘 알아요. 그래서 믿어달라는 말은 하지 못하겠네요.”

“.....”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이만 돌아가 보려고 하는데...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을까요? 제가 구해올게요.”

필요한 물건이라... 휴대폰을 비롯한 통신장비는 당연히 안 될 터.

박사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드시고 싶은 음식도, 옷이나 속옷도 필요 없으세요? 과일이라도 가져올까요?”

걱정스런 표정과 말투.

마르셀라는 무언가 대가를 주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타입 같았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틈타 유리아에 대한 걸 물어보자.

“아니... 괜찮아. 대신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줄 수 있을까? 나도 네 물음에 답해줬잖아.”

“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여기 있으려니 미칠 것 같아... 부탁이야...”

“그렇게나 답답하세요...? 어떡하지...”

마르셀라가 생각에 잠겼다.

박사는 괜히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참을성을 가진 채 얌전히 기다렸다.

얼마 후, 마르셀라가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말했다.

“한 가지 질문만 대답해드릴게요. 무조건 답을 드릴 수는 없어요.”

곤란한 질문은 대답하지 않겠다는 소리.

박사의 안색이 환해졌다.

세화에게 꽉 묶여있는 듯 보였는데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정도라면 희망이 보였다.

돌파구를 마련할 희망이.

“알았어. 바로 물어볼게. 유리아도 여기 잡혀있니? 풀 네임은 유리아 엘레나르야.”

“그건...”

마르셀라가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

덜컥!

문이 확 열리더니 세화가 들어왔다.

박사는 무척 긴장했다.

자신과 마르셀라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세화는 평온한 표정으로 마르셀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간 됐어. 이만 나가봐.”

“알겠습니다, 왕비님.”

“박사님은? 말 잘 들었어?”

박사가 눈을 데굴 굴렸다.

세화의 질문이 그 ‘좋지 않은 일’과 관계된 일임을, 박사는 알 수 있었다.

아까 미래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자신이 어물쩡거려서 마르셀라가 수첩에 횟수를 기록한 적이 있었는데...

‘좋지 않은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박사는 마르셀라가 상황을 그냥 넘겨주길 바랐다.

‘제발... 제발...’

속으로 연신 빌고 또 빈 박사의 정성이 닿았을까?

마르셀라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해주셨어요. 한 차례도 막힘이 없었구요.”

사정을 봐주다니... 정말 의외였고, 고마웠다.

이러면 마르셀라와 친밀해진 뒤, 그녀를 이용해 여러 일들을 도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고 생각했는데... 박사는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그 생각이 큰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정말이야?”

“네...”

세화는 말없이 자신의 새끼손가락 첫 마디를 땄다.

그녀의 손에 볼록하게 맺힌 시뻘건 피.

그걸 본 마르셀라의 얼굴에 홍조가 띄워지고, 온몸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 하아... 하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녀를 향해, 세화가 재차 물었다.

“정말 아무 일 없었어?”

“.... 하, 한 번... 한 번 말을 듣지 않았어요...”

두근!

박사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갑자기 왜 순순히 실토하는 거지? 피를 본 이후 저러는 것 같은데...

피에 뭔가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는 걸까? 아니면 마르셀라가 흡혈귀 비스무리한 마물인가?

뭐가 됐던 지금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거짓말을 했네?”

낮게 깔리는 음산한 목소리에, 마르셀라가 바닥에 냅다 무릎을 꿇었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맹세해요...!”

세화를 향해 손을 싹싹 비는 마르셀라의 시선은, 손가락에서 흘러내릴락 말락 하는 핏방울로 가있었다.

잠깐 마르셀라의 처분을 고려해보는 것 같던 세화는, 봐주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손가락을 뒤집어 피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톡.

미세한 핏방울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마르셀라가 마치 발정이 난 암캐마냥 바닥에 얼굴을 처박더니 피를 핥아대기 시작했다.

체면 따윈 상관조차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헥...! 헤엑...! 헥...”

혀를 날름거리며 바닥을 적시는 마르셀라.

그녀의 추잡한 모습을 지켜보던 박사가 몸을 파리하게 떨었다.

그런 박사에게 다가간 세화가 손가락을 내밀어 눈앞에 두었다.

그리고는 묻는다.

“이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다시금 맺히기 시작하는 핏방울.

박사가 손가락에서 시선을 뗐다.

“저리 치워...!”

“먹어보고 싶어요?”

“웃기지 마! 누가 그런... 흡!”

박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세화가 박사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 피를 묻혔기 때문.

불쾌한 표정을 지은 박사가 재빨리 입술을 닦아내고는 버럭 화를 냈다.

“이세화! 너 진짜 미쳤구나!”

“미쳤다니요... 서운하게 말씀하시네요. 일단 벌부터 받아야겠죠? 마르셀라가 한 번 잘못했다고 했고, 저 아이가 거짓말을 하도록 만든 건 박사님이 분명하니... 괘씸죄를 적용해서 두 번으로 할게요.”

“두 번...? 뭘? 뭘 하려는 건데?”

“궁금한 것도 참 많으시다... 마르셀라가 분명히 그랬죠? 말을 듣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구요. 지금 알려줄게요.”

생긋 웃은 세화가 아직까지 바닥을 탐하고 있는 마르셀라를 불렀다.

“마르셀라, 시작해.”

그에 마르셀라가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세화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힘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네에... 왕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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