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9 박사 타락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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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에 빠지는 에드워드,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자신.
이후 자신과 지혁의 농밀한 키스...
제 3자 입장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박사는, 또 이런 꿈을 꾸는구나 생각했다.
정말 싫었다. 평소에 꾸었다면 불길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고 생각할 텐데, 지금은 처한 상황 때문인지 불길함만이 남았다.
빨리 깨어나고 싶었다.
슈와아악-!
이런 자신의 의지가 통했을까?
허공에 떠있는 자신의 근처에서, 갑작스레 어마어마한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일어나더니, 몸이 높이 붕 솟구쳤다.
이어서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장면이 확 바뀌었다.
빛 한 점 하나 없는 어둠만이 보이게 된 것이다.
‘여긴...’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직감한 박사는, 경거망동하기 전에 호흡을 골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신한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모양.
눈을 어둠속에 적응시키고 나니 자신이 어디 있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여긴 방 안이었다. 그것도 일고여덟 평 남짓한 좁은 방.
벽지는 온통 새까맸고, 구석에 자그마한 직사각형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엔 커피포트를 비롯한 탕비실 물품들이 자리했고, 방 가운데엔 자그마한 2인용 탁상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그 탁상의자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것 같았다.
사람의 형체였다. 다리를 꼬고 있는 상태였는데, 체형을 보니 여자.
그리고 얼굴이 있는 부분에 진한 보랏빛 두 개가 타원형으로 살짝 맺혀있었다.
빛은 박사 자신의 얼굴을 향해 아주 조금 움직이다가 금세 사라졌다.
긴장한 박사가 저도 모르게 몸을 뒤틀자,
“일어났나보네요.”
그 형체가 말을 했다.
목소리를 듣고 형체가 세화임을 직감한 박사가 상체를 일으키고는 물었다.
“나, 날 죽일 거야...?”
그러자 세화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웃긴 듯한 톤. 박사의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한동안 대소를 터뜨리던 세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전등을 켰다.
딸깍!
감도가 매우 낮은 불빛이 방 안을 내리쬔다.
박사는 편한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세화가 자신을 비웃듯 바라보자 재차 물었다.
“날 죽일 거냐구...!”
“제가 왜 박사님을 죽여요? 우린 동료잖아요.”
타이라트 쪽으로 넘어간 게 분명한데 동료라니... 게다가 기절시킬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공원에서의 일이 생각난 박사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화가 부드러운 투로 말한다.
“멍이 들긴 했었는데, 치료했어요. 불편한 곳은 없을 거예요. 의료기기 성능이 아주 좋거든요.”
의료기기? 설마 여긴 연구실 근처인가?
“여긴 어디야...?”
“박사님이 생각하시는 곳은 아니에요. 그나저나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오래 주무시던데? 배는 안 고파요?”
“유리아는 어디 있어...? 설마 나처럼 잡은 거야...?”
“별로 안 고프신가보다. 커피라도 타드려요?”
“유리아는 어디 있냐고! 대답해!”
빼액 소리친 박사.
세화의 눈빛이 일변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박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박사님, 지금 본인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자각이 안 되는 거예요? 제 질문에 대답 먼저 하세요.”
방금 보았던 보랏빛이 홍채에 맺혀 무시무시한 느낌을 자아냈다.
당장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한 안광.
박사는 절망스러웠다. 완전히 변절한 세화에게.
허나 아직 인간미가 남아있다면, 돌아올 일말의 희망 정도는 있으리라.
세화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한 박사가 호소했다.
“세화야... 제발... 제발 원래대로 돌아와...”
“방금은 화를 냈다가, 지금은 울먹거리다가... 감정상태가 말이 아니네요. 우리 박사님, 많이 망가지셨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린 세화가 박사의 흐트러진 단발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세화의 손길에 몸을 부르르 떤 박사가 말했다.
“내가 알던 네가 보고 싶어... 세화야... 부탁이야...”
“감정에 호소하시는 작전으로 바꾼 거예요? 그럼 진짜 실망인데...”
말끝을 흐린 세화가 중지와 엄지를 이용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얼마 뒤 문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리면서 흰색 가운을 입은 새빨간 포니테일 머리의 미녀가 천천히 걸어와 세화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어요?”
미녀의 옆으로 간 세화가 그녀의 어깨에 한손을 올렸고, 박사를 쳐다보았다.
“이 아이는 앞으로 박사님을 모실 거예요.”
그러자 그녀가 박사에게 공손한 인사를 했다.
“마르셀라입니다. 한국이름은 김민지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제니퍼 캐시 박사님.”
박사는 당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납치해온 주제에 자신을 모시다니...?
마르셀라라고 불린 여자의 눈에 호감이 깃들어있는 것도 이상했다.
입을 살짝 벌린 박사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 세화가 자신의 얇고 가는 손가락으로 천장 구석을 가리켰다.
“박사님은 감시당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상한 짓 같은 건 할 생각 마세요. 뭐, 일을 꾸며도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요.”
“.....”
“경고하겠는데, 마르셀라가 묻는 질문엔 무조건 대답하도록 하세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요.”
단아한 말투로 협박한 세화가 방문을 열었고, 마치 피아노를 치듯 새끼손가락부터 엄지까지 사르르 움직여 작별인사를 했다.
덜컥!
문이 닫히고 정적이 찾아온 방 안.
세화가 나갈 때까지 고개를 거의 45도 각도로 숙이고 있던 마르셀라가 박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가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자그마한 기계장치를 하나 꺼냈다.
“이건 호출기에요. 누르시기만 하면 제가 올 겁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24시간 가리지 않아요. 필요한 물건은 전부 가져다드릴게요. 단, 곤란한 물건은 반입이 불가능하니 이 점 알아두셨으면 해요.”
상냥한 목소리. 약간 흥분한 기색도 띠고 있는 것 같다.
어리둥절해한 박사가 무심코 호출기를 받았다.
그러자 마르셀라가 커피포트를 켜며 말한다.
“왕비님께 처음으로 떼를 썼는데 흔쾌히 들어주셨어요. 정말 감사할 따름이랍니다. 그분이 하신 경고는 잘 들으셨죠?”
왕비님? 지금 세화를 왕비라고 지칭한 건가?
자신의 귀를 의심한 박사가 벙 쪘다.
커피를 탈 준비를 하고 있던 마르셀라가 박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만약 박사님께서 제 질문에 성실히,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셨을 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예요. 아주... 아주 좋지 않은 일이요.”
“.....”
“이렇게 돼서 정말 죄송해요. 대신 잘 챙겨드릴게요.”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커피 받침과 함께, 커피를 탁상 위에 올려놓은 마르셀라가 생긋 웃었다.
“첫 질문이에요. 박사님의 전투기엔 아직 미완성인 광학 병기가 있잖아요? 파괴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정거리가 대단하던데... 회절 현상은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뜬금없이 물리학 이야기를 꺼내는 마르셀라.
박사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마르셀라가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그리고는 펜을 좌에서 우로 살짝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엄청난 불안감이 생긴 박사가 물었다.
“무, 뭐하는 거야...?”
“박사님께서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신 횟수를 적어놓는 거예요.”
“왜...? 뭘 하려고...?”
“말씀드렸잖아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구요. 아, 박사님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을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까지 밴 걸 알고 있다고...?
아니, 세화가 자신을 의료기기에 넣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아이가 있는 걸 알 수 있긴 하다.
설마 연구실이 장악당한 건가? 거기서 의료기기를 훔쳐온 거야?
“다시 물을게요. 회절 현상은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목소리가 조금 낮아진 마르셀라가 재차 묻자, 박사가 상념을 멈추고 정신을 차렸다.
그 불안한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끔찍한 일이 분명할 것 같았으니...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대답을 해줘야한다.
“내, 내가 만든 광학 시스템이 있어... 그것과 폴리머스를 사용하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아, 박사님의 연구 성과를 훔칠 계획 같은 건 전혀 없으니,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토론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
지금 연구 성과를 도둑맞는 게 대수랴? 목숨이 걸린 일인데.
마르셀라, 김민지라 불린 이 처녀는 미래과학에 대해 일가견이 있어 보였다.
적의가 거의 없어 보이기는 한데... 그렇다면 대화가 통할 수도 있다.
“미안한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좀 줄 수 있어? 내가 지금 많이 혼란스러워서... 부탁할게...”
“음... 그러실 만도 하네요. 알았어요. 10분 드릴게요.”
“고, 고마워...”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내쉰 박사가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커피 잔 손잡이를 잡은 그녀는, 이 안에 뭘 탔을까 생각하다가 그게 쓸데없는 고민이란 걸 파악했다.
자신은 지금 포로, 인질이었다.
해코지할 생각이었다면 약 같은 얕은 수를 쓰지도 않았겠지.
라고 생각한 박사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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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냥 정신부터 깨면 되는데, 왜 토론 같은 쓸데없는 짓을 해? 마족으로 만든 다음 실컷 하면 되잖아.”
모니터를 통해 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내 물음이었다.
세화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마르셀라의 부탁이에요. 박사가 인간일 때 여러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대요. 견식이 넓어질 것 같다고 하던데?”
마르셀라는 박사가 오기를 무척 고대했었다.
미래과학에 관해선 인간들 중에서 적수가 없었고, 각종 무기를 만들어 우릴 곤란에 빠뜨렸던 전적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과학자로서의 호기심. 저러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랬군.”
“실비아랑 아델한테만 신경 쓰지 마시고, 수하들 좀 챙겨요.”
옳은 말이었다.
마르셀라한테 상을 내려야겠다고 생각만 해놓고 가만히 있었는데, 오히려 세화가 날 대신해주고 있구나.
이러다 마르셀라가 나보다 세화를 더 모시게 되는 건 아닐까 싶다.
“초창기에 마르셀라를 의자로 쓸 때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네.”
“방금 뭐에요? 투정인가?”
“칭찬이지.”
피식한 내가 옥좌에서 일어나자, 세화가 얇은 코트 하나를 들고 와 내게 입혀주었다.
그리고는 뒤에서 날 꽉 껴안았다.
“다녀오세요, 주인님.”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라 그런지 설렌다.
배꼽 아래에 자리한 세화의 손을 포갠 내가 말했다.
“다녀올게. 잘 감시하고 있어.”
“네.”
그렇게 나는 포탈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마기를 깡그리 지워야하는데... 이것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