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8 박사 납치 계획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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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거리는 공항을 빠져나온 박사와 유리아는 택시를 타고 움직였다.
목적지는 유리아의 집이었다.
세화의 오피스텔엔 갈 수가 없고, 박사의 집은 지혁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런 결정을 내린 상태.
택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박사는 자신의 퀭한 눈을 비볐다.
그 모습을 본 유리아가 묻는다.
“피곤하세요?”
“눈이 조금 아플 뿐이야. 정신이 피곤한 건 절대 아니고.”
“저희 집에서 잠깐 쉬었다가 움직여요. 방은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구요.”
“고마워.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인사드려야겠다.”
유리아는 속으로 아차 했다.
자신의 아비였던 글렌 엘레나르는 어미와 함께 죽은 지 오래.
멸망해버린 왕국과 운명을 함께해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상태다.
박사가 아는 글렌 엘레나르... 즉, 지구인으로 환생한 김태곤은 주인이 변장한 모습이었다.
환생 같은 건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람 말이다.
재빨리 핑계거리를 생각한 유리아가 말했다.
“현재 아버지와 따로 살고 있어요.”
“그래...? 왜?”
“아버지는 대전에서 주로 활동하시거든요. 출퇴근시간이 무척 길어서... 요새 바쁘기도 하구요.”
“아... 부동산 관련 업무를 하신다고 했지?”
“맞아요.”
“아쉽겠다...”
아쉽긴 했다.
그러나 그건 주인과 함께 있지 못해 아쉬운 거지, 아비 따위와는 관계가 없었다.
글렌 엘레나르는 현 자신에게 있어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피가 섞였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사람. 만약 살아있었다면 자신이 찾아내 죽였을 것이다.
“아쉽긴 해요. 나중에 대전으로 이사를 가려고도 생각하고 있어요.”
“효녀네? 착하다. 아, 그... 유리야. 네 아버지가 지혁이와 사업을 연계하지 않았니?”
“네. 지금도 하고 계실 거예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요.”
“혹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우물쭈물하는 박사.
유리아가 그녀의 뒷말을 예측했다.
“지혁 씨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하신 거죠?”
“응... 혹시나 바뀌었던 점이 있었나 해서...”
정말 짜증나는 망상이었다. 조현병이 이리도 거지같을 줄이야.
이런 박사의 멘탈을 와장창 깨뜨릴 시간도 머지않았으니 참아주지.
그리 생각한 유리아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의 성격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뭔가 바뀌었다면 눈치챘을 텐데, 통화를 하거나 만났을 때 그런 기색은 전혀 없으셨어요. 아버지는 현명하신 분이세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고 장담할게요.”
“다행이다. 미안해. 괜한 걱정을 했나보네.”
“아니에요. 그나저나 집으로 돌아가면 세화와 약속을 잡아놓아야겠네요. 박사님도 약속장소에 오시는 건 어때요?”
“내가? 미행을 하라는 소리야?”
“저는 어려서 통찰력이 깊지도 않고... 박사님의 말씀대로 세화와 대화를 나눠보면서 이상한 점을 캐보긴 하겠지만, 세화와의 관계가 관계라 냉정하게 볼 자신이 별로 없네요. 그리고 듣는 것보단 보는 게 낫잖아요. 세화의 표정이나, 제스처를 보면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유리아가 통찰력이 깊지 않다는 데엔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는 무척 어른스러운 사람이니, 정신병이 있는 박사 자신보다 훨씬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뒷말은 동의했다.
확실히 표정이나 제스처, 어감 등을 살펴본다면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휴대폰을 하나 줄게. 거기 녹음기를 연결해둘 테니까, 그냥 켜두기만 해. 너희 대화를 들어보면서 세화의 행동거지 같은 것들을 살펴볼게.”
“알겠어요.”
“고마워, 유리야.”
자신이야말로 감사하다.
이렇게 쉽게 믿어줘서.
유리아는 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박사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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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거리에 있는 호프집에서, 세화와 유리아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혼자 온 손님으로 위장한 채로 멀찍이 떨어져있던 박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선 이어폰을 다시 제대로 끼웠다.
그리고는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들어보았다.
-몰디브는 어땠어?-
-별로였어. 비가 많이 오더라.-
-내가 우기라고 했잖아. 다른 곳으로 가지 그랬어.-
-그냥 호텔에서 푹 쉬기만 한 거야.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어?-
-나야 뭐 똑같지. 대학 다니고, 공부하고... 심심해.-
일상적인 얘기였다. 의심할 거리도 없는.
조금만 지나면 유리아가 살살 유도심문을 할 터였으니 기다려보자.
하지만 두 사람이 맥주와 치킨을 다 먹을 때까지도, 계산을 하고 나갈 때까지도 대화에선 의문점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소득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박사는, 입도 안 댄 안주의 결제를 마치고 둘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제법 북적이는 한대거리의 편의점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캔맥주를 산 뒤 대로변의 인도를 거닐었다.
인적이 뜸해지기 시작했기에, 박사는 아주 멀리 떨어져선 미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로변에 자리한 자그마한 공원이 보였다.
유리아와 깔깔거리며 떠들던 세화가 그곳을 가리켰다.
-언니, 저기서 마실래? 분위기 좋아 보이는데.-
-공원...? 음...-
잠깐 무언가를 고민하는 유리아.
박사는 유리아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공원이라... 지금은 해가 완전히 저문 시간이었다.
뻥 트인 대로변보단 공원이 몸을 숨기기 훨씬 나았기에, 박사가 유리아의 등에 부착한 신호기에 딱 한 번 신호를 쏘았다.
-그래, 그렇게 하자.-
미세한 정전기를 느낀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두 사람은 공원 안으로 들어가 벤치에 앉았다.
이후 평화로운 듯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조용해서 좋다... 요새 너무 시끄러웠어. 발정난 놈들도 안 오고.-
-발정난 놈들?-
-남친 있다고 해도 자꾸 같이 술 마시자고 들이대는 애들이 있어. 그럴 때마다 인간들 자체가 싫어져.-
공원에 마련된 초목에 숨어있던 박사가 침음을 삼켰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가로등 아래 비친 세화의 얼굴엔 혐오스러움이 가득했다.
솔직히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신조차 불나방들이 달려들 땐 짜증이 났으니까.
헌데 인간들 자체가 싫다는 말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박사는 세화와의 첫 만남을 분명히 기억한다.
말머리 마물이 등장하면서 원룸 건물이 박살났는데, 안의 사람들을 대피시키려다 세화를 발견했다.
그녀는 유승현이라는 남자친구와 함께 벌벌 떨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도 시민들의 대피를 위해 곳곳에 알리려고 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챙기려는 사람.
이세화라는 인물은 그럴 정도로 정의감이 투철했다.
첫 아이테르를 충전했을 때도 기억한다.
유승현과 사귀고 있었음에도 지혁과의 성적인 행위를 하여 죄책감에 휩싸여있던 그녀에게, 정의와 개인의 도덕은 다른 거라고 조언했던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침울해있던 게 눈에 훤하고 엊그제 같은데... 왜 저렇게 변해버린 걸까?
수수한 옷차림도 맨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미니스커트로 바뀌었다.
굽이 높은 하이힐은 기본이고, 화장 때문인지 눈매마저도 날카롭다.
너무나도 요염하다. 강아지상에서 여우상으로 바뀐 느낌이었다.
혹시 새로운 남자친구가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건가? 싶었다.
-이해해.-
푸념한 세화에게 공감해준 유리아. 박사가 살짝 놀랐다.
이해한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 그렇다. 유리아는 지금 세화를 캐내기 위한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저건 공감을 유도하고 있는 거다.
-진짜 열 받지 않아? 지들을 누가 지켜주는 줄도 모르고...-
대책 없는 세화의 대답을 듣고 있던 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했다. 세화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아와 토론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수준.
박사는 세화의 남자친구라는 사람을 생각해보았다.
일단 유승현을 다시 만나는 건 아니라고 본다.
그는 선한 사람이었고, 세화가 저렇게 변할 때까지 가만 둘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새로 만난 사람 같은데...
‘설마 그 사람이 타이라트거나... 타이라트가 심어놓은 첩자 같은 건...’
망상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저 정도로 바뀌었다면 가까운 곳에서 영향을 줬다는 건데, 그럴 만한 사람은 그 남자친구밖에는 없었으니까.
유리아 또한 자신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세화야. 잠깐 화 좀 삭히고 있을래? 나 화장실 다녀올게.-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난 유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공용화장실을 찾아 사라졌다.
세화와 유리아, 그리고 자신 외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공원. 너무 조용해서 긴장된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노력하던 박사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왜 사람이 한 명도 없지...?’
유동인구가 많은 한대거리가 근처여서 사람들이 올 법도 한데... 들려오는 소리라곤 오직 풀벌레들의 지저귐뿐.
불안한 마음이 싹튼 박사가 잘 관리된 나무에 등을 바짝 붙이려는 찰나,
또각!
하이힐 특유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한 차례 들려왔다.
이어서,
또각또각또각또각!
소리가 무척 빠른 템포로 가까워지더니, 세화가 박사의 눈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박사님, 안녕하세요?”
“허억...!”
심장이 완전히 멎을 뻔한 박사가 숨을 들이켰다.
풀소리조차도 안 났을 텐데, 어떻게 알았다는 말인가?
게다가 모자와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고, 어두워서 얼굴을 자세히 살피지도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정확히 자신을 지칭했다.
아무리 익숙한 얼굴형이라 해도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만도 한데 말이다.
박사가 거친 숨소리를 내뱉고만 있자, 세화가 부드럽게 웃더니 박사의 손목을 잡아 풀밭에서 나오게 했다.
“여기 있으면 옷이 더러워지잖아요. 털어드릴게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신의 옷을 털어주는 모습이 더더욱 소름끼쳤다.
심장이 너무나도 빠르게 요동쳤다. 마치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
박사가 말을 더듬었다.
“고, 고마워... 그... 산책을 왔는데, 너와 유리아가 보여서...”
“그럼 그냥 저흴 부르면 되지, 왜 숨어있었죠?”
저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니 들켰다는 걸 확실히 알겠다.
설마 미행 중간에 알아차린 걸까?? 아니면 호프집에서부터?
뭐가 됐든 완전히 망했다.
들킬 것에 대비하긴 했지만, 초장부터 완전히 기세를 잡혀버려 말이 나오질 않았다.
박사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손을 강하게 잡았다.
자그마한 신호기를 감출 의도도 있었거니와, 두려움으로 인해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기 때문이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가 사과했다.
“미안해...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괜찮아요. 그런데 박사님, 저희 진짜 오랜만에 보지 않아요?”
“마, 맞아. 오랜만에 보지.”
“한 번 안을까요? 반가워서 그래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화를 보며, 박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왜 이렇게 오한이 들까?
“껴안는 취미까진 없어서... 유리아는 화장실 갔어? 아까 일어나서 어디 가던데...”
“박사님도 아시면서, 왜 모른 척을 하세요?”
“무슨 소리니...?”
“귀에 이어폰이 꼽혀 있잖아요. 왼손엔 이상한 장치까지 하시고... 도청기 아닌가요?”
기가 막힌 눈썰미였다. 이렇게 어두운데 거기까지 보다니...
“이거...? 그냥 음악 듣는 건데...”
“그래요? 그럼 한 짝 줘보실래요?”
손을 내미는 세화.
그녀는 분명히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화를 내거나 따질 수가 없다.
미행을 들켜 찔끔해서 그런 게 아니라, 무서웠기 때문.
박사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세화가 한쪽 입꼬리를 쓰윽 올리더니 말을 이었다.
“왼손을 가만 두지 못하시네요. 장치를 누르고 계신가보네? 도청기가 아니라면 신호기 같은 건가요? 누굴 부르시려고?”
완전히 읽히고 있었다.
식은땀이 자신의 뺨을 타고 흘러 턱끝에 맺히는 촉감을 느낀 박사가 말했다.
“.... 세화야... 진정해.”
“진정해야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박사님인 것 같은데요?”
“그, 그래. 맞아... 진정할게. 그러니까 말로...”
“말로? 누가 폭력이라도 쓴다고 하던가요? 기분이 정말 나쁘네요.”
잠시 눈앞이 아찔해진 박사는 애써 눈을 부릅떴다.
이젠 이판사판이었다.
“너... 최근에 무슨 일 있었니?”
그에 대답하지 않은 세화가 주제를 돌렸다.
“박사님은 참 똑똑하신 분이에요. 근데... 잘못 짚었어요.”
잘못 짚었다니? 설마 자신은 의심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걸까?
박사는 세화가 했던 말의 저의를 파악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콰악!
“읍!”
어느 샌가 박사의 뒤로 온 세화가 한손으론 입을, 남은 한쪽 팔로는 목을 조이자 숨통이 콱 막혀버려 몸을 버둥거렸다.
“장난은 여기까지 할게요. 미안하게 됐어요.”
귓속에 선명히 들려오는 세화의 말.
시야가 캄캄해진 박사는, 세화가 완전히 악의 편이 됐다고 확신했다.
믿을 사람은 유리아 뿐인데... 세화와 대화를 나눴을 때 신호기를 마구 눌렀는데도 아직까지 오지 않는 걸 보면, 그녀도 곤란한 상황에 처한 듯했다.
이 공원은 함정이었다!
어떻게든 세화에게서 벗어나려던 박사의 기운이 서서히 빠져갔다.
가공할 힘이었다. 변신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방법은 많이 생각해뒀으니까, 부디 오래 버티셔야 해요. 그러다가 진심으로 굴복해주세요. 그래야 박사님의 힘도 강해지거든요.”
다정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정신이 혼미해진 박사는 그 말을 들을 수조차 없었다.
얼마 뒤, 반항하던 박사의 힘이 완전히 빠졌다.
간헐적으로만 몸을 꿈틀대던 그녀의 눈꺼풀은 파리하게 떨렸고, 동공이 위로 쭉 올라갔다.
눈앞이 샛노래지다가 거뭇하게 변한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안 돼...’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될까?
그 생각을 끝으로, 박사의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