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5 교토삼굴
동굴 입구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로 된 처마에서 비를 피하던 내가 소리쳤다.
“실비아 씨! 언제 다 돼요!?”
“아 시끄러워! 그만 말해!”
“벌써 30분 째라고요!”
“5분만 더!”
짜증이 가득 담긴 실비아의 외침을 들은 나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불만을 표시했다.
뭔 놈의 샤워를 30분이 넘도록 하는지.
집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밖인데 빨리빨리 못하나...
흔들의자에 묻은 빗물을 청소하던 나는, 수건을 든 실비아가 상쾌한 표정으로 얼굴을 닦아내며 나오자 물었다.
“물 얼마나 남았어요?”
“두 통.”
대답을 들은 내가 황당한 듯 양손을 뻗었다.
“.... 두 통? 일곱 통을 가지고 왔는데, 다섯 통이나 썼다는 거예요 지금?”
“그만 칭얼대고 너도 씻어.”
“미치겠다 진짜... 난 양치질만 할래요.”
“샤워도 안 할 거면 왜 투덜거리고 난리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실비아 씨가 물을 다 썼으니까 못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두 통이면 충분하지 않아?”
“그럼 실비아 씨도 두 통만으로 샤워를 하셨어야죠.”
“난 머리카락이 길잖아.”
“아... 됐습니다.”
혈압이 오른 사람마냥 뒷목을 부여잡으니, 실비아가 키득거린다.
근데 너 어제 긴장해선 뻣뻣하게 잠을 청하지 않았냐?
지금 날 편하게 대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물론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이러는 경향도 없잖아 있겠지만.
꼼꼼하게 양치질을 한 나는, 실비아가 흔들의자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고 있자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날 본 실비아가 사과했다.
“미안해.”
“뭐가요?”
“샤워하는데 다섯 통이나 써서. 아꼈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쪼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잖아요. 됐습니다.”
“그럴 의도로 말한 거 맞아. 정확히 이해했구나? 역시 넌 똑똑해.”
헛웃음을 켠 내가 중얼거렸다.
“진이 다 빠지네... 확 그냥...”
“확 그냥 뭐? 어제처럼 덮치기라도 하시려고?”
그런 말을 하는 실비아의 얼굴은 무척 붉어져있었다.
그래! 그런 식으로 용기를 내란 말이야!
헛웃음을 켠 내가 그녀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덮치다니 뭔... 진짜 덮치는 게 뭔지 보여줘요?”
“노, 농담이야... 이제 돌아가자.”
“뭘 돌아가요. 운치도 좋은데 입구에서 경치나 구경하다가 갑시다.”
“.... 난 좋아.”
나도 네가 좋아.
그렇게 우린 가늘게 내리는 안개비를 바라보며 평화로운 그랜드캐니언의 전경을 감상했다.
“지혁아.”
한동안 말이 없던 실비아의 부름.
내가 대답했다.
“예.”
“여기... 자주 올 거야?”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오고 싶을 때마다 실비아 씨께 물어볼게요.”
“그래... 알았어.”
실비아는 의도적으로 아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아델에 대한 대화를 할 경우, 실비아는 죄책감에 못 이겨 ‘이제 그만하자.’거나, ‘우린 이래선 안 된다.’ 같은 말을 할 터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이럴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의 이 모호한 관계를 유지, 혹은 발전시키려고.
오늘부로 실비아는 아델과 서먹해질 것이다.
왜냐? 나라는 사람이 그녀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해있으니까.
어제 밤에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델의 목소리를 들은 게 조금 걸리지만, 이미 날 좋아하게 된 실비아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거다.
걱정거리가 있다면 양심에 가책을 이겨내지 못한 실비아가 모든 일을 실토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도게자를 박는 건데...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걸 방지하려고 생고생까지 해가며 호감도를 쌓은 거고, 남자 맛을 알려준 거다.
“비까지 오는데 어제와는 다르게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네요. 아침이라서 그런가?”
“그런가보지... 어? 지혁아! 저기 봐봐, 사슴이야.”
내 어깨를 마구 두들기며 호들갑을 떤 실비아가 가리킨 곳을 살펴보니, 과연 사슴 무리가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놈들을 빤히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노새사슴이네요. 그것도 무리를 짓고 있네?”
“약하니까 무리를 짓겠지. 본능이잖아.”
“그건 그래요. 하지만 개체수가 거의 없어 보기가 힘들다고 알고 있었는데... 촉수, 나방 마물이 모든 포식자를 처리해줘서 나타난 모양이에요.”
“마물이 본의 아니게 생태계에 도움을 준 거야?”
“아마도요.”
“한국 속담에 개똥도 약에 쓰인다는 말이 있잖아. 딱 그 꼴이네?”
개똥이라니. 지금 날 하찮게 취급한 건가?
어제도 순수 악이라고 칭하더니, 자꾸 신경 거슬리게 하네.
**
한국으로 돌아와서 실비아와 헤어진 나는, 요식업 프랜차이즈의 사장실에서 오랜만에 채보영을 만났다.
마지막 비스트 슬레이어인 스텔라 헤일리의 안부를 물어보고, 저번에 계획했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헌데 거기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스텔라의 동생이 사고를 치고 다닌다?”
“네... 학교에서 자꾸 스텔라한테 전화를 해요. 담임이 가정방문도 몇 차례 했는데, 전혀 고쳐지지가 않았구요.”
“무슨 사고를 치는데?”
“학교폭력, 흡연 등이요. 저번엔 대마초까지 어디서 구해와선 친구들이랑 했다고...”
“물이 좋지 않은 아이들과 어울리는가보군. 그런데 스텔라의 동생이 들어간 학교는 제법 좋은 곳 아니던가? 학군도 아주 좋은.”
왜 부모들이 자식들을 학군 좋은 곳으로 보내고 싶어 하겠는가?
이런 문제들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학군이 좋은 학교엔 불량학생들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규모가 매우 작은 편이었다.
사고도 다른 곳보다 덜 치고, 학구열에 불타는 동급생이나 선생님을 만나 마음을 고쳐먹는 경우도 많다.
학생들의 부모도 잘 사는 사람들이고, 요직에 앉은 사람들이 많아 학부모회의 입김이 아주 세다.
학교폭력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발 벗고 나서는 편. 입소문도 금방 퍼진다.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는 학교 측은, 뒷배가 전혀 없는 스텔라의 동생을 사고뭉치, 눈엣가시라고 생각할 터.
심지어는 마약까지 손댔으니 일사천리로 퇴학이나 전학처리를 할 텐데... 이상했다.
“아, 그게... 그렇기는 해요. 정학도 먹은 상태고요.”
“고작 정학이라고?”
“네...”
“ABC엔터 대표가 로비라도 했나? 아닌데... 신생 소속사 대표의 로비가 통할 학교는 아니잖아.”
보영은 지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표정엔 근심까지 서려있다.
그 모습을 보니 대충 그림이 나왔다.
“네가 나섰구나.”
“마, 맞아요...”
보영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다.
세계에서도 유명한 연예인이고, 그녀가 애지중지 키우는 연습생의 동생이라 사정이 통한 모양이다.
혀를 찬 내가 말했다.
“들키면 네 이미지가 왕창 깎일 텐데... 감수한 거야?”
“소, 송 대표님께서 스텔라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니까... 편의를 최대한 봐주려는 생각에... 죄송해요...”
“아냐. 잘했어.”
“근데 스텔라의 동생은 미국에서 모범생이었고, 그 덕분에 학군이 좋은 학교에 편입될 수 있었던 건데... 왜 성격이 바뀐 건지 이해가 안 가요.”
아마 잘생긴 얼굴, 적당히 큰 덩치가 한몫했을 것이다.
편안한 환경도 중요한 축을 차지했을 터.
골골대던 미국 생활과는 달리, 한국에선 자신의 누나가 노래에 엄청난 재능이 있고, 신생 소속사가 집까지 구해주면서 사활을 걸고 밀어주는 판국이다.
심지어는 채보영이라는 슈퍼스타가 개인교습을 해주기까지... 이러니까 미래 걱정이 전혀 안 들겠지.
자랑하고 싶기도 할 테고, 예전의 그 힘겨운 생활을 보상받고 싶었을 거다.
그런 상태에서 주변사람들이 우쭈쭈 해주니, 유혹에 넘어가 삐뚤어지게 된 모양이었다.
커피를 홀짝인 내가 방긋 웃었다.
“스텔라의 반응은 어때?”
“심란해하고 있어요. 동생을 달래도 보고 엄하게 꾸짖어보기도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는 착한 태도로 알겠다고 한다고...”
“그런데도 계속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면, 그냥 반성하는 척만 한다고 봐도 되겠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걔 동생이 지금 열아홉 맞지? 그럼 고등학교 3학년인가?”
“2학년이에요. 1년 꿇은 상태죠.”
“네가 사정했던 건 누가 알아?”
“교장 한 명이요. 하지만 교장과 긴밀히 지내는 몇몇 학부모들도 알고 있을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보영이 죄송할 일은 없었다.
그녀는 날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니까.
자신의 이미지가 깎이는 것도 감수하고 움직일 정도인데 어찌 나무랄 수 있으랴?
그 대상이 스텔라의 동생이라는 게 오류긴 하지만, 기꺼운 건 기꺼운 것이다.
고개를 가로저은 내가 말했다.
“수습해줄게. 네 이미지에 타격은 전혀 없을 거야.”
“네...? 어떻게요...?”
“죽은 자는 말이 없거든.”
안색이 무척 밝아진 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 감사해요...”
부하의 복지를 위해주는 마왕이라... 이렇게 착한 마왕님이 또 어디 있냐?
그러니까 더 잘해 이년아. 네 얼굴이 내 취향에서 조금만 벗어났다면 지금쯤 고문을 당하고 있었을 거야.
“마르셀라에게 처리해놓으라 할 테니까 이 이야기는 넘어가고, 스텔라의 실력은 어때?”
“가파르게 오르고 있어요. 솔직히 지금 데뷔해도 무리 없는 실력이에요. 제 전 매니저는 당장 데뷔시키자고 하지만... 제가 막고 있어요.”
“왜?”
“제가 조만간 WW엔터에서 나와 ABC엔터로 들어갈 예정이고, 이후 여러 콘서트를 열어 스텔라를 관객들에게 잠깐씩 소개시켜주려구요. 올드스쿨 느낌이 나긴 하지만 지금 하면 무척 신선할 거라고 생각해요. 스텔라의 이미지와도 어울리고...”
이건 보영의 의견에 따르는 게 맞다.
연예계는 나나 마르셀라보단 보영이 훨씬 더 잘 아니까.
“그래. 그건 네 생각대로 해.”
“감사합니다. 내일 여기로 스텔라를 데려올까요?”
원래는 슬슬 얼굴을 익히려고 했다.
하지만 스텔라의 동생이 친 사고를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아니. 그러지는 말고... 너 혹시 스텔라한테 나에 대해 말했어?”
“이름은 말하지 않았고,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고만...”
“잘했어. 이제부터 스텔라에게 내 이야기는 삼가.이만 돌아가서 평소대로 생활해.”
“네, 대표님.”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인 보영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플레어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사무실을 나가자, 나는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스텔라의 사고뭉치 동생과 보영의 로비를 알고 있는, 이제는 곧 뒈져 없어질 교장... 그리고 심란해하는 스텔라.
아주 좋은 계획이 생각났다. 그녀의 동생을 장기말로 이용하기 위한, 아주 좋은 생각이.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박사의 일탈도 있었고, 아델과 실비아의 사이를 무너뜨리는 일도 한창 진행 중이었으니까.
일을 많이 벌여놓으면 대가리가 아픈 것 정도는 유리아를 공략할 때 이미 학습했다.
지금은 이 두 가지 일을 먼저 처리하는데 집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