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3 밀회
그랜드캐니언의 전경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켠 실비아는, 동굴로 들어와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가 나긴 나는데... 그렇게 많이는 안 나네?”
“깊은 동굴이 아니어서 통풍이 잘 됐나보죠. 남은 냄새도 금방 제거할 수 있어요.”
“그럼 입구에 묻은 피만 치우면 되겠다. 그치?”
내가 죽인... 아니, 죽였던 척한 촉수마물의 흔적을 말함이었다.
“그건 냄새도 안 나잖아요. 굳이 치울 필요가 있을까요?”
“초록색 피는 징그럽잖아.”
그놈들의 어미를 죽인 사람이 넌데 징그럽다니...
어디서 요조숙녀인 척이야?
“이미 말라붙어서 지우기 힘들어요. 그냥 놔둬요.”
동굴은 피운 흔적이 있는 모닥불과, 옷을 말리느라 썼던 나무 건조대가 그대로 있었다.
누가 오가지 않았다는 뜻.
실비아 또한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 동물의 발길이 닿지 않은, 우리 둘만 아는 장소라는 것에 대해 야리꾸리한 기분을 느낀 게 분명했다.
구석에 큼지막한 박스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내가 말했다.
“준비부터 할게요. 바닥청소하고, 이부자리 깔고, 냄새 제거제 틀고, 식기 준비하고 하면 깜깜해지겠네요.”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어차피 다시 갖고 돌아갈 건데... 번거롭지 않아?”
“캠핑이 이런 맛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다시 갖고 돌아간대요? 오늘만 여기 있는 것도 아닌데.”
“응...?”
말끝을 흐린 실비아의 눈이 커졌다.
내 말의 속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 오늘뿐만이 아니라, 밀회를 즐기고 싶을 때마다 너와 여기 올 예정이다.
그러니까 찝찝하면 지금 말하렴. 네가 싫다고 하면 오늘로 끝내줄 테니까.
“왜 그러세요?”
“.....”
내 물음에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침묵하던 그녀는,
“아, 아냐. 바닥청소는 내가 할게.”
이내 상황 자체를 얼버무렸다.
오늘 이후로도 나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방증.
씨익 웃은 내가 말했다.
“어차피 바닥청소먼저 해야 뭐라도 하는데, 그냥 같이해요.”
“알았어. 근데 샤워는 어떻게 해?”
샤워? 샤워 중요하지.
너 아델한테도 운동 시합이 있다고 핑계 댔다며?
같이 땀나는 운동 좀 하자.
“물 많이 가져왔어요.”
“벌레는? 나 벌레 물리는 거 싫어하는데.”
“아... 퇴치제 가지고 왔어요.”
“아? 너 지금 짜증냈어?”
굽히고 들어가기 전엔 끝도 없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구나.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얼굴로 실비아를 올려다보았다.
“짜증 안 냈어요. 같이 바닥 치워요.”
“응.”
냅다 대답하고는 바닥의 잿가루를 치우는 그녀.
얼굴엔 희미한 미소마저 띄우고 있다.
날 놀렸나본데... 어이가 없네.
이부자리를 깔 바닥을 깨끗하게 치운 나는, 큼지막한 구스다운 침낭을 펼쳐 놓았다.
2인용 퀸 사이즈 침대만한 크기.
그걸 본 실비아가 내 눈치를 보았다.
“하, 하나밖에 없어?”
“예.”
난 따로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실비아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
아까의 장난꾸러기 같은 태도는 온데간데없어진 실비아를 보니, 작전이 잘 먹혀들어간 게 확실했다.
얼굴도 붉어져있네. 그러게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왜 까부냐?
“저기 있는 발전기 좀 입구 근처로 옮겨주실래요?”
대수롭지 않은 투의 내 말에, 실비아가 온몸을 한 차례 떨더니 정신을 차렸다.
“응? 아... 그냥 옮겨만 놓으면 돼?”
“네.”
“알았어...”
**
광활한 하늘에 야음이 찾아올 때쯤, 날씨가 굉장히 추워졌다.
캠핑 준비를 모두 마친 나는 실비아와 함께 동굴 입구에서 사이좋게 샌드위치를 먹었다.
분위기를 내려고 피워놓은 모닥불, 그리고 난로가 있긴 했지만 안쪽에 설치해놓아서 그런지 입구까지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때문에 우린 두꺼운 외투를 껴입은 채였다.
간이 흔들의자에 앉아있던 실비아.
내가 만든 쿠바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며 삼킨 그녀가 말한다.
“맛있다. 이거 어떻게 만들어? 아까 보니까 머스타드랑 햄, 치즈가 들어가던데... 맞아?”
“추가로 마리네이드한 고기, 피클, 버터를 바게트에 다 때려 박고 양면 그릴에 누르면 돼요. 버터는 바게트 겉면에도 발라줘야 하고요.”
“나중에 집에서 해먹어봐야겠다. 넌 이런 걸 어떻게 알았어? 캠핑 준비도 능숙하게 하던데... 원래 좋아했어?”
“그건 아니고, 요즘 세상 편하잖아요. 마물이 나타나기 전엔 평화롭기도 했고요. 이것저것 할 시간이 많았어요. 지금은 타이라트 때문에 바빠졌지만요.”
“그 순수 악 때문에 고생이 많네. 진짜 싫겠다.”
순수 악이라니... 그딴 미친놈들과 날 비교하다니 모욕적이군.
나는 너희들을 전부 타락시켜서 전 우주를 정복하겠다는 신념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상주의자라고 불러주라.
“실비아 씨도 놈 때문에 힘들었잖아요. 아이테르 에너지도 다 쓰시고.”
“맞아. 여기서 비오는 날 너랑 정말...”
뒷말을 흐린 그녀가 날 슬쩍 바라보더니, 말을 마무리했다.
“고생했지... 지금도 전부 기억나.”
“안 좋은 기억은 뇌리에 딱 박힌다는데... 그 때문인가 보네요.”
“뭔 소리래... 좋은 기억도 선명하게 각인되거든? 게다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이잖아. 잊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여기서 있었던 일이 좋은 기억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재미있었잖아.”
난 말없이 실비아를 슬쩍 쳐다보며 부드러운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
내 표정을 본 실비아가 황급히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 특유의 칙칙한 느낌은 잘 안 나네. 위기감이 전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비가 안 와서 그런가?”
“후자 같은데요.”
“비 왔으면 좋겠다...”
“기다려보세요. 조금 있으면 올 겁니다. 전 운이 좋거든요.”
“웃기시네... 여긴 원래 비가 잘 안 온다며? 이제 들어가자. 춥다.”
콧방귀를 낀 실비아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맥주를 들고 침낭 위에 철퍼덕 주저앉은 그녀는, 캠핑용 오븐에서 숙성되고 있는 고기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는 외투를 벗었다.
퍽 귀여운 모습이었다. 아델과 비교조차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대충 분위기도 무르익은 것 같은데, 슬슬 시작해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동굴 구석으로 가서 박스를 뒤적거렸고, 태블릿 컴퓨터를 하나 꺼내 실비아의 옆에 앉았다.
“영화나 한 편 봐요.”
“알았어. 너도 맥주 마실래?”
“네.”
**
아무리 도수가 낮은 맥주라 해도 많이 마시면 알딸딸해진다.
그리고 실비아가 현재 그 상태였다.
약간 홍조를 띤 얼굴로 자신조차 모르게 나한테 기다란 콧바람을 내뱉는 실비아.
난 우리가 마신 빈 맥주병을 동굴 한쪽으로 밀어놓고, 침낭 안으로 쏙 들어가 그녀를 당혹케 했다.
“.... 너 지금 뭐하냐?”
“앉아있으니까 허리 아파서요.”
“그럼 나는 어떻게 보라고?”
“실비아 씨도 들어와요. 날씨 춥잖아.”
“.....”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국 조심조심 내 옆으로 들어왔다.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 티가 나서 웃겼다.
난 몸을 비틀면서 자리를 옮겼고, 실비아와 딱 밀착한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잘 보여요?”
“응... 잘 보여...”
“근데 영화 재미없다. 다른 거 볼래요?”
실비아는 내 얼굴이 가까이 있으면 무척 소극적으로 변한다.
취기가 오른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살이 맞닿은 상태라, 평소보다 더욱 부끄러워하며 눈을 가만 두지 못했다.
“나, 난 재밌게 보는 중이었는데...”
“다른 거 봐요.”
“너 마음대로 해...”
만족스런 표정으로 대답을 들은 난 로맨스 영화를 틀었다.
그것도 초반부부터 야한 장면이 나오는, 19금 성인영화.
아직 내용을 모르고 있던 실비아는, 내가 태블릿에 눈을 두고 있자 안심했는지 금세 평온해졌다.
10초가량의 짧은 리더 필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될 때, 그녀가 물었다.
“무슨 장르야?”
“로맨스. 실비아 씨 달달한 거 좋아하죠?”
“그냥 뭐... 약간?”
약간은 무슨... 저번에 의정부에서 나랑 열띤 토론을 했던 건 기억 속에서 지웠나보네.
그때는 네가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어 그러려니 했겠지만, 지금은 받아들이는 마음 자체가 틀릴 거다.
누굴 좋아하는 상태에서 로맨스 영화를 보면 감수성이 훨씬 풍부해지거든.
영화의 초반부는 커플이 섹스를 하다가 헤어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남녀가 서로 물고 빨고 하는 장면을 보던 실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크흠! 하며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이내 조용해지더니, 가빠진 날숨을 내쉬며 내 귀를 간지럽혔다.
성적으로 흥분했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남녀 주인공이 싸우다 갈라지는 씬까지 본 실비아가 내 어깨를 콕콕 찔렀다.
“지혁아. 궁금한 게 있는데... 쟤들은 왜 헤어진 거야...?”
실비아를 돌아본 내가 대답했다.
“속궁합이 안 맞아서.”
“속궁합...?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중요하죠. 이것 때문에 헤어지는 연인들이 수두룩한데.”
“그래...?”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보니, 때가 됐구나 싶었다.
“잘 모르겠죠?”
“응, 몰라...”
“전희, 후희, 성기의 크기, 성교의 주기... 이 외에도 여러 요소가 있는데, 남녀 모두가 서로 만족한다면 속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요. 참고해요.”
“내, 내가 참고할 게 뭐가 있다고... 됐어.”
“됐다니요? 디바이스가 곧 만들어질 텐데, 어떻게든 충전해야죠. 마물과 안 싸울 겁니까?”
실비아가 입을 앙다물었다.
잠깐 침묵하던 그녀가 말한다.
“싸워야지... 하지만 남자를 만나는 건 신중해야한다고 생각해.”
“왜요?”
“새, 생각해봐. 아이테르는 좋아하는 사람과의 성적인... 행위를 통해 에너지가 충전되잖아. 급한 마음을 먹고 아무나 만나면 충전이 되겠어...? 마음도 없는데... 흐흠...!”
헛기침을 한 그녀가 태블릿을 슬쩍 흘겨보았다.
태블릿에서부터 큰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
현재 영화는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과 헤어진 상태에서, 다른 여자와 원나잇을 즐기는 씬이 재생되고 있었다.
음량을 완전히 줄인 내가 태블릿을 옆에 놓아두고는 몸을 실비아 쪽으로 완전히 돌렸다.
“저번에는 실험해보자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시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소심해졌죠?”
“.... 그땐 상황이 급박했으니까, 뭐라도 해보려고...”
“아이테르 에너지도 거의 없으면서 너무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도 급한 건 마찬가진데?”
“나더러 어쩌라고...”
“그때 제가 실비아 씨를 만져줬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가, 갑자기 뭔 소리야... 미쳤어...?”
“대답이나 해보세요. 도와주려고 하는 거니까.”
실비아의 목젖이 크게 꿀렁였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그녀가 오물거렸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래요?”
“응... 당시엔 그냥... 충전이 되나 안 되나 실험만 해본 거잖아. 뭘 느낄 틈이 없었... 헉!”
숨을 삼킨 실비아.
내가 돌연 그녀의 위로 올라탔기 때문이었다.
실비아의 머리 양옆에 손을 댄 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느껴보실래요?”
“.... 면상 치우지...?”
“저번에도 면상이라고 그러시더니... 얼굴이라고 해봐요.”
“면상 치우라고 했어...”
“얼굴이라고 해보라 했어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실비아가 눈을 부릅뜨더니 용기를 냈다.
“저, 절대 안 해...”
뜻을 굽히지 않는구나. 나쁘지 않아.
그 고집으로 날 아델에게서 빼앗으려 해줘라.
가소로운 듯한 미소를 지은 나는 실비아의 양손을 부드럽게 잡아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몸을 낮춰 그녀와 완전히 밀착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만한 거리.
실비아는 고양이 앞의 쥐 마냥 몸을 벌벌 떨었는데, 그 모습이 가련하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요염해보이기도 했다.
잠시간 그녀의 위태로운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됐었나보네요.”
이후 깍지를 풀려고 하는데, 실비아가 손가락에 힘을 꽉 주더니 날 붙들었다.
“다시... 한 번 실험해보자... 지금이라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아아... 이성마저도 저버린 채 내가 주었었던 쾌락을 갈구하는 이 모습.
세화, 유리아, 박사, 아델... 그리고 실비아도 다 이랬다.
볼 때마다 욕정이 솟구친다.
실비아는 이 핑계로는 모자랐는지 말을 덧붙였다.
“난 널 동료로서 진짜 좋아하니까... 나중에 남자를 만날 때, 오늘 받았던 느낌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아... 영화를 보니까 궁금해지기도 했고...”
“실비아 씨, 지금 취했어요.”
“취했어... 엄청 많이 취해서, 자고 일어나면 기억도 안 날 걸...?”
비밀로 하겠다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실비아와 코를 맞대려 할 때,
우르릉-!
바깥에서부터 웅혼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쏴아아아-! 하는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실비아가 깜짝 놀라는 틈을 타, 그녀의 귀에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거봐요. 난 운이 좋다고 했죠? 실비아 씨랑 있으면 항상 이래.”
“.... 이상한 소리 하지... 흐읏...!”
실비아가 얼굴을 파리하게 떨었다.
혀를 살짝 내민 내가 그녀의 귓볼을 핥고, 바람을 불어넣어서였다.
내 하체에서 실비아가 다리를 딱 붙이는 것이 느껴졌다.
실비아가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몸으로 꽉 누른 나는, 한손의 깍지를 풀고 그녀의 옆가슴에 손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