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2 잘못된 선택 #2
[유리아에요. 박사가 비밀리에 도움을 요청해서 현재 리옹에 와있는 상태에요.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마르셀라에게도 전달해놨어요. 대포폰을 하나 구해서 문자하고 있는데, 바로 버릴 예정이니 답장은 보내지 마세요.]
유리아의 문자를 본 나는 휴대폰 모서리로 옆쪽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박사는 현재 범죄자 심문과 국제기구의 조직개편 등을 하고 있다.
아니,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국제기구의 사람들과 대면한 상태로 토의하는 것도 아니라서 위험할 일이 전혀 없을 텐데,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도 비밀리에?
‘뭔가 있군.’
박사는 나에게 무언가를 숨겼다.
어제 박사가 전화로 말했던 ‘알아볼 일’에 대한 것 같은데...
무언가 켕기는 일이 있다고 봐도 좋겠군.
그 켕기는 일에 나 또한 포함되어있겠지.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나에게도 말하지 않을 정도니까.
‘하아... 제니... 왜 이러냐 진짜...’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해. 그냥 조직개편을 끝내고 몇 명 본보기로 사형시킨 다음 돌아오면 되잖아.
이러면 내가 널... 아니다, 나중에 유리아의 보고를 받아보고 결정하자.
그 알아볼 일이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유리아를 도우미로 부른 이상 박사가 뭘 하든 내 수중 안에 있다고 봐도 좋았다.
박사는 잘못된 선택을 한 거다.
퍼억!
그래, 지금 몰래 다가와선 애정 어린 힘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내게 특별한 마음을 품은 실비아처럼.
고개도 돌리지 않은 내가 말했다.
“때리지 마세요.”
그러자 발차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 실비아가 무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는 사람이 왔는데 돌아보지도 않냐? 인사를 했으면 받아줘야지.”
“인사? 아, 그렇죠.”
나는 실비아의 엉덩이를 정강이로 약하게 툭 차려고 했다.
하지만 한쪽 발을 드는 순간 디딤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등부터 넘어진 나.
빵 터진 실비아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내게 삿대질을 했고,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는 날 비웃었다.
“너 진짜 바보야? 애가 왜 이렇게 맹해?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하는 짓들은 죄다 어리숙하네...”
일부러 그런 거거든?
얼굴이 붉게 물든 내가 짜증을 냈다.
“그만 웃어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안 웃을 수가 있어?”
방글거리던 실비아가 내게 다가오더니 등을 툭툭 털어주며 말한다.
“머리는 안 다친 것 같네. 아깝다.”
“아깝다니... 그게 할 소립니까?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알았어, 미안해. 그러니까 그만 투덜거려줄래?”
엉덩이와 다리까지도 서슴없이 털어준 그녀가 내 등을 팍! 하고 쳤다.
“다 됐어. 가자.”
“예...”
“주눅들어있지 마. 그럴 수도 있지.”
쪽팔린 사람마냥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마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비아와 함께 여행가서 먹을 먹거리들을 사고, 푸드 코너에서 밥을 먹고 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빨리 지나갔다.
장을 다 본 우린 사이좋게 박스 하나씩을 들고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차 안에 박스를 넣어놓은 내가 말했다.
“타요. 태워다줄게.”
“그럼 동네 입구까지만 가줘.”
행여나 아델에게 들킬까 두려운가보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응. 그렇게까지 해야 돼.”
“뭐... 알겠습니다.”
차에 탄 내가 시동을 걸고 있는데, 안전벨트를 맨 실비아가 툭 내뱉듯 말한다.
“그리고 너 은근슬쩍 반말한다? 원래 네 살 차이는 겸상도 못한댔어. 나니까 봐주는 거지... 앞으로 조심해.”
“겸상도 못하긴 무슨... 여기가 무슨 조선시대야? 그리고 나이 많다고 자랑하는 겁니까?”
“농담 한 번 해봤는데 반응이 너무 격한 거 아니야?”
“하아... 실비아 씨랑 투닥거리면 진이 쭉 빠지는 기분입니다. 우린 진짜 안 맞아요.”
“엄청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대놓고 말할 정도로 편해졌구나. 좋은 현상이다.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악셀을 밟았다.
그렇게 의정부로 향하고 있는데, 실비아가 조심스런 투로 묻는다.
“내 디바이스는 얼마나 완성됐어?”
“상당히 많이요.”
“그래...? 진전이 없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너 맨날 아델이랑 데이트하잖아. 그래서 그냥 손 놓고 있는 줄 알았지.”
“회사에 들를 때나, 자기 전에나 항상 제작 키트를 갖고 다니면서 만들어요. 틈 날 때마다.”
그 말에 실비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룸미러로 그녀의 얼굴을 살핀 내가 가볍게 웃었다.
“조만간 좋은 소식 들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걱정했다고... 농담했는데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좀 마.”
“이번에도 농담이었어요?”
“응. 혹시 몰랐어? 너 같은 맹탕한테 농담한 내 잘못인가?”
마침 신호에 걸린 차.
브레이크를 밟은 나는 실비아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실비아 씨도 맹탕인데... 알고 계셨어요?”
얼굴이 무척 가까워지자 연구실에서처럼 당황해하는 그녀.
턱을 쭉 빼고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이거 보세요. 좀만 들이대도 얼굴 빨개지잖아. 맹탕이 아니라 숫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
“우, 운전이나 똑바로 해. 지금 파란불이야.”
터프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숙맥이 따로 없는 수준.
이래서야 나랑 제대로 놀 수나 있겠냐?
나는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시선을 다시 전방으로 돌렸다.
“알았어요.”
**
실비아를 내려주고 오랜만에 오피스텔에 들른 난, 세화와 다정한 애정표현을 마치고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부탁을 했다.
“내일부터 아델을 초대해서 한 이틀, 사흘 정도 재워줄 수 있어?”
“아델? 그러지 뭐.”
이토록 흔쾌히 승낙할 줄이야...
대의를 위해 감수해주기로 했구나. 이 마왕님은 왕비의 품격을 갖춰가는 세화가 너무 좋아요.
“웬일이야? 화낼 줄 알았는데...”
“아델 귀엽잖아. 날 잘 따르기도 해서 좋아.”
호의가 담긴 목소리. 처음 만날 때 짜증을 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몇 번 만나지도 않아놓고 호감을 가진 건가?
설마 세화가 아델의 순진무구함과 신성력에 영향을 받고 있나?
라는 생각들을 하던 나는, 이어지는 세화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아 언니도 없는데, 갖고 놀면 재미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변하지 않았구나.
“그래 뭐... 재미있게 놀면 좋고...”
“멀리 떠나면 되지? 제주도나 가볼까?”
제주도라... 옛날 생각이 풀풀 나는구나.
“제주도면 괜찮겠네. 실비아도 초대해.”
“왜? 너 실비아 꼬실 계획 아니었어?”
“맞아. 실비아는 분명 거절할 거야.”
“예의상 말해놓으라는 거구나. 알았어. 근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박사가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모양인데, 어떻게 처리할 거야?”
“딱히 계획은 없어. 유리아가 박사를 지켜볼 텐데, 일이 끝나면 보고부터 듣고 나서 결정하려고.”
그 말에 세화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
내가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계획이 없다고 말은 해도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처럼 보여서.”
“내가?”
“응. 박사는 그냥 풀어두기엔 불안요소가 많잖아. 이번 일로 확실해진 것 같은데?”
“뭐... 그렇긴 하지. 이 얘기는 그만하고 들어가자. 오랜만에 같이 자야겠다.”
난 세화를 번쩍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오랜 시간 못했던 만큼 많이 사랑해줘야지.
**
“지혁 씨. 죄송한 이야기를 드려야겠네요.”
아휴... 하는 귀여운 탄식을 터뜨린 아델.
안경을 고쳐 쓴 내가 성경책을 덮으며 물었다.
“뭡니까?”
“세화가 저를 초대했어요. 제주도 별장에서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물놀이도 하자고 하더라구요. 오늘 저녁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서 며칠간 지혁 씨를 못 볼지도 몰라요.”
“아니, 그런 이야기가 있으면 미리 해주시지 않고... 놀 계획도 다 짜놨는데... 게다가 이 추운 날에 무슨 물놀이입니까?”
인상을 마구 구기며 서운한 티를 팍팍 내자, 아델이 다가와 내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세화가 이제 바빠진다고, 자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럼 저도 갈게요.”
“그건 곤란해요. 여자들끼리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어서요.”
“여자들끼리? 그럼 실비아 씨와 유리아 씨도 가는 건가요?”
“유리아 언니는 해외여행 중이시래요. 또 실비아 언니는 초대를 받으셨지만, 운동 시합이 있다고 하면서 거절했어요.”
헛웃음을 켠 내가 말했다.
“네 명이 다 모이는 것도 아닌데... 미루고 다음에 가요.”
“세화가 이제부터 바빠진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친목을 다질 수 있을지 몰라요. 이틀에서 사흘 정도만 있다 올게요. 그때까지 보고 싶어도 참을 수 있지요?”
실비아랑 놀면서 아주 잘 참을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그냥 저랑 놀아요. 약속은 취소하고.”
“지혁 씨. 세화는 같은 비스트 슬레이어 동료인데, 함께 전투할 때를 대비해서라도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태 매일 지혁 씨와 함께 있었잖아요. 저를 너무 옭아매려 하면 안 된답니다.”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나긋나긋, 자신이 선생님이 된 것 마냥 날 달래주려는 아델을 보니 웃겨서 미칠 것 같았다.
속여서 미안하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만 쏙 빼놓고...”
“자, 아 하세요.”
“진짜 너무하네...”
투덜거린 내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아델이 민트향 사탕을 하나 꺼내 입 안에 넣어주었다.
그걸 와드득거리며 씹는 날 바라보던 그녀가 활짝 웃으며 날 안는다.
하지만 체구가 작아서 오히려 내게 안긴 꼴이 되었다.
“이번 여행만 다녀오면 상을 드릴 거예요.”
“.... 상이요?”
“네. 저를 잘 기다려주셨으니 당연히 내려야지요. 내용은 비밀이니까 무슨 상이냐고 묻지는 마셔요.”
뭔가 야한 일을 해줄 것 같은 느낌인데...
나는 마지못한 척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혁 씨의 마음이 심란하니,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어요.”
“예...”
이후로도 아델은 한참동안 날 위로해주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날 보며 기꺼워하기도 했다.
이렇게 삐친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가끔 써먹어야겠다.
아델과 밥을 먹고, 짐 싸는 것도 도와준 뒤 그녀를 공항에 데려다준 나는, 차에 다시 타자마자 실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지금 어디에요?”
-운동 중.
“아델이 세화랑 여행 간다고 하던데... 들었죠?”
-들었어. 지금쯤 출발했을 걸?
“제가 방금 공항에 내려다줬습니다. 우리도 내일 출발하죠. 캠핑도구 같은 건 제가 다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옷 여벌만 챙겨놔요.”
-내, 내일...? 그랜드캐니언엔 한동안 비가 안 온다고 했는데...
확실히 비가 오는 날 여행을 가자고 하긴 했었지.
근데 너 나랑 여행가고 싶어서 세화의 초대를 거절했잖아.
지금이 기회인 것도 알고 있잖아. 일기예보까지 찾아볼 정도로 기대하는 중이면서 왜 튕기고 난리야? 최소한의 양심이냐?
“우리가 있었던 날이 특별했던 거고, 원래 거긴 그래요. 내일 새벽 다섯 시에 연구실에서 만나요.”
-그렇게 일찍 가려고...?
“시차 때문에 도착할 즈음엔 미국은 저녁일 겁니다.”
-그렇지... 근데 나 텐트 칠 줄 모르는데... 너 혼자 칠 거야?
“텐트를 왜 쳐요. 우리 아지트인... 동굴이 있는데.”
나는 뒷말을 할 때, 목소리를 가라앉히면서 약간 비밀스런 어감으로 말했다.
실비아의 양심을 콕콕 찌르면서, 동시에 기대감을 부풀리려고.
그리고 그 효과가 먹혀들었는지, 휴대폰 너머로 실비아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동굴...?
“애초에 거기서 놀자고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기억 나... 알았어. 내일 봐.
“시간 맞춰서 오세요. 일찍 주무시고.”
-너나 늦지 마. 끊는다.
“예.”
휴대폰을 조수석에 휙 던져놓은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다. 이제 밀회를 즐기면서 날 향한 실비아의 마음을 잔뜩 키워놓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