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221화 (221/471)

EP.221 잘못된 선택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 걱정했잖아.”

-미안해. 그랜드캐니언에서는 아무 일 없었어? 마물이 엄청 많았는데...

휴대폰 너머에서 박사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고생은 조금 하긴 했는데, 잘 빠져나왔어. 대체 뭘 하고 있는데 아직도 리옹이야?”

-아... 심문이랑 조직개편을 하느라고... 엄청 바빴어.

“조직개편?”

-국제기구에서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을 색출해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해. 이참에 깨끗한 사람들을 앉혀놓으려고. 뒷조사를 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려. 따로 알아볼 일도 있고...

너무 깨끗한 놈들만 남으면 재미없는데...

비상용 말로도 쓰기가 껄끄럽고.

마르셀라를 시켜 몇 명의 죄를 싸그리 지우라고 해야겠다.

그나저나 뒷조사라니,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박사를 보니 뿌듯해 미치겠다.

“따로 알아볼 일이라니?”

-있어. 돌아가면 얘기해줄게. 며칠 걸릴 것 같아. 나 또 일하러 나가봐야 돼요. 밥 잘 챙겨먹고... 틈틈이 전화할게. 정말 다치지는 않았던 거지?

“안 다쳤어. 걱정하지 말고 일 열심히 하고 와.”

-응. 끊을게.

전화를 끊은 난 히죽 웃었다.

내가 죽을 뻔했던 일이 큰 충격으로 다가와서 이러한 일들을 하는 모양.

기특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영 별로여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피로에 찌든 듯한데... 돌아오면 영양이 가득 담긴 음식이라도 만들어줘야겠다.

그렇게 다시 디바이스 제작에 몰두하던 나는,

“뭐하세요?”

왼쪽 어깨에서 아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놀랐다.

움찔한 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이요. 연구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하셨던 건가요?”

“예... 집중하고 있느라...”

“사랑하는 사람이 왔는데도 모르다니... 실망이에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

반성하는 표정을 지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의 얼굴을 양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에 진한 뽀뽀를 해주었다.

눈을 감은 채로 키득거리던 아델은, 입술을 떼어내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어주던 내가 물었다.

“오늘은 머리를 안 올렸네요? 색다르긴 한데 이유가 있나요?”

“지혁 씨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네! 목 뒤에 키스마크를 만들어놨잖아요.”

“남들한테 보여주기 창피하다?”

그 말에 아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혁 씨! 제가 앞서 생각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요!?”

뭘 앞서 생각하지 말래... 보여주기 창피한 거 맞잖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는 의견 피력도 못하나요?”

“지금 따지시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조금 억울해서...”

“징계가 끝나면 마음껏 피력하도록 하셔요!”

유치한 핑계를 대면서 징계기간을 연장할 생각이면서, 말은 잘해요.

“알겠습니다.”

“좋아요. 마침 징계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지혁 씨에게 추가로 내릴 징계를 결정했어요. 징계라기보다는 상이에요. 그러니 저의 넓은 마음씨에 고마워하도록 하세요.”

“상이라... 뭔가요?”

“지금부터 의정부 근처에 로사리오 님을 모실 수 있는 신전을 하나 만드는 것이랍니다. 현대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교회나 성당과 비슷한 건물로 올리는 거예요. 어떤가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지요?”

뭐라고...? 기분이 더럽기만 한데...?

로사리오교의 신전이라... 순순히 만들어주면 로사리오가 강림해서 나한테 천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또한 신전이 있다면 이제부터 흔들릴 아델의 마음이 다잡아질 것 같으니, 무조건 거절해야 한다.

불안요소는 없애버려야 돼.

“포교활동을 하실 생각이로군요.”

“맞아요. 지혁 씨를 공식적인 신도로 임명할 계획이기도 하니, 오늘부터 건설사를 알아보세요.”

“저... 아델. 아델의 의견은 저도 찬성하지만, 기간을 좀 미룰 수는 없나요?”

“미루다니요?”

“요새 불경기라서 본부 유지비가 빠듯한 실정이라... 회사를 몇 개 팔아야할지도 모릅니다.”

아델이 입가에 손을 올렸다.

“그, 그런가요...? 상황이 많이 안 좋나요?”

“허리띠를 졸라매야할 수준은 아니지만 별로긴 합니다.”

“그렇다면... 규모를 줄여도 되는데... 한 평짜리 신전이어도 돼요...”

곧 죽어도 신전만큼은 포기할 수 없나보다.

로사리오가 그렇게 좋냐? 서운하게 하지 마라.

“한 평...? 로사리오 님을 모시는 신전이 고작 한 평이라니요... 지구의 가장 낡은 교회나 성당도 그 정도 규모는 아니에요. 저는 지구에 들어올 로사리오교의 첫 신전이 최고의 시설을 자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귀가 솔깃하지?

심각한 표정을 지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신전을 짓는 거, 으리으리하면 좋잖습니까. 나중에 신도들이 늘면 여러 신전이 지어질 텐데, 본가가 분가보다 규모가 작으면 포교활동에 어려움을 겪어요. 사정이 나아지면 꼭 건설사에 의뢰를 발주할게요.”

“로사리오교는 물질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을 더 중시하는데요...? 으리으리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시설이 좋지 않다고 투덜대는 신도라면 제 쪽에서 거절할 거예요.”

“물론 믿음이 가장 중요하죠.”

나는 정답이라는 듯 활짝 웃는 아델을 잡아끌고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이후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중에 같이 진지한 고민을 해봐요. 지금은 시기가 정말 안 좋습니다.”

내 심란한 표정에 홀라당 넘어간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요... 아쉽지만 연기를 허가하겠어요.”

이렇게 순진해빠졌는데 신전이라니... 네 입장에선 아주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구나.

그딴 쓸데없는 것 따윈 집어치우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자.

그냥 내가 주는 쾌락에만 신경 써.

너 착하잖아. 내 말 잘 들어야지?

‘또 이런 거지같은 생각을 하기 전에, 실비아와의 여행을 앞당겨야겠다.’

신성력이 아델의 몸에 자리하고 있는 이상,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악의를 넣지 못한다.

감지될 것이 뻔하기 때문.

아주 골치 아픈 힘이 아닐 수 없으나, 분명히 약점은 있다.

그건 바로 아델의 감정... 즉, 마음이다.

로사리오의 가르침을 굳게 따르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내 쪽으로 돌리는 일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모자랐고, 그래서 실비아를 끌어들였다.

아델이 가장 믿는 그녀와 이간질을 시키고 다투게 하여 악한 마음을 심은 다음, 때가 됐다고 판단이 서면 중화시킨 악의를 아이테르에 넣어볼 생각이었다.

이때 악의와 아이테르가 동화된다면? 신성력 때문에 전전긍긍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다.

@@

-나 진짜 아니라니까!? 비리는 저지른 게 맞아. 그건 인정하지. 해먹은 돈만 수천억 유로야. 하지만 그 미친 괴물들과 연대라니... 그 정도로 떨어지지는 않았어!

박사는 모니터 너머로 처절하게 자신을 변호하는 피에르 이사를 주시했다.

지금 보고 있는 비디오는 피에르 이사를 체포한 다음 날에 심문했던 녹화본이었다.

그의 무죄를 입증해주기 위해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마물과 연대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껏 저지른 비리 때문에 죽어 마땅한 인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미 구형까지 끝나 사형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그의 비디오를 돌려 보는 이유는, 뭔가 켕기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이상해...”

피에르 이사의 증거는 초반엔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희미했다.

점조직처럼 여기저기 퍼져있는 퍼즐을 끼워맞추니 명확해졌고, 그 덕에 그와 인터폴 적색수배자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뿌듯해야할 일.

허나 박사는 자신이 속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게 잘 짜인 각본 같다고 해야 할까?

심증밖에는 없었지만... 어쩌면 피에르 이사와 적색수배자들은 배후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정말 억울해하면서 발광을 한 것에 넘어간 게 아니라, 느낌이 그랬다.

누군가가 피에르 이사를 욕받이로 내세운 것 같았다.

‘아델과 싸웠던 마물이 그랬지... 우린 타이라트에게 속고 있다고.’

물론 마물의 말은 믿으면 안 된다.

허나 지금껏 일어났던 사건 몇 개의 중심에 지혁이 관계되어있는 것이나,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타이밍 좋게 나타난 마물들이나...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타이라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상황이 너무 공교로웠다.

비디오를 끈 박사는, 이번 사건의 증거물들을 전부 띄워놓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 전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도 살펴보았다.

그렇게 초창기의 가장 굵직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시리아 사건을 뒤져보고 있던 박사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혁은 자신의 허가도 없이 인류를 위해서 시리아에 잠입했고, 잡혀서 봉변을 당할 뻔했다.

이럴 정도로 특출난 사명감을 가지고 있던 그였는데... 왜 인간들을 혐오하게 됐을까?

옛날의 지혁은 절대 꺾이지 않을 사람이었다.

확실했다. 자신이 괜히 그를 조수로 삼은 게 아니었다.

똑똑한데다 신념이 굳건하기까지 해서 동료로 들였다.

물론 그 일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가치관이 뒤바뀌기엔 충분하다.

인간들에 대해 토론을 나눌 때, 지혁이 직접 이 일이 컸다고 말도 하긴 했었다.

허나 지혁은 시리아 사건 이후로도 인간들을 위해 움직였다.

흔들리긴 했을지언정 꺾이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자신과 제대로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정의로운 사람이었는데, 왜 변했을까?

‘그때 지혁이는... 세화랑 만나고 있었지.’

마침 세화도 그때를 기점으로 성격이 조금 바뀌었었다.

시리아 사건이 지나고 얼마 뒤 사자처럼 생긴 마물이 나타났었다.

당시 세화는 놈을 죽이기 전에 불쌍하다고 하며 머뭇거렸다.

당시엔 세화가 힘들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넘어갔지만, 변신한 상태라 정의감도 투철할 텐데 그런 말을 하다니...

이뿐만이 아니다.

이후로도 세화는 인간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였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확실히 이상했다.

혹시... 세화가 외부의 어떠한 영향을 받아 힘들어했고, 그걸 지혁에게 토로한 건 아닐까?

그에 영향을 받은 지혁이 세화의 마음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들을 혐오하게 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마물들의 출현이 중간에 잠깐 뜸해진 적이 있었다.

그 타이밍에 시리아 사건이 일어났고, 그 이후로도 한참 조용하다가 다시 마물들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공백의 시간동안 타이라트가 어떠한 계획을 획책했고, 자신들은 놈의 계획에 넘어갔을 수도 있다.

그 계획이란 바로 분열로 인한 반목.

만약... 만약 타이라트가 무력으론 안 될 것 같으니, 정의로운 사람들의 가치관을 서서히 타락시키려 하고 있다면?

타이라트가 그들을 이용해 지구를 분열시킬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나타나는 마물들은 지구를 잠식하기 위한 눈속임이라면?

‘내가 지금 조현병이 도졌나...? 망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정리해보면 가능성이 있는 망상이다.

알아볼 가치는 충분했다.

타이라트는 아주 비열한 마왕이니,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좋다, 지금 이 가설이 사실이라고 쳐보자.

지혁과 세화는 놈의 손에 놀아나, 자신들조차 모르는 사이 가치관이 바뀌었다.

박사 자신 또한 지혁에게 영향을 받아버렸고, 그로 인해 객관적인 눈으로 상황을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도움이 필요했다. 타이라트의 간계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사람의 도움이.

쾅!

노트북을 세차게 닫은 박사는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하는 신호음이 지나가고 얼마 뒤,

-여보세요?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사가 말했다.

“새벽에 미안해. 자고 있었니?”

-아니요. 늦게 일어나서 잠이 안 오네요. 근데 목소리가 왜 그러세요? 뭔가 다급해보이시는데...

“큰일이 생긴 것 같아. 네 도움이 필요해.”

-알겠어요. 지금 어디세요?

“프랑스, 리옹이야. 전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해서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박사님 명령인데 당연히 도와야죠. 당장 달려갈게요.

생각했던 가설이 사실이라면, 타이라트로 인해 왕국이 멸망하고 부모님이 죽은데다, 인간들을 생각하는 마음까지 충만한 유리아는 현 상황에서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녀는 엄청난 고초를 겪고 극복했던 만큼, 멘탈 하나만큼은 비스트 슬레이어 중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지혁과의 관계 또한 그저 동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며, 접점마저도 거의 없어 간계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테지.

설령 요새 자주 붙어 다니는 세화가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타이라트가 관계되어있다고 말만 한다면 곧바로 마음을 다잡을 것이다.

가설이 사실이 아니라 치더라도 유리아와 움직여야 한다.

그녀는 마물들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만큼 지금부터 알아볼 일에 큰 도움이 되고, 인간들에게 적의도 없어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니까.

“고마워. 지금 리옹과 가장 가까운 포탈에서 만나. 주변은 정리해놓을게.”

-네, 박사님.

“아, 그리고 비밀리에 움직여줘. 무슨 말인지 알지?”

-이해했어요.

믿음직한 유리아의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은 박사는, 제발 자신의 생각이 그저 망상, 기우이길 바라며 외투를 챙겨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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