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7 자라나는 의심의 싹 #3
“지혁 씨... 몸은 어떠세요?”
“좋습니다. 다 정상이에요.”
“다행이네요...”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 말투.
운전을 하던 나는, 빨간불에 걸리자 브레이크를 밟고는 아델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보여요.”
“있어요... 실비아 언니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요?”
“자꾸 뒷목을 만지시면서 제 눈을 피하고...”
아델이 겁먹은 얼굴로 어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두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난 속으로 끅끅댔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실비아의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녀는 무척 당황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분위기를 무섭게 잡고 아델을 쫓아냈을 테고.
연기하기 힘들지? 그 마음 다 안다.
“실비아 씨는 그랜드캐니언에서 절 챙기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마물에게 부상을 입기도 했고요. 그 때문에 심신이 조금 지친 것 같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는데요...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건 설명이 안 돼요... 대체 왜 그럴까요?”
“글쎄요... 심리적인 충격 때문이 아닐지...?”
“혹시 그랜드캐니언에서 다른 일은 없었나요?”
“말씀드린 일 외엔 없습니다.”
“네에...”
나는 불안해하고 있는 아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과하게 챙겨주는 티를 내면 안 된다.
괜히 찔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평소대로 하는 거다.
레스토랑에 들른 우린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나는, 아델에게 업무전화를 한다며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빠져나와 실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실비아 씨.”
-안녕. 왜 전화했어? 지금 데이트 중 아니야?
“할 말이 있어서 잠깐 빠져나왔습니다. 어제 대체 무슨 행동을 했길래 아델이 걱정을 합니까?”
-.....
얼마간 침묵하던 실비아가 면목이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뒷목을 자꾸 만졌나봐... 그... 네가 새긴 흉터 때문에...
내가 새긴 흉터라... 뭔가 꼴릿하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발정이라도 났나 싶다. 저녁에 아델과 힐링해야겠어.
“저더러 미덥지 못하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죠?”
-.... 나야.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아델에게 의심을 사십니까? 이러면 실비아 씨만 곤란해져요.”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너나 잘해!
버럭 화를 내는 실비아.
내 어감이 서운했나보다.
“정말 걱정돼서 말씀드리는 건데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저는 잘하고 있어요.”
-너 어제 내 뒷목 치료했어? 아니잖아.
“그건 제가 깜박해서...”
-그런데 잘하고 있긴 무슨! 네가 흉터를 없애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그리고 아델은 그냥 날 걱정만 하는 거니까, 괜히 불안해하지 마.
지금 불안해하고 있는 게 누군데?
난 걸려도 아주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단다.
“책임전가를 하시는 거예요? 이거 실망스러운데...”
-맞는 말이잖아.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의료기기 사용법이나 알려줘.
스스로 키스마크를 지우려고 하는 것 같다.
알려줄 수는 없지. 넌 쫄린 상태로 하루 정도 더 있어야 돼.
“의료기기는 왜요?”
-흉터 지울 거야.
“미숙련자가 만지면 큰일이 날 우려가 있고, 기기는 현재 많은 치료를 한 뒤라 의료용 물질이 다시 풀어질 때까지 기다려줘야 해요. 내일 아침에 연구실로 오세요. 그때 치료해드릴 테니까.”
-오늘은 안 된다는 소리야?
“네. 어쩔 수 없어요.”
-하아... 진짜 미치겠네... 대신 내일 꼭 치료해줘. 알았어?
마지못해 승낙하긴 했지만 심란해하는 것이 여기까지 전해질 정도다.
사실 거짓말인데... 의료기기는 잘 작동되는데...
골려먹는 재미가 쏠쏠하구나.
“저도 들키면 난처하니 무조건 치료해드릴게요.”
-그래... 지금 어디서 데이트해?
“양식 레스토랑에 왔어요.”
-알았어... 아, 그리고 통화목록은 꼭 삭제해. 알지?
“알죠.”
-재미있게 놀아.
“예,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은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내며 화장실을 나왔다.
**
식사 후 평범하게 영화관 데이트를 마친 아델과 나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거리를 산책했다.
그러다 어느 높은 건물 꼭대기에 있는 큼지막한 전광판에서 뉴스가 나오자 발걸음을 멈췄다.
[속보입니다. 세계연합 프랑스 지부의 이사진이자, 최근 인터폴의 사무총장 직을 위임받은 피에르 이사가 인간형 괴물과 접촉했다는 증거를 포착했습니다. 피에르 이사는 현재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현재 프랑스 리옹에 구금되어있는 피에르 이사는, 인터폴의 적색수배자 다섯 명과 긴밀히 협력해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괴물들의 확장 기지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장비에는 최신식 기술이 집약되어있어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그랜드캐니언에 있던 여러 괴물은 새로운 비스트 슬레이어인 셀린이 전부 처리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관계자를 체포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제니퍼 캐시 박사는, 세계연합이 당장 부패한 자들을 쳐내지 않으면 비스트 슬레이어 본부는 독립적인 기관이 될 것이라고,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라고 천명하며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아나운서의 정확하고 빠른 딕션을 듣던 아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저놈들로 인해 그랜드캐니언에서의 일이 숨겨졌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이는 모두 나와 마르셀라가 획책한 일이었다.
독점욕이 많은 박사의 눈을 돌릴 겸, 아델에게 인간에 대한 불신의 싹을 자그마하게 심어주기 위해서.
피에르 이사라는 놈이야 뭐... 이번 일과 관계는 없지만 원래 부패한 놈이다.
갖고 있는 이미지가 나락인데다 여러 정황증거까지 확실해서, 억울함을 호소해봐야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
세계연합은 뿔난 박사를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일을 처리할 거다.
아마 적색수배자들에겐 사형을, 피에르 이사에겐 무기징역 이상을 구형하겠지.
그러게 착하게 살지... 그랬다면 다른 놈을 집어넣어줬을 텐데.
나는 패닉에 빠져있는 아델의 어깨를 감쌌다.
“안타깝네요.”
“.... 저건 말도 안 돼요... 같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저런 파렴치한 일을... 세계연합이라는 정의의 기관 소속이면서 마물과 협력이라니요... 믿고 싶지 않아요... 거짓 보도 같아요.”
상황을 보니 아주 잘 먹혀들어간 것 같구나.
허나 아델은 이런 사건을 몇 개 터뜨린다 해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로사리오라는 거대한 존재가 그녀의 마음을 다잡아주기 때문이다.
‘내가 로사리오의 역할을 대신해야 해.’
아델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존재는 로사리오가 아니라, 내가 되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녀의 가슴속에 자리한 로사리오를 끌어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써주지.
“저도 믿고 싶지 않지만... 이런 부조리한 일은 많이 일어납니다.”
“지혁 씨는 저 사건의 당사자...!”
빼액 소리를 지르려던 아델은, 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진정시킨 내가 소곤소곤 말했다.
“여긴 길거리입니다. 큰 소리로 말씀하지 마세요.”
“아, 그렇죠...”
긴장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 아델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 사건의 당사자이시면서, 어떻게 이리도 태연할 수 있지요? 지혁 씨는 마물에게 죽을 뻔했다구요... 그런데도 안타깝다는 감상이 끝인가요? 저는 분노로 온몸이 떨리는데...”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요. 주동자도 체포됐고요. 마물과의 협력 건은 박사님이 돌아오시면 자세히 알아볼 테니...”
“지혁 씨는 정말 바보로군요...! 그런 낙천적인 성격으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어요!”
누가 누구에게 충고를 하는지... 어이가 없네.
대소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낸 내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러자 아델이 내 품에 안겨왔다.
지금의 조언이 퍽 감동이었던 모양.
저 하늘에서 빈둥거리고 있다가 신탁을 내릴 때만 어슬렁어슬렁 내려오는 로사리오보다, 항상 네 옆에 있어주는 내 말을 더 신용해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마음이 아파요... 지혁 씨도 그러시나요?”
“물론 아프죠. 인류를 배신하고 마물의 편에 붙은 사람이라니... 끔찍합니다. 하지만 힘이 있는 저희는 올곧은 신념을 고수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바뀔 수 있어요.”
“.... 지혁 씨는 배울 점이 정말 많은 교도에요. 항상 옆에 있으면서 절 보좌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마왕님은 저딴 인간들보다 마물을 희생시켜서 슬프단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충전이나 할까?
아델의 등을 토닥여준 내가 물었다.
“아이테르는 얼마나 남았죠?”
“아... 어제 확인해봤는데 42퍼센트가 남았어요...”
많이도 썼네. 뿌듯하다.
“그렇군요. 이제 그만 갈까요?”
“벌써 돌아가나요...? 하긴, 뉴스를 보고 충격이 크셨을 테니 이해해요.”
누가 돌아간대? 호텔 갈 거야.
**
[22층입니다.]
나는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아델의 손을 잡고 복도 끝으로 향했다.
그녀는 차가 호텔로 들어섰을 때부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리셉션에서 스위트룸을 결제할 때까지도 말이다.
부끄러워하기만 하고 딱히 만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기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부감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아델을 위해 일부러 벨보이나 지배인의 안내를 받지 않은 나는, 카드키로 스위트룸을 열었다.
문을 여니 모던한 인테리어로 고풍스런 분위기를 낸 거실이 보였다.
방 안에 들어선 아델은 둘만의 공간에 들어서자 진정이 되었는지, 지금까지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저... 지혁 씨.”
“예.”
“오, 오늘... 자고 갈 건가요...?”
“아델이 원하면요.”
“그, 그렇다면 조금만 쉬었다가 의정부로 돌아가지요... 실비아 언니가 걱정되니까요...”
“알겠습니다.”
순순히 나온 대답에 안심한 아델이 조심조심 소파로 걸어가 앉더니 말한다.
“룸서비스로 딸기 수플레를 시키세요...”
“전화기는 아델 바로 옆에 있는데요?”
“저는 지혁 씨에게 시키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군말 말고 하세요...”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룸서비스를 주문하고 아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심려가 큰 표정을 지었다.
“자리가 조금 불편하신 것 같은데, 수플레만 먹고 그냥 돌아갈까요?”
“누, 누가 불편하다고 했지요? 제가 분명히 앞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지금 징계를 받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신 건가요?”
“안절부절 못하고 계셔서 걱정이 든 것뿐입니다. 왜 그러시는지...”
“그야...”
아델이 숨을 훅 들이켰다.
이제 일어날 일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쑥스럽나보다.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 가슴이 거북해서 그런 거예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히죽 웃은 나는 검지와 중지를 붙여 아델의 심장 근처를 약하게 눌렀다.
“흣!”
가슴골 윗부분에 손가락이 닿자 깜짝 놀라선 몸을 달싹이는 그녀.
항상 느끼는 건데 아델은 리액션이 참 찰지다.
인자한 얼굴을 한 내가 물었다.
“여기가 거북하신 건가요?”
“아니요...”
“그럼 여기?”
가슴 사이를 가로지른 손가락이 밑가슴 부근에 자리한 명치를 지그시 누르자, 아델이 내 옷자락을 꽉 잡는다.
“지, 지혁 씨, 먼저 수플레부터 먹고... 했으면 좋겠는데에...”
“속이 거북하다면서요. 상태를 체크해보려는 겁니다.”
“.... 가, 갑자기 괜찮아졌네요... 아까 그 뉴스를 틀어보셔요. 룸서비스가 올 때까지 집중해서 봐야겠어요...”
내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며 저리 말하는 아델을 보니, 오늘도 정말 재밌을 것 같다.
오늘은 제주도에서보다 훨씬 높은 수위에 도전해야지.
여태 너만 쾌감을 느꼈는데, 아주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이번엔 나도 만족시켜줘라.
“정말 괜찮아졌어요? 솔직히 말씀하셔야...”
“괜찮아졌다니까요...? 절 못 믿으시는 건가요?”
“아뇨, 당연히 믿죠.”
아델의 몸에서 손을 떼어낸 나는 리모컨을 찾아 TV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