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5 자라나는 의심의 싹
“.....”
“.....”
한 마디 말도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리.
현재 그랜드캐니언엔 녹색 핏덩이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인분이 촉수마물들을 완전히 녹여버린 것이다.
침대로 쓰던 큼지막한 잎사귀를 이어 붙여 우산삼아 쓰고 걸어가던 나는, 중간중간에 실비아의 발목을 흘끗거렸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실비아가 말한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네 상처나 신경 써.”
“저도 괜찮아요.”
“그래.”
이 대화를 끝으로, 우린 또 오랜 시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안한 것처럼 연기를 하고 있었고, 실비아는 자신이 먼저 실험을 해보자고 달려들어 죄의식을 느끼는 중이었다.
솔직히 놀랐다. 설마 그녀가 먼저 만져달라고 할 줄이야.
나에게는 무척 좋은 일이긴 했다. 이번 일이 새어나가 아델과 싸우게 되면, 실비아는 내 탓을 할 수도 없을 테니까.
운수 좋은 날엔 항상 비극이 뒤따라오던데... 그런 것도 없다.
모든 게 잘 풀린다.
“야.”
옆에 있던 실비아가 돌연 팔꿈치로 내 허리를 쿡쿡 찔렀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내가 말했다.
“상처 건드리지 마세요. 아파요.”
“아... 진짜 미안해. 괜찮아?”
“예... 왜 부르셨어요?”
“그게... 그... 동굴에서 있었던 일 있지...?”
“실험이요?”
태연한 내 반문에 실비아가 흠칫했다.
그녀가 황급히 대답했다.
“응. 실험... 그거 비밀로 하자.”
“아델한테도 비밀로 하라는 말씀이시죠?”
“맞아.”
실비아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영혼의 파트너에게 들키면 파장이 어마어마할까봐 걱정이 크겠지.
실비아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우뚝 멈춰 세운 내가 물었다.
“말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난 있어. 네가 문제지.”
“저도 자신 있습니다.”
“그럼 비밀로 하는 거다?”
“알겠습니다. 저희 둘만의 비밀이 생기게 됐네요.”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실비아는 내 의도대로 들었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날 나무랐다.
“두, 둘만의 비밀은 무슨... 입단속이나 잘해. 무덤까지 가져가. 알았어?”
눈에 띄게 당황해하는구나.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실비아의 손목을 놓아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그녀는 이젠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의미를 파악해보려 하는 모양인데... 혼자 백날 생각해봐라.
답이 나오나.
어느새 우린 인분이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퍼져있는 인분을 보고 절망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해...”
내게 다가온 실비아가 침착한 투로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 더 있으면 어떡하냐고... 빨리 다시 돌아가자. 또 습격을 당하면 정말 큰일 나.”
“알겠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짜증을 낸 나는 실비아의 재촉에 못 이겨 몸을 돌렸다.
그렇게 동굴과 인분이 있는 장소의 중간지점까지 돌아왔을 때, 나는 정신적으로 한계가 찾아온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급조한 자연 우산을 절벽 아래로 확 내던졌다.
그리고는 급류가 콸콸 흐르고 있는 협곡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중얼거렸다.
“힘들다...”
그런 내 옆에 앉은 실비아가 날 위로해주었다.
“넌 잘하고 있어.”
“방심하다 전투기를 박살낸 제가요?”
“방심은 무슨... 일반인은 절대 반응하지 못할 공격이었어. 나도 한 끗 차이로 아이테르의 힘을 빌려 쓸 수 있었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무너지지도 마.”
“하아...”
실비아는 연신 자책어린 한숨을 내쉬고 있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면서 가까이 붙어왔다.
이후 자신의 머리와 내 머리에 잎사귀를 올려놓았다.
그녀의 행동에 힘없는 웃음을 터뜨린 내가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힘이 나요.”
“나도 고마워.”
“여기서 조금만 있다가 가도 되나요?”
“당연하지. 마물들도 없잖아. 인분이 있는 곳과는 멀찍이 떨어져있으니까 있고 싶은 만큼 있어. 근데... 네 상처가 덧날까봐 좀 걱정이네.”
“상관없어요. 의료기기에서 치료받으면 되니까.”
“돌아갈 생각은 하는구나?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아서 좋다.”
“실비아 씨 덕분이죠 뭐.”
양팔을 뒤로 뻗은 나는 급류와 건너편을 번갈아 바라보며 시간을 때웠다.
실비아는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게끔 고개를 천천히 돌리면서 그랜드캐니언의 전경을 살폈고 말이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그녀가 감탄한다.
“분위기 끝내준다... 그렇지 않아?”
“그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마물이 없다면 여행을 오고 싶을 정도에요. 지금처럼 비오는 날에 동굴에서 텐트치고 고기 구워먹고 싶다.”
“여행계획이 너무 구체적인데... 상상하니까 낭만 있을 거 같긴 하다.”
“실비아 씨.”
“응?”
“이곳이 정상화되면 저랑 여행 오실래요?”
실비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로 인해 떨어질 뻔한 잎사귀를 잡아챈 내가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나랑...?”
“예. 우리 여기서 진짜 고생했잖아요. 지구상에 몇 안 남은 대자연의 보고인데 안 좋은 기억은 없애야죠.”
“난... 상관없어. 어차피 운동밖에 안 해서 시간도 많고...”
“약속한 겁니다?”
“응. 약속해.”
같이 고생을 하기 전이었다면 학을 뗐을 텐데 이런 대답이 나오는 걸 보니 내게 관심이 아주 많이 생겼구나.
함께 역경을 딛으면서 동료애가 생겼고, 그녀가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 보호해준 일과 성감대를 만지작거린 일 때문에 날 남자로서 보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정말 마음에 든다. 몸이 고달프긴 했지만 중간에 이상한 것들도 안 끼어들고 목적대로 돼서 뿌듯해.
둘만의 여행 이야기에서 아델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도 좋다.
슬슬 돌아가도 되겠어.
실비아의 대답을 듣고 히죽거린 나는, 협곡의 갈림길 근처에서 희미한 초록색 불빛이 반짝거리고 있자 정색을 했다.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 내가 그 불빛을 가리켰다.
“실비아 씨. 저거 보여요?”
그건 협곡의 벽에 박혀 반쯤 잠겨있었다.
마치 급류에 떠밀려오다가 그리 된 것처럼.
실비아가 불빛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저건 설마...”
“기계 같아요. 여기서 기계라면 단 하나밖에 없죠. 전투기 파편이요.”
“다, 당장 가지고 올게.”
벌떡 일어난 실비아가 아이테르 보관함을 꺼냈다.
그녀는 아마 우리의 운이 엄청 좋았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렇게 계속 생각해라. 마르셀라의 안배를 의심하지 마.
**
다시 동굴로 돌아온 우린 상기된 얼굴로 기계를 살폈다.
충격으로 인해 겉이 찌그러진 통신장치. 그러나 작동은 되고 있다.
안절부절 못하던 실비아가 장치를 유심히 보고 있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어때? 고칠 수 있겠어?”
“애초에 고장이 난 상태가 아니었어요. 작동도 아주 잘 되고 있고요. 이걸 개조하기만 하면 연구실에 송신이 가능할 것 같은데...”
“전기도 없는데 어떻게?”
“내장된 배터리는 장식이 아니잖습니까.”
“뭐 도와줄 거 있어? 말만해.”
“분해먼저 해야겠는데... 너무 단단해요. 지렛대 같은 걸 먼저 찾아보죠.”
“그럴 필요 없어. 나한테 줘.”
아이테르를 쓰겠다는 소리였다.
그래, 지금은 아껴야할 상황이 아니긴 하지.
근데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냐? 나는 너랑 여기서 떡까지 치고 싶은데... 서운하네.
“겉만 분해해주세요. 속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알았어.”
내가 장치를 내밀자, 실비아가 다시 아이테르의 힘을 빌렸다.
이후 겉의 단단한 합금을 엿가락 박살내듯 부수고는 내게 내밀었다.
그 속에서 내용물을 꺼낸 나는 본격적으로 통신기 개조를 시작했다.
“괜찮겠어? 너 다친 상태잖아. 개조하다가 피라도 나서 감전되면 어떡해?”
“방수처리가 다 되어있어서 괜찮습니다.”
개조는 금방 끝이 났다.
나는 기대감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한 실비아를 지나쳐 동굴 입구 쪽에서 급조한 안테나를 세웠고, 연구실과 연결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전자기파를 쏘았다.
지직거리는 소리가 짧게 들려오고 얼마 뒤,
-정체를 밝히세요.
세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화야? 나 지혁이.”
-뭐야, 지혁이야? 왜 수상한 신호를 보내고 난리야... 깜짝 놀랐잖아.
“일이 생겨서. 근데 박사님은 어디 가셨길래 네가 수신을 받아?”
-박사님은 지금 프랑스에 가셨어. 그쪽 세계연합 이사에게 뭔 사건이 하나 터졌나봐. 며칠간 안 돌아오실 거야.
“무슨 문제인데 직접 날아가셨어?”
-나도 잘 몰라. 오시면 물어봐.
짜놓은 대사를 읊은 나는 용건을 꺼냈다.
“혹시 아델한테 연락 가능해?”
-응. 근데 지금 새벽이라... 자고 있을 걸?
“위치 전송해줄 테니까, 깨워서 여기로 오라고 해. 포탈은 와이오밍에 있는 걸로 타면 될 거야. 그리고 무인 수송기도 하나 보내.”
-알았어.
세화와의 통신을 마친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여기 상황을 모르고 있는 눈치죠?”
통신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있던 실비아가 수긍했다.
“응... 왜 세화한테 설명해주지 않았어?”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까요. 지금은 탈출이 급선무니까... 돌아가서 말해주고 알아봐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 근데 왜 아델 혼자 오라고 했어? 신성력 때문에?”
“예. 마기를 감지한 아델이 신성력으로 나방들을 정화시킬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혼자 오라고 한 건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고요.”
고개를 주억거린 실비아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의 일이 생각난 모양.
얼굴에 나 비밀이 있소! 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데, 저래서야 숨길 수나 있을까 모르겠다.
그런 그녀를 향해 싱긋 웃은 내가 말했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네요.”
“무슨 소리야? 시원섭섭하다니?”
“여기 있었던 일은 정말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재미도 있었거든요. 이해가 안 가실지도 모르겠는데... 전 그렇게 느꼈어요.”
실비아의 안색이 제법 밝아졌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체감 상 며칠은 지난 것 같은데... 하루도 채 안 지났어. 신기하지 않아?”
“그러게요. 재미있는 일을 겪으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던데... 그 말에 공감이 가네요. 어떻게, 탈출한 기념으로 포옹이라도 한 번 하실래요?”
그 말에 실비아가 머뭇거리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한 번 튕길 만도 했는데... 지조가 없구나.
하긴, 연락을 받은 아델은 당장 달려올 테니까 빨리 하긴 해야겠지.
환한 미소를 지은 나는 실비아가 적당한 거리쯤 왔을 때, 성큼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야... 너무 꽉 달라붙는 거 아니야? 아파...”
내 허리춤에 손까지 올려놓은 주제에 아프다니 어이가 없다.
좋으면서 거짓말은...
말없이 실비아의 몸을 부서져라 안고 있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여행 약속, 잊지 마. 그리고 알지?”
“알아요. 아델한테 비밀로 하는 거. 걱정하지 마세요.”
“믿음직하지가 않아.”
“뭐 어떡합니까... 믿는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긴 해... 아, 디바이스도 최대한 빨리 만들어줘.”
바라는 게 왜 이리 많아?
“알았어요.”
슬슬 포옹을 풀 타이밍임에도, 나는 실비아와 계속 붙어있었다.
그녀 또한 떨어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꽤나 오랜 시간동안 서로의 체온을 공유했다.
끼이이익-!
저 멀리서부터 마물의 괴성이 들려왔다.
이어서 찬란한 금빛 광채가 어둠을 몰아내면서 그랜드캐니언을 밝히기 시작했다.
아델이 왔다는 증거. 수송기를 포탈로 보냈다면, 그것도 금방 오겠지.
여기서 얻은 게 너무 많아 황당할 지경이다.
이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