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3 이간질 #5
“야, 송지혁.”
귓가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자고 있던 나는 몸을 뒤척였다.
“으음...”
그러자 뒤통수에서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뭐, 뭡니까? 왜 때려요?”
“그만 자고 일어나. 보여줄 게 있어.”
“보여줄 거요...? 뭔데요?”
“일어나기나 해봐. 얼른.”
팔로 눈을 비빈 나는 오른팔 상태를 확인해봤고, 괜찮은 것 같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동굴 입구로 데려간 실비아가 물었다.
“마물들 보이지?”
“비도 오고 밤이라 하나도 안 보이는데요?”
“아니... 그래도 달빛 덕분에 움직임 정도는 알 수 있을 거 아니야.”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데...”
“그거야. 아무리 밤이라도 꿀렁거리는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잖아. 내가 아까부터 확인해봤는데, 저 마물들이 자고 있는 것 같아.”
“마물도 동물인데 당연히 자겠죠.”
실비아가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있는 날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발로 내 엉덩이를 가볍게 툭 차더니 말한다.
“돌멩이를 던져봤거든? 직접 맞추지만 않으면 아주 조용해. 비도 많이 오고 있어서 발소리가 가려질 거고, 나방은 아예 없어. 다른 지역으로 떠났나봐.”
“돌멩이까지 던지셨습니까? 위험하게...”
“지금이 탈출할 기회야.”
“아 뭔 탈출이에요... 기다리자며...”
“너 퍼질러 잔지 세 시간이 넘었어. 그때까지 여긴 빗소리 말고는 손님도 없었고. 네 말처럼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본부가 모르는 것 같아.”
“어떻게 탈출하시게요? 그냥 뚫고 가려고?”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무서운데... 실비아 씨는 아니지만 전 평범한 민간인이라고요. 중간에 마물들이 깨어나면 어쩌려고요?”
“여기서 손가락만 빨 수는 없잖아. 수틀리면 아이테르를 써서 내가 지켜줄게. 그러면 되지?”
믿음직하군.
“하아... 좋아요. 해봅시다. 잠깐만요... 잠 좀 깨고...”
나는 제자리에서 통통 뛰거나, 뺨을 치거나, 과하게 심호흡을 했다.
실비아는 이러는 날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말이다.
“깨방정은...”
“깨방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입니다. 전 죽기 싫다고요.”
“나도 마찬가지야. 이 옷은 내가 입어?”
조종복을 말함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내가 대답했다.
“네.”
“왜? 네가 입지... 나 이제 안 추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옷이 무거워서 마물의 공격을 못 피할까봐 최대한 가볍게 하려는 겁니다.”
“벌써부터 공격받을 걱정이나 하고... 겁쟁이가 따로 없네. 그 큰 근육이 아깝다.”
“또 왜 이러실까... 진짜 나랑 안 맞는다.”
“시끄럽고, 준비됐어?”
“갑시다. 가요.”
**
쏴아아아-!
밤에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가시거리를 매우 좁혔다.
하지만 달에서 내리쬐어주는 달빛이 먹구름을 뚫어준 덕분에 어찌 저찌 마물을 피해가며 움직일 수는 있었다.
우린 꽤나 많은 거리를 이동했고, 그렇게 3km쯤 갔을 시점, 전방에 빨간색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도처에 깔려있자 멈췄다.
“이게 뭐야?”
새끼손톱만한 그것들은 앞을 아예 뒤덮은 상태였다.
공중에도 휘날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
눈으로 반짝이들을 살펴보던 내가 실비아의 물음에 답했다.
“인분 같은데요.”
“인분...? 대변을 말하는 거야?”
“아니... 나방의 날개에 묻어있는 가루요.”
“아...”
멋쩍은 미소를 지은 실비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마물의 날개에서 나왔다면 엄청 해롭겠지?”
“지금부터 확인해봐야죠.”
나는 실비아의 어깨에 자연스레 한손을 올리고 깽깽이발을 한 채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는 전방을 향해 휙 던졌다.
그러자,
치이익-! 치익!
인분에 닿은 양말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버렸다.
신발을 다시 신은 내가 이마를 짚었다.
“망했는데요.”
“미치겠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인분이 저희가 있는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있다는 거에요. 마치 투명한 경계선이라도 그어져있는 듯한데...”
“왜 그런 건데?”
“낸들 알겠습니까.”
“다른 데로 돌아가 보자. 왼쪽부터 가볼까?”
“그럽시다... 어디로든 가요.”
힘없는 대답을 내뱉은 내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끼에에엑-!
전방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괴성은 주변에 산재한 촉수들을 전부 깨워버리고 말았다.
키기기긱-! 키긱!
어두컴컴한 땅에서 징그럽게 움직이는 촉수들을 보자니 토악질이 나오려고 한다.
멀리서 볼 땐 참 예뻤는데, 가까이서 보니 좆같이도 생겼구나.
“도망가야겠어. 꽉 잡아.”
당황한 척하고 있는 내게, 실비아가 품에서 아이테르를 꺼내며 이런 말을 해왔다.
여기서 마르셀라가 생각이 있다면 실비아를 그냥 보내지 않을 텐데... 어떻게 되려나.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숨을 참으려 하고 있을 때, 인분이 깔린 곳에서 실 같은 것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오더니 아이테르의 힘을 빌리려 하고 있는 실비아의 다리를 노렸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그것은,
푸슛-!
실비아가 입은 조종복을 뚫고 그녀의 발목을 스쳐지나가 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큭!”
짧은 신음을 터뜨린 실비아는 곧 아이테르를 사용해 내 몸을 확 낚아챘고, 공중을 발로 차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다시 원래 있던 동굴로 돌아온 우리.
나는 마물들이 쫒아오나 안 오나 확인을 하다가, 힘을 해제한 실비아가 비틀거리자 그녀를 부축해 미약하게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 옆에 눕혔다.
“괜찮아요? 상처 좀 봅시다.”
“그, 그냥 스친 것뿐이야... 됐어.”
“고통을 참아내는 목소리인데 그냥 스친 것뿐이라니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됐다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칼이나 줘 봐요.”
실비아의 눈앞에서 손을 내밀고 흔들자, 그녀가 마지못한 몸짓으로 품에서 단검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가 입은 조종복 밑단을 쫙 찢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왼쪽 발의 복사뼈 부분이 시커멓게 변색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검은 피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방 마물의 독에 의한 결과. 환부를 자세히 살펴본 내가 말했다.
“독에 당한 것 같은데, 응급처치를 해야겠습니다. 발목을 쨀 테니까 아파도 참아요.”
“무, 뭐...?”
실비아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겁을 먹은 것이다. 의젓한 줄 알았는데 지금 이러는 모습을 보니 너도 여리긴 하구나.
나는 모닥불에 단검의 날을 소독했다.
“살을 조금만 가를 겁니다. 독기를 빼내기 위해서요. 흉터 걱정은 마세요. 의료기기에서 치료받으면 되니까.”
“그 걱정이 아니라... 내가 불구가 되면 어떡해?”
아... 내가 실수할까봐 겁을 먹은 거였구나.
여리다는 말은 취소다. 이 싸가지 없는 년.
“이래 뵈도 세화와 유리아를 응급처치해준 경험이 다수 있습니다. 믿기 싫으면 말아요. 그래도 쨀 거니까.”
벌떡 일어난 나는 동굴에 걸린 실비아의 상의 밑부분을 찢어 그녀의 발목을 닦아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남은 옷가지를 사용해 실비아의 종아리 부근을 꽉 묶은 다음, 양손으로 다리를 쓸어내려 피가 아래로 쏠리도록 만들었다.
이후 자그마한 나뭇가지를 그녀의 입에 가져다대며 말을 이었다.
“큰소리 내면 안 되니까 물고 계세요.”
“너... 실수하면 죽어...”
“알았어요.”
“날이 엄청 날카로운 칼이니까 진짜 살살 해야 돼. 알았어?”
“예.”
여전히 미덥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실비아가 날 노려보면서 나뭇가지를 물었다.
난 그 즉시 날을 세워 중독된 환부를 조심스럽게 찔렀다.
“으으으읍...!”
눈을 질끈 감는 실비아.
나는 악 문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녀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작업을 계속했고, 치료를 마쳤다.
하지만 실비아의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악화되어갔다.
당연했다. 이런 응급처치만으로는 마물의 독기를 전부 빼낼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괜찮다.
나방 마물의 독은 맹독까진 아니었기 때문.
기초 처치를 잘 했다면 몸에서 독이 서서히 빠져나간다.
그 빠져나가기까지의 과정이 고통스러울 뿐이지.
“불 더 지펴줘... 나 추워...”
방수 조종복이라 물기가 거의 없는데도 오들오들 떨리는 실비아의 몸.
그녀가 구해온 나뭇가지를 몽땅 모닥불에 던져 넣은 지 오래였던 내가 대답했다.
“최대한으로 지핀 거에요. 그렇게나 추워요?”
“겨울에... 알몸으로 있는 것 같아... 독 때문인 건가...? 원래 열이 나야 정상 아니야...?”
“마물의 독이잖습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여기 잠깐 혼자 계세요.”
“왜...?”
“땔감이랑 약초를 좀 구해오려고요.”
“너, 너무 위험해... 나가지 마...”
엄청 아플 텐데도 날 먼저 챙기는 마음씨가 기껍다.
“근처만 돌아보고 올 겁니다. 다른 부위의 혈액이 깨끗한 걸 보면 죽는 독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버티세요. 다녀올게요.”
“야... 가지 말라니까...”
그녀의 만류를 뒤로한 나는, 단검을 하나 들고 망설임 없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
**
두 시간에 걸쳐 버드나무 껍질과 잎, 그리고 여러 땔감과 간이침대를 만들 큼지막한 잎사귀들을 구해온 나는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내 손은 피범벅이었다. 전신에도 크고 작은 상처가 많이 난 상태.
이는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만든 상처였다.
이래야 실비아가 더욱 고마워할 것 아닌가.
이 외에도 동굴 입구에 깜짝 선물을 준비해놓았으니, 깨어나면 무척 감동할 테지.
나는 땔감을 모닥불 근처에 놓고 말리면서 실비아를 살폈다.
어느새 정신을 잃어버렸는지 눈을 감고 있는 그녀.
시시때때로 찌푸려지는 눈살을 보니 자고 있는 와중에도 고통스럽나보다.
코에 손을 대보니 호흡이 꽤 규칙적이었다.
중화가 충분히 됐다는 증거. 하지만 마물의 독이 열을 빼앗아가서 체온이 매우 낮았다.
버드나무 껍질을 빻아 즙을 낸 나는, 그걸 실비아의 입에 천천히 넣어주어 삼키도록 했다.
좀 있으면 진통효과가 나타나겠지. 특출난 효과는 없겠지만 고통을 감내할 정도는 될 거다.
난 다음으로 실비아가 입은 조종복을 천천히 벗겼다.
검은 브라에 감싸여진 봉긋한 가슴, 그리고 잘 단련된 몸을 보니 욕구가 솟구친다.
바닥에 잎사귀를 깐 나는 실비아를 그곳으로 옮긴 다음, 완전히 헤진 바지를 벗고 팬티바람으로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몸에 물기를 다 빼냈고, 대충 마른 땔감을 모닥불 가장자리에 놓아두었다.
이후 실비아의 곁에 착 달라붙어 그녀를 옆으로 끌어안은 뒤, 조종복을 최대한으로 펼쳐 위에 이불처럼 덮었다.
마지막으로 아이테르 보관함을 잠깐 살펴보고 머리맡에 두었다.
‘아델만 떨어뜨리면 실비아의 아이테르도 조만간이다. 퀴퀴한 무지개색을 아름다운 검은색으로 변색시켜주지.’
나는 실비아의 복부를 팔로 감아 당기고, 그녀의 다리 위에 내 다리를 얹어 완전히 밀착했다.
그녀의 탄탄한 11자 복근의 라인이 팔에서 느껴진다.
사타구니에 닿는 엉덩이 또한 무척이나 탱글탱글하다.
당장 팬티를 벗긴 뒤 쑤셔 박고 싶지만 참자.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니까.
온몸으로 실비아에게 체온을 전해주던 나는 속으로 마르셀라를 칭찬했다.
완벽하게 내가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됐다. 조만간 예뻐해 줄 의향이 있어.
무언가가 잘못됐다면 돌아가서 채찍고문을 한 뒤, 이틀 동안 추운 남극 한복판에 묶어두려고 했는데 잘해줬다.
‘이제 나도 쉬자.’
인간의 몸으로 갖은 고생을 해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온다.
몸을 약간 웅크려 실비아의 체구를 감싼 나는, 그녀의 뒤통수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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