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2 이간질 #4
“딱 봐도 비밀리에 온 것 같지 않았어? 그걸 아델한테 말하면 어떡해? 내가 먼저 말하고 싶었는데...”
“예... 죄송합니다.”
“그래도 고맙기는 해. 아델이 기분 나빠하지 않게끔 말해줘서. 근데... 이번 일로 왜 아델이 너더러 눈치가 참 없는 남자라고 푸념을 늘어놓는지 제대로 느꼈어.”
“.....”
입을 푸르르 떨며 한숨을 내쉰 나는 전투기를 운전하는데 집중했다.
그런 날 향해, 실비아가 눈을 흘기며 묻는다.
“기분 나빠?”
“아뇨... 귀가 아프네요. 두 시간 째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으시잖습니까.”
“그만큼 서운했으니까 그러지. 도착한 거야?”
“네. 다 왔습니다.”
“비가 오네? 하늘도 시커멓고.”
그 말마따나 그랜드캐니언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넓고 긴 협곡에 물이 불어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완벽한 환경이다. 진짜 하늘이 날 돕는 게 맞다니까.
“예. 강우량이 상당한데요. 홍수가 날 것 같아요.”
“그랜드캐니언은 건조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여름, 겨울 환절기에 두 번 정도, 신나게 쏟아지긴 합니다. 지금 시기에 비가 내리는 건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이상기후가 만연한 지구인만큼 납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죠.”
“그래... 그나저나 처음 여기 왔을 때와는 또 다른 운치가 있네. 아름다워... 사람들한테 피해만 안 갔으면 좋겠다.”
웅장한 대자연의 모습에 푹 빠진 실비아의 말이었다.
그녀의 감탄에 동의하던 내가 지극히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번개가 많이 치네요. 낙석이 일어날 만도 했어요. 보수한 다음 대비를 해놔야겠는데...”
“어떻게 고장 났다고 했지?”
“탐색기 바로 위쪽 절벽에 번개가 쳐서, 꽤나 큰 돌덩이가 떨어져 내렸어요.”
“기막힌 우연이네. 번개에 직격당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우연? 절대 아니지.
일부러 고장 낸 거란다.
“차라리 번개가 떨어졌다면 좋았었겠죠. 탐색기 근처엔 피뢰침이 있으니까요. 자, 어디 한 번 상태를 봅시다.”
전투기의 엔진을 수직으로 설정해 호버링을 하도록 만든 나는, 카메라를 확대해 탐색기를 비추었다.
탐색기는 옆 부분이 완전히 찌그러진 상태였다.
또한 불어난 물에 의해 반쯤 잠겨있었다.
탐색기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포탈도 마찬가지.
주변을 보호해주는 벽이 낙석 때문에 무너졌고, 물이 들어와 망가져있었다.
누가 봐도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라고 확신할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어졌구나. 역시 마르셀라다.
나와 함께 모니터를 보고 있던 실비아가 걱정스런 투로 중얼거렸다.
“상태가 엄청 안 좋아 보이는데...”
“맞습니다. 심각해요. 탐색기와 포탈, 둘 다 회수해야겠습니다.”
“내가 직접 내려가서 가져올까? 줄 같은 거 있어?”
“실비아 씨는 과학이 발달된 행성 출신이시면서, 왜 위험하게 직접 손으로 해결하려고 하십니까?”
실비아가 손을 오그라뜨렸다.
“야... 지금 네 말투 엄청 재수 없는 거 알아? 올라간 콧대 좀 내려주지?”
“잘 보세요. 이 전투기엔 여러 기능들이...”
내가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순간이었다.
퍼어엉! 퍼엉!
물이 불어나 급류가 된 협곡 곳곳에서 검은색 촉수 수백 개가 나타나더니, 전투기를 향해 일시에 돌진해왔다.
콰직-!
그것들은 단단하기 그지없는 전투기의 몸체 곳곳을 뚫었고, 나와 실비아의 머리를 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
인간의 몸인 나로선 전혀 반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떤 엄청난 힘이 내 몸을 옆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과,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에 둔탁한 고통이 이는 것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었다.
**
쿠르르릉-!
뇌리가 완전히 울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천둥소리.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허억!”
그러다 오른팔에 강한 고통이 느껴지자 이를 악 물었다.
“끄윽...!”
내 오른팔엔 나무로 만든 간단한 부목이 대어져있었다.
쓰리기도 했다. 어깨부근에는 손바닥 크기만 한, 벨트에 쓸린 듯한 상처가 나있었다.
촉수로 인해 다친 건 아니다. 이건 안전벨트가 쓸리면서 생긴 거다.
“하아...”
얼굴을 잔뜩 찡그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흑곰이나 퓨마가 살았던 것 같은 동굴 안.
내 옆엔 모닥불이 피워져있었고, 밖은 어두운데다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는 상태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대강 파악한 나는 낑낑거리며 엉덩이를 움직였고, 동굴 벽에 몸을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빗물에 쫄딱 젖은 실비아가 들어왔다.
왼손을 들어 올린 내가 그녀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좋은 밤입니다.”
내 장난기가 어린 목소리에 얼빵한 표정을 짓던 실비아.
그녀가 이내 피식하더니 말했다.
“괜찮아보여서 다행이네.”
그녀는 자신의 연한 빨강머리에 묻은 물기를 쭈욱 짜내며 내게 다가왔다.
입은 청바지와 검은색 티셔츠가 젖어있어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섹시한지 아픈 와중에도 아랫도리가 불끈거릴 정도였다.
내 옆에 앉은 그녀가 부목에 고정된 팔을 잠깐 살펴보았다.
“팔도 괜찮네. 잘 붙었어.”
“예...? 잘 붙었다니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촉수마물의 공격에 전투기가 박살났을 시점, 아이테르의 힘을 빌린 실비아가 미간이 꿰뚫릴 뻔한 나를 살려주기 위해 내 몸을 잡고 옆으로 확 끌어당겼다고 한다.
그때 전투기 안전벨트에 팔이 걸려 탈골됐고, 촉수에 의해 머리를 강타당해 기절.
실비아는 단검으로 벨트를 끊은 뒤, 추락하는 전투기에서 빠져나와 몸을 피하다가 이 동굴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기절해있는 동안, 이곳에서 내 팔을 끼워 맞추고 다시 나가 촉수마물을 죽였다.
모든 사정을 설명한 그녀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내가 죽인 녀석의 몸에서 새끼들이 튀어나오더라. 지금 밖에 마물들이 쫙 깔렸어.”
“마물들이 깔렸다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부축해줄 테니까 직접 봐.”
실비아가 내 왼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티셔츠에 딱 달라붙은 저 봉긋한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싶지만 참자. 기회는 온다.
그녀의 부축을 받고 동굴 입구까지 간 나는 입을 쩌억 벌렸다.
놀란 척 연기를 한 것이다.
“저... 저게...”
뇌우가 치는 그랜드캐니언 곳곳에 깔린, 다 자란 시베리아 호랑이와 비슷한 크기의 촉수마물들.
개중에선 체고가 15미터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놈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익폭이 30미터 가까이 되는, 나방처럼 생긴 마물까지 공중에 몇 마리 존재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 같은 느낌. 기분이 좋다.
“대체 몇 마리야... 대략적으로만 봐도 천 마리는 넘어 보이는데요? 저게 실비아 씨가 죽인 마물의 몸에서 나왔다는 말씀이십니까?”
“맞아. 그리고 눈에 보이는 놈들만 천 마리지, 그랜드캐니언 전체에 깔렸다고 봐도 돼.”
“하... 절망스럽다 진짜... 전투기는요? 설마 완전히 아작 난 겁니까?”
“응. 널 여기 두고 다시 돌아갔을 땐 파편밖에 없었어. 그 파편조차 마물의 몸에서 나왔지.”
“그럼 먹었다는 거네요...? 휴대폰이며 통신기며 다 거기 있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박사님이나 세계연합에서 우릴 발견해주길 기다려야할 것 같아.”
나는 회의적인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얼마나 지났죠?”
“다섯 시간 정도.”
“다섯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용한 걸 보면 무슨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기다려보자. 언젠간 알겠지.”
계속 모르고 있을 걸?
“그냥 실비아 씨가 절 업고 탈출해주시면 안 됩니까? 실비아 씨는 빠르잖아요.”
“아이테르 에너지가 별로 없어.”
“얼마나 남았는데요?”
“10퍼센트.”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 정도밖에 없죠? 콘 벨트 전투가 끝났을 땐 분명...”
“그래... 3분의 1 정도는 남아있었지. 하지만 촉수마물의 덩치가 너무 컸고, 하늘에 있는 나방들의 지원도 골치가 아파서 상당한 시간이 걸렸어. 난 저런 거대한 놈들한텐 약하거든.”
그리고 물량에도 약하지.
오르바스를 상대할 때 네 약점을 다 간파했단다.
그래서 맞춤으로 마물을 내보낸 거고.
쉽게 말해, 넌 함정에 빠졌다는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아껴야겠네요.”
“그래야겠지.”
날 다시 안쪽으로 옮겨놓은 실비아가 모닥불 근처에서 양손을 들었다.
한쪽 다리를 쭉 뻗고 주저앉은 내가 물었다.
“저놈들이 여길 습격하면 어쩌죠?”
“다섯 시간이 지났는데도 멀쩡한 걸 보면, 여긴 안전한 장소야. 이 근처엔 아예 흥미가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얌전히 기다리자.”
“참 태평하시기도 하지... 이거 입어요.”
나는 낑낑거리며 조종복을 벗고, 모닥불 위로 휙 던졌다.
그걸 제법 멋지게 낚아챈 실비아가 말한다.
“이건 왜?”
“옷 다 젖었잖아요. 저체온증 걸리기 전에 갈아입으세요.”
“퀴퀴한 냄새가 나는데?”
“냄새...? 입술도 푸르딩딩하면서 따지시기는... 입으라면 그냥 입죠?”
퉁명스럽게 말을 한 나는 벽을 바라보며 누웠다.
실비아가 눈치 보지 않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비아가 젖은 옷을 벗고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말은 저렇게 했어도 춥긴 추웠나보다.
“다 입었어.”
“예.”
“.... 야.”
“왜요.”
“냄새난다고 해서 삐쳤지? 사실 흙냄새밖에 안 나.”
“삐치긴 누가 삐쳤다고... 실비아 씨는 그게 문제에요. 혼자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는 거. 디바이스도 없는 상태에서 무식하게 마물들을 도륙한 것도 문제고요.”
그 말에 실비아가 발끈했다.
“이게 죽을라고... 너도 문제 많거든?”
“뭔 문제요?”
“일단 입이 싸. 아델한테 쫄래쫄래 달려가선 고자질이나 하고...”
“또 또 그 얘기... 연인끼리 솔직한 게 뭐가 어때서요? 게다가 그렇게 따지자면 실비아 씨도 입이 싼 건 마찬가지인데요?”
탁!
자그마한 무언가가 내 등을 때렸다.
고개를 돌린 나는 얇은 나뭇가지가 옆에 떨어져있자 헛웃음을 켜며 상체를 일으켰다.
“할 말 없으니까 이런 거나 던지시고... 진짜 어이가 없네요.”
“그럼 돌덩이라도 던져줄게. 네 몸집만한 걸로.”
“하나도 안 무섭거든요?”
실비아가 다시 한 번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던졌다.
나는 오른팔로 그걸 잡아채려했지만, 부목 때문에 가동범위가 좁아져 그러지 못했다.
이번엔 이마에 나뭇가지를 맞은 내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억울하네요. 잡을 수 있었는데.”
실비아가 킥킥거리더니 날 놀렸다.
“그러게 왜 까불어?”
“글쎄요. 까불고 싶으니까? 아, 실비아 씨.”
“왜.”
“무식하다고 한 건 실언이었어요. 죄송합니다.”
“알아. 신경 쓰지 마.”
너는 성격이 참 시원시원해서 좋단 말이지.
“그리고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이에요.”
진중한 표정으로 돌아온 내 감사에, 실비아가 잠깐 침묵했다.
잠시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고마워.”
“뭐가요?”
“내 사정을 봐줘서.”
아델에게 이야기를 잘해준 것에 대해 감사표시를 하고 있구나. 그녀를 어지간히 좋아하나보네.
그런데 어쩌냐... 난 오늘 네 호감을 살 예정인데.
전쟁터엔 전우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다잖아. 같이 고생 좀 하면서 유대감을 쌓아가자꾸나.
“저야 뭐... 매사에 신중하니까요.”
“그런 놈이 방금 나한테 무식하다고 했냐? 또 맞을래?”
“사람이 왜 이렇게 폭력적이야...”
투덜거린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댔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실비아가 조심스레 묻는다.
“왜 그래? 마물이 공격할까봐 불안해?”
“아뇨. 실비아 씨가 안전하다고 했으니 안전하겠죠. 그냥 빗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거에요. 마음이 진정되거든요.”
“그래...?”
“실비아 씨는 어때요? 비 좋아하세요?”
“난 아무런 생각도 안 들어.”
“삭막하시기는... 그럼 이참에 한 번 들어보세요. 후두둑거리는 소리가 꽤 운치 있습니다.”
그 말에 실비아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정말이네? 뭔가 평온해져... 물살 소리도 마음에 들고.”
“그렇죠? 밖에 있는 마물들만 빼면 참 좋은...”
“조용히 해. 빗소리 듣게.”
내 말을 끊고 집중하는 실비아였다.
같은 공감대가 형성됐구나. 아주 좋다. 춤이라도 추고 싶어.
속으로 끅끅댄 나는 그녀와 함께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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