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0 이간질 #2
나와 실비아는 그녀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커피숍에서 만났다.
당장 돌아가서 박사와 물고 빨고 해야 하는데... 갑자기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뭘까?
별 거 아니라면 너는 잡아놓고 전기고문 예약이다.
잡히지도 않겠지만.
“무슨 일이십니까?”
웃는 낯으로 저리 물어오는 내게,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실비아가 눈을 치켜떴다.
“앉아.”
“예. 아델은요?”
“집에서 쉬고 있어.”
자리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두 잔 놓여있었다.
태연하게 빨대에 입을 갖다 댄 나는 커피를 쪼옥 빨았다.
그런 날 보던 실비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본론을 꺼낸다.
“너... 설마 아델을 벗겨먹고 있는 건 아니지?”
딱 보니 아델이 실비아에게 온갖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설마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줄이야...
대답은 예스였다. 난 아델을 아주 잘 벗겨먹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넌 입 닥친 상태로 있어주라. 거의 다 벗겼으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해 못한 척은 그만둬줄래?”
“무슨... 갑자기 공격적인 말투로 황당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해 못한 척이라니요?”
진심으로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실비아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다짜고짜 이래서 미안해. 나는 아델과 깊은 얘기를 나눠. 아주 솔직한... 그런 얘기.”
“예.”
“너와 아델이 제주도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들었어.”
“그, 그걸 아델이 말했다고요...? 아주 개인적인 일인데...?”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해하는 나.
실비아가 피식하더니 다소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 그 개인적인 일마저도 서로에게 터놓고 말할 정도로 관계가 깊어.”
“뭔가... 발가벗겨진 기분이네요. 두 분은 친자매처럼 친하시니 그럴 만도 하겠죠.”
“이해해줘서 고마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델은 네 생각보다 더 순수하고 착해. 지나칠 정도야. 항상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고 눈치를 보는데다, 소심해서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지.”
글쎄... 지금 아델이 나한테 하고 있는 행동들을 보면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할 걸?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아델은 실비아 씨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어리지 않아요. 너무 과보호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건... 실언이었어. 네 말이 맞아. 아델은 어리지 않지. 아델을 내 목숨보다 아껴서, 그녀를 위하는 마음에 그런 말을 한 거야.”
“보기 좋네요. 어쨌든... 제가 그 순수한 아델을 속여 그렇고 그런 일을 한 게 아니냐고 물으시는 거죠?”
“정확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봐. 너희가 만난 시간은 짧잖아?”
“이해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모든 것을 걸고 말하건대, 전 아델을 속일 생각도, 이유도 없어요.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단호한 내 대답에 실비아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예. 제 대답에 진정성이 느껴지시나요?”
“조금...”
조금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군.
씁쓸한 미소를 지은 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실비아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더 할 말이 없으시다면 가보겠습니다.”
“그래.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했어.”
“아닙니다. 의심할 수도 있죠. 집 앞까지 태워다드릴까요?”
“혼자 갈게.”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실비아에게 간단한 목례를 했고, 그대로 카페를 떠나려다가 몸을 돌려 물었다.
“그런데 실비아 씨는 만난 시간이 짧으면 서로 사랑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흠칫하는 실비아.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 아니, 그건 아니야.”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니? 무슨 뜻이야?”
“실비아 씨도 풋풋한 감정을 느껴보셔야죠.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말한 겁니다. 다음에 또 뵙죠.”
“아... 그래, 조심히 들어가.”
카페에서 나와 차에 탄 나는, 악셀을 강하게 밟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실비아... 아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거머리 같은 계집.
슬슬 두 사람의 관계를 무너뜨릴 때가 됐다.
아델이 실비아의 간사한 입놀림에 넘어가기 전에 손을 써놔야지.
그리고 실비아의 ‘좋은 사람’은 바로 나여야만 한다.
이에 대한 영감이... 떠오른다. 느낌이 좋아.
**
성경의 페이지도 넘기지 않고 멍하니 있는 나.
아델이 조심스레 그런 날 불렀다.
“지혁 씨.”
“.....”
“지혁 씨!”
어깨를 움찔한 나는 고개를 여러 번 털어내고는 아델을 바라보았다.
“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길래 집중을 못하는 거지요?”
“아, 죄송합니다.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신성한 성경공부 시간에 딴생각이라니... 용납할 수 없어요! 신도로서의 자세가 안 되어있네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부디 양해해주세요.”
“저와의 성경공부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버럭 성을 내는 아델.
기세에 눌린 척한 내가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그리고는 생각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절대 아닙니다. 다만 아델과 관련된 일이라서...”
“저와 관련된 일이요...? 그게 뭐지요?”
“지금은 성경공부 시간이잖습니까. 집중할게요.”
“쉬는 시간을 드리겠어요.”
쉬는 시간을 주겠다? 이건 생각 못했군. 얘도 은근히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단 말이지.
나는 아델의 눈치를 흘끗 보는 것으로 그녀를 더욱 안달 나게 만들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쯤, 말문을 열었다.
“제가 어제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실비아 씨의 연락을 받고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네에...? 어제요?”
아직 모르고 있구나.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러면 더 쉬워지겠어.
실비아는 실수를 두 가지 했다.
그건 바로 날 캐보기 위해 아델 몰래 카페에 간 것, 그리고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
서로 비밀이 없다며 자랑질을 늘어놓더니... 제 자신이 직접 아델에게 비밀을 만든 셈이었다.
물론 실비아는 아델에게 나와 만났다는 걸 말할 예정이었을 터였다.
내가 가만히 있었다면 오늘, 혹은 가까운 시일 내에 아델과 대화를 나눴겠지.
만약 실비아가 모든 사실을 먼저 털어놓았을 경우, 아델은 기분만 약간 나빠지고 끝났을 것이었다.
혹은 자신을 위해 그리 해준 실비아에게 감사한 마음을 느끼거나.
하지만 내가 미리 선수를 쳐버리고 실비아와의 대화내용을 사실에 기반하여 약간 부정적으로 곡해한다면?
아델은 완전히 상반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안일한 실비아여, 한 발 더 빨리 움직인 내가 기회를 잡고 이득을 취하게 됐구나.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다.
“예. 어제 저녁 여덟 시쯤에요.”
“그때라면 제가 막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있던 시간이었는데... 언니는 분명 운동을 하러 가겠다고 했었어요.”
“아닙니다. 실비아 씨는 절 만났어요. 이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 어서 말씀하세요. 명령이에요!”
아델은 실비아가 자신 몰래 날 만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혀를 끌끌 찬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델,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실비아 씨께 말했죠?”
아델이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해했다.
큰 눈을 끔벅거린 그녀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황당하지? 그럴 만도 하다.
자신은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실비아에게 모든 걸 말했는데, 실비아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밖으로 나가 나한테 그 이야기를 언급하다니.
복잡할 거다. 실망스럽기도 할 테고.
그녀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은 내가 말을 이었다.
“아델을 나무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왜 이 말을 하냐면... 실비아 씨가 어제 제게 아델을 벗겨먹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왔기 때문입니다.”
“네에...? 무슨...”
“아무래도 실비아 씨는 제가 순진한 아델을 속이는 줄 착각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마, 말도 안 돼요...!”
고개를 여러 번 가로저으면서 내 말을 부정하려는 아델.
깊은 한숨을 쏟아낸 내가 말했다.
“저희가 만난 시간은 짧다면서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하시더군요.”
“언니가... 그랬다구요...?”
“예. 다행히 설득하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조금 슬펐습니다. 실비아 씨가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그리고 집에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실비아 씨가 맞는 말을 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저흰 너무 빨리 만나긴 했...”
아델이 테이블을 쾅! 하고 내려치며 내 말을 끊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스터디카페의 싸구려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로 소리쳤다.
“아니에요! 지혁 씨가 절 사랑하고 있다는 건 제가 가장 잘 알아요! 흔들리지 마세요!”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반응 중에서 가장 격하구나.
아주 좋아. 짜릿해.
속으로 끅끅 쪼갠 내가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어째서...! 어째서 언니는 저 몰래 지혁 씨를 만나고 그런 말을 한 거지요?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델은 지나칠 정도로 순진해서 걱정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더군요. 항상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고 눈치를 보는데다, 소심해서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라고...”
“무, 뭐라구요...?”
경악하는 아델을 보니 작전이 아주 잘 먹혀들어간 것 같다.
어때? 배신감이 느껴지지 않아?
어른인 너와 내 관계에 참견을 하여 흔들어대고, 부정적인 말까지 쏟아냈잖아.
그것도 너 몰래 말이야.
들린다 들려... 너희 둘의 단단한 결속력에 금이 가는 소리가.
“아델, 진정하세요. 오해는 다 풀어놓았습니다.”
“진정이 되게 생겼나요!? 언니가 그런... 파렴치한 말을...!”
“실비아 씨는 자신의 목숨보다 아델을 아낀다고 했어요. 그래서 걱정되는 마음에...”
“지금 실비아 언니를 감싸는 건가요? 하긴, 그럴 만도 하겠네요!”
“예...?”
“저번에 제가 교회에 갔을 때, 두 분이서 아주 친밀하게 영화를 보고 계셨잖아요! 소파가 넓은데도 딱 붙어있었어요! 실비아 언니가 좋지요? 그래서 언니를 옹호하려 하는 거잖아요!”
이런 망상까지 한다고? 상상이상으로 반응이 뜨거운데...
나는 정색을 하며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게 지금 할 말입니까? 제가 만약 실비아 씨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어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델은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렸는지 입가에 손을 올렸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해서...”
분을 삼키지 못하고 있는 아델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그녀를 소중한 듯 안았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저는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지길 원하지 않아요. 아델이 이토록 화난 게 제 탓인 것처럼 느껴지고요. 그래서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한 건데... 제가 더 죄송합니다.”
“.... 지혁 씨의 마음은 다 알아요... 제 실수였어요...”
“아델, 저랑 하나만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뭘요...?”
“만약 실비아 씨가 이번 일을 언급한다면, 최대한 침착하게 그녀의 말을 들어주세요. 냉정하게 직접 판단해보세요. 아델은 배려심과 생각이 깊으니까 현명한 답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내게 꼭 붙어있던 아델이 눈동자를 위로 들었다.
“제가 생각이 깊어요...? 배려심도...?”
“물론입니다.”
“언니는 저를 눈치만 보는 소심한 아이라고 했는데...”
“아니요. 실비아 씨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에요. 아델도 알다시피 그분의 성격이 조금 직설적이잖아요. 당시 저에 대해 오해를 하고 화가 나있는 상태라 말이 헛 나온 듯싶습니다. 실제로도 제가 그에 대해서 따지자 실언이라고 했고요.”
“.....”
“저보다는 아델이 실비아 씨에 대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봤을 때, 오해는 분명 풀린다.
그러나 서운한 감정만큼은 남아있을 테지.
또한 이들은 오늘을 기점으로 서로에 대해 솔직하지 않게 된다.
불신, 의심. 다른 무엇보다 이 감정을 심어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들이 쌓이면 인간관계가 파탄이 나는 거다.
“약속할게요... 언니가 만약 이야기를 꺼낸다면, 침착한 태도로 들을게요. 고마워요, 지혁 씨...”
아델은 내 관대한 마음에 감격한 듯했다.
나의 순진한 아델... 내가 열심히 네 멘탈을 치료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싸우렴.
“잘 생각하셨습니다.”
“오늘은 정말 충격적인 날이니... 성경공부는 중지에요. 차에 시동을 거세요. 네일샵에 들른 뒤 자동차극장에 가야겠어요.”
“방탈출은요?”
“저는 머리를 쓰지 않고 식혀야 해요.”
아무렴. 머리를 식혀야지.
데이트 도중, 그리고 돌아가서 냉정하게 잘 생각해보려무나.
내가 널 더 위하는지, 실비아가 널 더 위하는지.
“그럼 예약은 취소하겠습니다.”
“네...”
“갈까요? 아니면 잠깐 이렇게 있을까요?”
“이렇게 있어요. 20분간 가만히 절 안아주세요.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5분씩 추가에요.”
독재자가 따로 없군.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아델의 자그마한 체구를 부서져라 안으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청사진을 그렸다.
이젠 실비아와 나, 둘만의 비밀스런 자리를 마련해야한다.
아델의 불신을 더욱 키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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