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6 노예계약
아델은 애꿎은 트레이닝 복 상의를 만지작거리며 옷을 늘려대고 있었다.
발을 꼼지락거리면서 불안한 마음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내 눈치를 흘끗흘끗 보는 것이,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인자한 표정으로 아델을 바라보던 나는 손을 내밀었다.
“손 잡아줘요.”
그 말에 침을 꼴깍 삼킨 아델이 손을 쭉 뻗었다.
하지만 거리가 있어 닿지 못했다.
피식한 나는 엉덩이를 옮겨 아델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남은 손으로는 부드럽게 어깨를 감쌌다.
“밤은 이미 지나갔는데, 남은 시간동안 대화라도 하실래요?”
“.....”
“아니면 성경공부라도 할까요?”
“서, 성경은... 의정부에 놓고 왔는데에...”
“아델의 머릿속에 전부 들어 있잖아요.”
아델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늘은... 안 돼요...”
그래, 지금 성경공부를 하면 전혀 집중할 수 없겠지.
외운 것마저 까먹을 수도 있을 거다.
나는 그녀의 떨려오는 몸을 꽉 끌어안으며 사과했다.
“무섭게 해서 죄송해요.”
그러자 아델이 화들짝 놀라더니 말한다.
“무, 무서운 게 아니라... 그게...”
머뭇거리는 그녀. 당시 가버렸던 일을 말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위해 말을 돌려주었다.
“아델을 향한 제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아델은 어때요?”
나긋한 말투에 용기를 얻었을까? 아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날 부른다.
“지혁 씨...”
“예.”
“저는 오늘... 민망한 일을 겪었어요...”
스스로의 치부를 직접 말하다니... 속으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눈에 선하다.
“제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어요... 너무 창피해요...”
아델이 크응! 하고 코를 먹었다.
갑자기 서러워졌나보다.
그녀가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으며 말을 잇는다.
“지혁 씨는 징계감이에요... 한 달 동안 자그마한 방 안에서, 손가락 마디만한 빵과 물 한 모금으로 버티면서 성경만 외우셔야 해요...”
무시무시한 말을 잘도 하는구나.
근데 너 그럴 생각 없잖아.
“감수하겠습니다.”
“.... 정말이요...?”
“예. 내일 올라가면 아델이 원하는 장소에서...”
“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황급히 내 말을 끊은 아델.
나는 조용히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워, 원래라면 징계는 물론이고 파문이 분명하지만... 유예기간을 드릴 거에요... 지혁 씨는... 한 달... 아니, 일주일 동안 제가 부탁하는 일을 전부 다 들어주셔야 해요...”
“그래요...?”
“네... 만약 한 가지라도 제 마음에 들지 않을 시에는... 앞서 말했던 징계를 내릴 거에요...”
“만약 잘 완수한다면요? 상을 주실 겁니까?”
“그런 건 없어요...! 상이라니... 지혁 씨는 벌을 받고 있는 입장임을 자각하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조, 좋아요...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지금 당장 저를 안고 침대로 가도록 하셔요...”
나는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부탁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할 수밖에 없잖아.
아델을 공주님처럼 안아든 나는, 그녀를 데리고 가 침대에 조심스레 눕혔다.
“다음은요? 방으로 돌아갈까요?”
“제가 그러라고 했나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런 식의 앞서나가는 행동은 금지에요.”
“예.”
“이제 저를 마주보고 누우세요.”
“하지만 아델은 바르게 누워 있잖습니까. 마주보려면 제가 위로 가야 돼서 눕지를 못합니다만...”
“아, 그렇지요...”
아차 한 아델이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속으로 끅끅 웃어재낀 나는 침대로 올라가 옆으로 누웠다.
이후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말씀대로 했습니다.”
내 눈빛이 제법 부담스러웠는지, 아델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한다.
“누, 눈을 감으셔요.”
내가 지그시 눈을 감자, 아델이 침대에 올라가있는 내 손을 잡더니 자신의 옆머리에 댔다.
“지혁 씨는 저 외에 다른 여자를 만난 적이 있나요? 솔직하게 대답하세요.”
취조를 하시겠다?
근데 이건 연인들 사이에서 금기시된 질문인데...
“있습니다.”
“.....”
내 손을 잡은 아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것 봐라, 질투심이 생기잖아.
이런 대화는 관계가 나락으로 가는 급행열차라고.
너는 감당 못해. 그러니까 거짓말로 상황을 무마하는 날 이해해줘라.
“며, 몇 명...?”
“세 명.”
“세 명...? 현재 저희의 관계와 비슷했나요...?”
“아니요. 그저 썸만 타던 관계였습니다.”
“....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겠네요...?”
“없습니다.”
“휴...”
내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델.
그녀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묻는다.
“그럼... 제가 지혁 씨의 첫사랑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네.”
“조, 좋아요... 이제 지혁 씨는 눈을 뜨시고, 평소처럼 저를 대하도록 하세요.”
최면이라도 거는 느낌이네.
가짜 최면어플이라도 만들어서 갖다 주면 잘 써먹을 것 같구나.
“예.”
“.....”
“.....”
“왜 아무런 말도 없으시지요...? 평소처럼 대하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사랑해요, 아델.”
“흐아...”
기쁜 탄성을 내뱉은 아델이 내게 가까이 붙어왔다.
그러더니 말한다.
“저도요...”
아아... 너무 짜릿하고 재미있다.
평생 이렇게 꽁냥거리면서 살고 싶다.
**
“제주도 바다의 생태계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다른 곳에도 그 이상한 마물이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해.”
-그래...? 언제 돌아오는데?
“꼼꼼히 돌아봐야 해서 오래 걸릴 것 같아. 최소한 하루, 만약 아델이 신성력을 사용하게 된다면 더 길어질지도 몰라.”
-어쩔 수 없지... 알았어.
“나 없는 동안 아델의 슈트를 좀 제작하고 있을래? 무기도 틀만 잡아놔.”
-그렇게 할게. 바빠도 하루에 두 번씩은 연락 줘요.
“알았어.”
박사와의 전화통화를 마친 나는 패스트푸드 가게로 들어갔다.
구석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아델.
햄버거를 먹고 싶다더니... 왜 저러는 거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간 내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안 드십니까?”
“통화는 다 끝났나요?”
“예.”
“그러면 햄버거 포장을 뜯으세요.”
“예...?”
“들으셨잖아요.”
“허...”
헛웃음을 켠 나는 꿍얼거리며 햄버거의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는 그걸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지요...?”
황당한 얼굴을 한 아델의 물음.
햄버거를 으적으적 씹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포장 뜯었잖습니까.”
“그건 제 햄버거인데요...? 지혁 씨는 지금 월권행위를 하고 있어요...!”
“햄버거 포장을 뜯고 제 손에 올려놓으세요, 제 햄버거니 포장을 뜯으세요... 라는 말을 하셨어야죠. 그러질 않으셨으니 제가 먹으라는 줄 알고 먹은 건데...”
“제, 제가 어제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런 식으로 앞서나가는 행위는 금지라고...”
“압니다. 그냥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수발을 원하시길래... 서러워서 반항을 좀 해본 거에요.”
나는 내 몫의 햄버거 포장지를 뜯어 아델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받고 조신하게 빵 끄트머리를 물어 삼킨 아델이 말한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요. 하지만 지혁 씨는 적응하셔야 해요. 약속을 하셨으니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콜라를 제 앞으로 가져다주세요.”
“예.”
“케첩 짜주세요.”
“알겠습니다.”
“감자튀김의 기름을 손에 묻히기 싫으니, 제 입에 가져다주세요.”
물 만난 고기처럼 내게 온갖 명령을 하달하는 그녀.
나는 주변 눈치 따윈 보지도 않고 아델이 바라는 걸 모두 해주었다.
그런 우리를 본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찼다.
나만 좋으면 됐지 니들이 뭐 어쩔 건데?
눈꼴이 시렵다면 뭐... 별 수 없다.
맛있게 햄버거를 흡입한 아델은, 렌터카를 점검하고 있는 내 뒤에서 사진을 찍어댔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큼지막하게 들려서 어이가 없었다.
몰래 찍을 거면 카메라 어플이라도 사용하던가...
자동차의 외관을 다 살핀 나는, 누가 봐도 나 뭔가 했소...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델을 향해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타요. 관광 가게.”
“아, 네...”
조수석에 탄 아델은, 안전벨트를 매고는 무언가 바라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시동을 건 내가 네비게이션을 조작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 제가 아직 립밤을 바르지 않았는데...”
키스해달라는 소리로군.
이런 건 얼빵한 척하면 안 되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나는 아델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이것도 앞서나가는 건가요?”
“아, 아니요... 이건 특별히... 흡!”
아델의 말을 끊고 들어온 내 입술.
그녀가 숨을 훅 들이켜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난 그녀의 뒤통수에 손을 올리고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하며 입 안을 탐했다.
그에 따라 키스는 자연스레 격해졌고, 아델의 자그마한 콧구멍에서 뜨거운 바람이 새어나와 내 인중을 간지럽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흥분하기 시작하는 그녀.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예 조수석으로 건너가 아델을 온몸으로 누르면서, 그녀의 가슴에 손을 가져가 대놓고 움켜쥐었다.
“흐읍...!”
그러자 짧은 신음을 터뜨린 아델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이후 반대쪽 손으로 내 뺨을 밀어내며 말한다.
“지혁 씨...! 저는 여길 허락한 적 없어요...!”
“그럼 지금 허락해주세요.”
“안 돼... 안 돼요... 당장 제 몸에서 떨어지세요... 명령이에요...!”
명령? 개나 주라지.
나는 오히려 아델의 트레이닝 복을 가슴께까지 올린 뒤, 상복부에 입술을 대고 입김을 불었다.
“흐아아아...!”
크게 꿀렁거리는 아델의 허리.
다리를 모으려고 하는 걸 보니 가랑이가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나보다.
이런 때 묻지 않은 여자일수록 한 번 물꼬가 터지면 성욕이 폭발한다.
지금도 반응이 볼만한데, 거사를 치르고 나면 어떨지 정말 궁금해진다.
적당히 아델의 배를 따스하게 만들어주고 얼굴을 떼어낸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기분 좋았어요?”
“흐우... 감히... 약속을 어기시다니요...! 실망이에요...!”
“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오늘 새벽, 아델은 분명 자신의 부탁을 들어줘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방금은 명령이라고 하셨죠. 부탁이었다면 말씀대로 했겠지만, 명령이었으니 들어주고 말고는 제 마음입니다.”
“마, 말장난이에요! 지혁 씨는 저에게 사기를 치고 계세요! 아까까지는 말을 잘 들어놓고서는 이제 와서...! 핑계대지 않고 솔직하게 말씀하신다면 넘어가드릴 수도 있어요...!”
“.... 사실 욕망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운전석으로 돌아간 나는 최대한 반성하는 표정을 지었다.
연신 가쁜 숨소리를 내뱉던 아델은 이런 나를 못 말리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부턴 조심하셔요...”
“예... 죄송합니다.”
“후아...! 저는 우도라는 곳을 가보고 싶으니, 어서 운전을 하세요...”
오늘은 아마 관광 따윈 하지 못할 거다.
어제 네가 잘 때, 마르셀라에게 얘기해서 마물들을 두 군데 풀어놨거든.
조금만 운전하면 마기를 감지할 수 있을 걸?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자꾸나.
겸사겸사 신성력도 마구 쓰고.
“알겠습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