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1 나의 아델
피곤에 찌들어있는 눈, 기름기 가득한 머리.
퀭한 박사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그러자 박사가 기겁을 하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야...! 나 지금 얼굴에 기름 묻어있는데...”
“그런 걸 왜 따져. 우리 사이에.”
“그래도...”
“돌아가서 쉬어. 수고했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박사가 말한다.
“샤워는 집에서 할래.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렇게 해. 태워다줄게.”
“아냐. 차 두 대 가져왔잖아. 하나는 집에 놔둬야지. 밥 차려놓을까?”
“됐어. 알아서 챙겨먹을 테니까 푹 쉴 생각만 해.”
“응... 이따 봐요.”
작별인사를 하며 연구실을 나간 박사는 곧장 차를 몰고 떠났다.
세 마리의 마물과 두 명의 비스트 슬레이어가 나타났던 사건은 조용히 수습되었다.
박사가 세계연합에 넘겨준 실비아, 아델의 간략한 정보는 그대로 세상에 퍼져나갔다.
다른 행성에서 온 영웅들이라는 대목으로 말이다.
그로 인해 전 세계의 우주연구기관이 잔뜩 흥분해서 세계연합과 본부에 정보를 구걸하긴 했지만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나는 텅 빈 연구실을 둘러보다가 기지개를 켰다.
외롭다. 빨리 아델을 보면서 힐링해야 해.
간단하게 연구실을 정리한 나는 냅다 아델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아델이 없다고요?”
“응, 없어.”
의정부의 집에는 실비아 혼자만 있었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온 날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아델은 지금 교회에 갔을 거야. 어제 저녁쯤에 어떤 사람들이 집 근처 거리에서 물티슈를 나눠줬었는데, 거기 교회 이름이 박혀 있었거든? 그걸 본 아델이 관심을 보이더니 한 번 가보고 싶댔어.”
“그래요...?”
저번에도 성당에 관심을 보이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흥미가 돋았나보다.
아델의 팔랑귀는 알아주는 수준이긴 하지.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죠...”
“아델한테 연락도 안 하고 온 거야?”
“네. 그냥 왔습니다.”
“그렇구나... 보통 예배는 몇 시간 정도 해?”
“보통은 한 시간 안팎이면 끝나죠. 젊은 사람들끼리 뭐 친목회 같은 걸 하면 더 늦어지겠고요.”
“그래? 그럼 조금 있다 오겠네. 간지 한 시간 반 정도 지났거든. 들어와서 기다려.”
“감사합니다.”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실비아가 음료수를 따라주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마실게요.”
“기다리는 동안 심심할 거 같으니까, 나랑 여기서 영화나 한 편 볼래?”
“저야 좋죠. 근데 운동은 안 가세요?”
“오늘은 쉬려고.”
“그렇구나.”
소파로 자리를 옮긴 나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런 자연스러운 행동에 실소를 터뜨린 실비아는, 내 옆에 앉더니 리모컨을 조작했다.
그녀가 선택한 영화는 요즘 평이 좋은 로맨스였다.
솔직히 의외였다. 피와 살이 튀는 액션영화를 볼 줄 알았는데, 이런 달달한 영화를 보다니.
내가 벙 찐 표정으로 실비아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왜?”
“이런 영화도 좋아하세요?”
“그냥 보고 싶으니까 보는 거지. 그리고 난 이런 영화는 좋아하면 안 돼?”
“아닙니다.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는 없어. 보자.”
시원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드는군.
나는 편한 자세로 앉아 화면을 보았다.
영화는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로맨스 장르였다.
가끔 갈등을 겪지만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 금방 풀리고, 다시 열화와도 같은 사랑을 하는 그런 영화.
엔딩은 한참 남았지만 분명히 키스를 하거나 부부가 되는 걸로 끝나겠지.
내 입장에선 지루한 영화였지만, 실비아는 달랐다.
그녀는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주인공들의 모습을 눈에 담는 중이었는데, 그 모습이 퍽 아름다웠다.
“방금 쟤가 꺼지라고 한 거야?”
한창 집중하던 중, 뜬금없이 영화내용을 말하는 실비아.
내가 대답했다.
“그랬네요.”
“완전 나쁜 놈이네... 무슨 의미로 말한 걸까?”
“여자가 남자 자신의 치부를 들여다봐서 말한 것 같아요.”
실비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부? 피아노 치는 게 치부야?”
“누구나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은 있는 법이죠. 게다가 남자주인공은 어렸을 때의 사고로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잖아요. 실수를 계속 연발하는 연주를 여자가 우연찮게 듣게 됐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비웃을 거라고 생각하며 홧김에 심한 말을 한 듯싶습니다.”
“그런가? 나는 잘 이해가 안 되네.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는 상태잖아. 노력에 감동을 먹었으면 먹었겠지 비웃지는 않을 것 같은데?”
“충분한 소통이 필요한데 그러질 않았으니까 각자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버리는 거죠.”
“아하...”
감탄사를 내뱉은 실비아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도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어?”
들키면 아주 큰일이 날 비밀이 있긴 하지.
“당연히 있죠.”
“어떤 건데?”
그걸 말해달라고 하면 ‘예, 저는 당신과 아델이 애타게 찾는 마왕 타이라트입니다.’ 라고 순순히 지껄일 줄 알았냐?
“비밀이 왜 비밀이겠습니까.”
태연한 내 반박에 실비아가 피식했다.
“서운하네. 그래도 비밀 같은 건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과는 달라서 좋다.”
좋다고? 꼴리게 하지 마라.
애매한 표정을 짓는 날 보며 시원한 미소를 지은 실비아가 TV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묻는다.
“저 여자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왜 자꾸 남자를 염탐해? 좋아하면 그냥 대놓고 쫓아다니지.”
“사춘기 짝사랑이 다 그렇죠. 실비아 씨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저런 모습이 나올 걸요?”
“내가 그럴 사람 같아?”
“그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더욱 그런 법입니다.”
“웃기시네. 나는 절대 저런 식으로 하지 않아.”
과연 그럴까? 나중에 한 번 보자고.
우린 열띤 토론을 이어나가면서 영화를 시청했다.
실비아는 나와의 대화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입을 쉴 새 없이 놀려댔고, 나는 그녀의 장단을 잘 맞춰주었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된 지 40분이 지났을 시점, 현관에서 도어락 소리가 들리더니 아델이 들어왔다.
“언니! 저 왔...”
활기차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려던 그녀는, 내가 소파에 앉아있자 입을 앙다물었다.
잠시 당황해하던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언제 오셨어요?”
나는 거의 입만 뻥긋하듯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40분 정도 전에요. 아델도 앉아요.”
“네에...”
조신한 척 천천히 다가온 아델은, 나와 실비아의 사이에 앉으려다 공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머뭇거렸다.
그냥 내 옆에 앉으면 되지, 왜 굳이 사이에 앉으려고 하냐?
아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하던 나는, 그녀가 황급히 내 손목을 잡아끌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세요?”
“저 배고파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질투하는구나. 좋은 징조다.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실비아 씨도 같이 드실래요?”
말을 마치자마자 등 뒤에서 이는 따끔한 감각.
아델이 날 꼬집으며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라고 말이다.
“난 됐어. 둘이 잘 놀다와.”
같이 갔으면 볼만했겠는데... 아쉽다.
실비아에게 인사를 한 나는 잔뜩 뾰로통해진 아델의 손을 꼭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씩씩거리고 있던 아델은, 조수석에 타자마자 날 쏘아붙였다.
“왜 언니한테 밥 먹자고 해요?”
“아델은 실비아 씨를 아주 많이 좋아하잖습니까. 같이 가면 좋아할 것 같아서...”
“다른 파렴치한 생각이 있으셨던 건 아니구요?”
“파렴치한 생각...?”
“소파 자리도 넓은데 언니에게 딱 붙어있었던 이유는 뭐지요?”
“딱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오해에요.”
내 침착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델이 콧바람을 훅 내뱉으며 팔짱을 꼈다.
그런 아델의 팔을 툭 건드린 나는, 그녀가 벌레를 떼어내는 것처럼 과한 몸짓으로 어깨춤을 추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황급히 마음을 가다듬은 내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교회는 어땠나요?”
“몰라요.”
“별로였어요?”
“모른다니까요?”
“저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오늘 지혁 씨는 제 얼굴을 보지 못해요. 이건 벌이에요.”
“제가 왜 벌을 받아야 하나요?”
그 말에 아델이 황당한 표정으로 날 째려보았다.
얼굴 안 보여준다며?
“잘못을 하셨잖아요!”
“혹시 실비아 씨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한 게 잘못이었습니까? 그게 왜...”
“오늘 지혁 씨가 이곳에 오신 이유가 뭐지요?”
“아델을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언니에게 그런 제안을 해요? 절 보러 오셨다면서?”
“아...”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얼빵한 척하는 내게, 아델이 몇 번이나 헛웃음을 켰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지혁 씨는 정말 눈치가 없으시네요! 어떻게 제 마음을 이리도 모르시지요? 저는 지혁 씨의 마음을 아주 잘 아는데!”
그 반대일 텐데...
“죄송합니다.”
“속이 타네요 정말!”
“그런데 지금 질투하시는 건가요?”
“질투라니요! 저는 눈치 없는 지혁 씨에게...”
입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무는 아델.
안전벨트를 푼 내가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었다.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나는 내 시선을 슬쩍 피하는 그녀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처럼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을 해주셔도 알아들었을 텐데, 너무 타박만 하시니까 서운해서 반항심이 생기네요.”
“바, 반항심...!? 지금 저와 말다툼을 할 생각이신 건가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싸우면서 허비하기 싫은데 왜 제가 아델과 말다툼을 하겠습니까.”
이런 고백에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는 그녀의 뺨.
여기서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가자, 아델의 눈꺼풀이 잠깐 떨리더니 내려갔다.
나는 조수석 등받이에 손을 대며 아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부딪쳤다.
이에 그치지 않고 혀끝을 내밀어 그녀의 입술 전반을 슬쩍 핥았다.
“.... 흣...!”
놀랐는지 양쪽 어깨가 순식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그녀.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그런 아델의 허리에 조심스레 손을 올리자, 그녀가 눈을 번쩍 뜨면서 몸을 뒤로 뺐다.
접때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한 모양.
나는 천천히 손을 놓으면서 운전석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아델이 내 손목을 덥석 잡더니 촉촉해진 눈으로 날 주시했다.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행동.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은 이성보단 감성이 앞서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어제 공원에서 꼭 껴안고 잠깐 눈을 붙였던 것이 제대로 주효했던 모양.
나는 최대한 아델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상태로 다시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가져가 아주아주 약한 힘으로 눌렀다.
“흐앗...!”
우우웅...
아델의 귀여운 추임새와 함께 새어나오는 희미한 공명음.
디바이스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구나.
아델이 황급히 팔을 뒤로 뺐다.
충전 소리가 들릴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더 티가 나는 걸 모르고 있나보다.
오늘은 최소한 5에서 10퍼센트 정도는 충전해놓아야지.
그 다음 마물들을 내보내 충전량을 다시 떨어뜨려놓고, 아델에게 조급한 마음을 심어줘야겠다.
앞으로의 청사진을 그린 나는, 아델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세가 불편해서 그런데, 조금만 앞으로 와주세요.”
“.....”
아까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이 깨끗하게 사라진 아델은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심지어는 왼손으로 내가 걸친 블레이저의 앞섶을 잡기까지 했다.
그런 아델의 수줍은 행동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는, 그녀에게 확 달려들어 키스했다.
이번엔 간을 보지 않고 입술이 맞부딪친 순간 혀부터 쑤욱 넣었다.
그러면서 아델의 허리를 잡았던 손을 겨드랑이까지 올렸다.
“흡...!”
흠칫한 아델. 그와 동시에 디바이스의 공명음도 강해졌다.
스킨십에 대한 그녀의 거부감은 착실하게 벗겨져가고 있다.
또한 오늘 실비아를 향한 거리감도 약간이나마 심어주었다.
실눈을 뜬 나는 홍조를 띤 채 혀를 받아들이는 아델을 보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아델은 아주 순조롭게 내가 만들어놓은 수렁 속으로 빠져가고 있었다.
양발을 다 담갔으니까 쉽사리 빠져나오지는 못할 거다.
아니, 빠져나올 생각도 못하도록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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