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 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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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어딘가의 골목길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던 아델은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았다.
깔끔한 통화목록과 톡방을 본 그녀가 씩씩거렸다.
준비도 안 된 자신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면 사과를 해야 도리일진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다니.
지혁에게 처음으로 실망...
우웅-!
하려다가 말았다.
[잘못했습니다. 돌아와 주세요.]
지혁의 톡을 보고 황급히 답장을 보내려던 아델은 손을 멈추었다.
분노에 몸을 맡겨도 모자랄 판인데, 왜 지금 지혁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걸까?
화가 나긴 났다. 그러나 엉덩이 때문에가 아니라, 지혁이 자신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건드려서 열이 받은 거였다.
괜히 싱숭생숭해진 아델은 지혁이 알려준 디바이스 사용법을 확인해보면서 시간을 때우려다가, 여기가 밖인 것을 자각하고는 그만두었다.
우우웅-! 우웅-!
갑자기 여러 번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 지혁의 전화였다.
아델은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며칠 전 TV에서 본 장면이 생각났다.
연애에 대해 토론을 나누는 예능에서 본 바에 의하면, 남녀가 풋풋한 관계에 있을 때의 적절한 밀고 당기기... 즉, 줄여서 밀당은 서로를 더욱 그리워한다고 했다.
아델은 이런 상황이 그 밀당 타이밍이라고 확신했다.
인터넷에 있던 방법은 통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를 것이다.
왜냐? 전문가들이 무려 TV에 나와서 한 말이니까!
지혁은 자신을 놀라게 한 죗값을 달게 받아야 한다!
콧방귀를 낀 아델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
이후 골목길을 나와 먹자골목을 둘러보았다.
사방팔방에서 느껴지는 좋은 냄새. 당장 어느 한 가게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고 싶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데... 지혁과 함께 뭐라도 먹었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골목을 돌아다니던 아델은, 저 멀리서 짙은 남색의 슈트를 입은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크게 놀랐다.
‘헉!’
훤칠한 기럭지, 잘생긴 얼굴... 지혁이었다.
아델은 황급히 가까운 골목으로 달려가 거기 숨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지혁이 뭘 하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답지 않게 다급한 표정을 지은 채로 모든 가게를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행동을 보니 사람을 찾는 게 분명했다. 바로 자신을 말이다.
그는 계속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대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델 자신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려댔다.
저 정도면 충분히 반성하고 있는 것 같겠다, 아델은 전화를 받기로 했다.
“흐흠! 여보세요?”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내민 채로 지혁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잠깐 멈춰 있다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지혁.
그가 걱정스런 투로 말한다.
-뭐하느라 전화를 안 받으시는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요.
“아무 일 없는데요.”
-지금 어디 계세요?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택시를 탔지요.”
지혁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휴대폰을 잡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뭐가요?”
-제가 홧김에 아델의...
말을 멈추고는 주변 눈치를 보는 지혁.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델이 소리 내지 않고 킥킥거렸다.
“뭘 잘못했냐구요? 구체적으로 말씀해보세요.”
-아델의... 하아... 엉덩이에 손을 올렸습니다.
아델은 자신이 말을 실수했구나 싶었다.
지혁의 구체적인 설명을 들으니, 사무실에서의 일이 생각나서 괜히 자신이 낯부끄러워졌던 것이다.
고개를 푹 수그린 그녀가 말했다.
“여기가 저희 행성이었다면 지혁 씨는 파문이었어요. 성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요!”
-.....
사과하지 않는 지혁. 그 또한 자신처럼 부끄러워하는 걸까?
아델이 말을 이었다.
“왜 조용하지요? 양심에 가책을 느끼시는 건가요?”
지혁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잠깐 그가 말을 하길 기다리던 아델이 재차 물으려 할 때,
“함부로 라는 말씀은... 서로 좋다면 그래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녀의 바로 옆에서 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아악!”
기겁한 아델이 몸을 격하게 떨었다.
한쪽 무릎까지 들어 허공에 니킥을 갈길 정도. 그만큼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잠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됐지만, 아델은 그런 건 살필 겨를도 없이 자신을 찾아온 지혁에게 당황해했다.
“어, 어떻게 저를...!”
“찾아냈냐고요? 골목 코너 벽에 얼굴이 얼핏 보이던데요.”
“.....”
“택시 타셨다더니 아니었네요. 그렇게도 절 골려주고 싶으셨습니까?”
아델의 불그스름해진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그러자 지혁이 콧바람을 길게 내뱉더니 얕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의도였다면 제대로 통했습니다. 심장에 돌덩이를 얹은 것 같았어요. 제가 괜한 짓을 했구나 싶었죠.”
밀당이 통했구나. 역시 전문가들이다.
집에 돌아가면 그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찾기 해놓고 두고두고 봐야겠다.
그리 생각한 아델이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 골목에 오신 건가요?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줄 아셨지요?”
“아델이 배고프다고 했었잖아요. 그래서 먹자골목에 왔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우연이었는데... 그래도 둘러보면서 먹고 싶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런 힌트만으로 추측을 해서 찾아오다니... 아델은 지혁이 자신을 정말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혁이 정말 좋다. 당장 저 널따란 품에 안기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밀당 중, 지조 없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도저도 못한 채로 머뭇거리던 그녀는, 지혁이 성큼 다가와 자신을 안자 기뻐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반응은 속내와 전혀 달랐다.
“놓으세요.”
싸늘한 말투로 화가 난 척 말했음에도 지혁은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더 주어 꽉 끌어안았다.
지혁의 우람한 팔뚝에 머리가 죄다 가려져버린 아델은, 결국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팔을 올려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러자 지혁이 툭 내뱉듯 말한다.
“사랑은 계산적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델은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밀당 중인 것을 눈치채고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사랑은 계산적이어선 안 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지혁을 너무나도 좋아하는데, 배짱을 부린 것도 모자라 주판을 두드리면서 그의 감정을 조종하려 하다니... 너무 미안하다.
TV는 순 엉터리였다! 즐겨찾기를 하자고 생각했던 건 취소다!
‘좋다아...’
와이셔츠에서 지혁의 체취와 그가 자주 사용하는 향수냄새가 섞여 향긋한 냄새를 자아냈다.
먹자골목에서 느꼈던 냄새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좋다.
지혁을 만나다보면 성녀로서의 지조를 잃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로사리오 님께서는 사랑에 무척 관대했다.
평소 때는 성녀의 기품을 유지한다면 주님도 이해해주시리라.
풋풋하고 달콤한 기분을 느끼던 아델은, 문득 지혁의 탄탄한 가슴을 깨물고 싶어졌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그런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지혁이 자신의 등허리와 엉덩이를 눌러서 반항심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깐 자신의 엇나간 생각에 혼란스러워하던 아델은, 이어지는 지혁의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밥 먹고 영화 보실래요? 아니면 영화 보고 밥 먹을래요?”
그래, 지금은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지혁과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데 집중해야 한다.
“밥 먹고 볼래요...”
“그럼 갈까요?”
한창 달달한 때에 가자고 하다니... 싫다.
큰 용기를 낸 그녀가 말했다.
“조, 조금만 이러고 있다가 가요...”
아까 사무실에서 지혁이 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 아델.
지혁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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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늦는다?”
실비아의 물음. 방금 막 집으로 돌아온 아델이 방글방글 웃으며 대답했다.
“지혁 씨랑 있었어요.”
“평소보다 더 웃네? 오늘 진짜 좋았나보다.”
“네. 디바이스도 받았어요. 저도 이제 비스트 슬레이어에요. 이것 좀 보셔요.”
아델이 오른쪽 팔을 올려 디바이스를 보여주었다.
그에 흥미로운 눈을 한 실비아가 후다닥 달려와 디바이스를 살폈다.
“이게 디바이스야...? 아이테르가 들어가 있는?”
“맞아요. 지혁 씨가 곧바로 언니의 디바이스도 제작한대요. 똑같은 디자인으로 만들 거니까 언니한테 기능을 설명해주라고 했어요. 지금 들으실래요?”
“당연하지. 어서 알려줘.”
“네, 먼저 포탈을 사용하는 버튼인데요. 이건 아이테르 에너지가 감지되면...”
아델은 지혁에게 들었던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실비아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전량 표시 버튼을 누른 아델은, 수치가 [50%]라고 나와 있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사무실에서 지혁과 함께 충전량을 보았을 땐 분명 49퍼센트였다.
그런데 지금은? 1퍼센트가 올라 있었다.
“50퍼센트... 너도 많이 썼구나.”
다행스럽게도 실비아는 디바이스에만 관심을 가지느라 아델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은 아델이 말했다.
“네... 많이 썼어요... 저 이만 샤워하러 가 봐도 될까요?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아파요.”
“목이랑 샤워랑 무슨 상관이래? 알았어. 설명은 다 이해했으니까 가도 돼. 나중에 변신하는 모습도 보여줘.”
“물론이에요. 참, 그리고 제 활동명은 셀린이에요.”
“셀린? 엄청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그렇죠? 지혁 씨가 정해주셨어요. 언니도 디바이스가 만들어지면 활동명이 정해질 거에요.”
“그거 기대되네. 잘 좀 지어주라고 말해야겠다.”
실비아의 대답에 배시시 웃은 아델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옷을 훌러덩 벗어던진 그녀는 곧장 욕조에 들어가 스파 버튼을 눌렀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물거품. 절로 나른한 숨소리를 내뱉은 아델이 거기에 발을 올려다놓았다.
종아리 부근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일자 혼자 까르르 웃던 그녀가 돌연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충전이... 됐어...’
1퍼센트가 오른 충전량.
아이테르는 좋아하는 사람과의 성적인 행위로 힘을 보충한다.
이 말인 즉, 자신은 지혁의 행동을 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흥분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런 낯뜨거운 행위를 더 해야 한다는 걸까?
게다가 고작 1퍼센트밖에 안 올랐다면... 오랜 시간을 그런 식으로...
생각만 해도 창피해서 얼굴이 들리지 않았다.
“하아...”
한숨을 내쉰 아델은 거치대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을 들었다.
지혁에게 톡이 하나 와있었는데, 내용을 읽어본 아델의 입이 짜악 찢어졌다.
[내일도 만나요.]
평소엔 자신이 먼저 만나자고 들이댔었는데, 이번엔 지혁이 먼저 해주었다.
아까 자신을 애타게 찾던 모습도 그렇고, 밥을 먹을 때나 영화를 볼 때 보여주었던 행동들도 그렇고... 오늘 지혁은 애정표현이 너무 과했다.
그게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이 느껴져서 아주 좋았다.
아델은 어쩌면... 어쩌면 지혁과 함께라면 충전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굳은 마음을 먹은 그녀가 톡을 보냈다.
[좋아요. (。♥‿♥。)]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은 지금 지혁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혁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한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애정표현이 과감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지구의 커플들은 진도가 꽤나 빠르다고 했다.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자신은 지금 지구에서 사는 중이었고, 앞으로도 살 예정이었으니 여기에 적응해야 맞았다.
또한 지혁이 아니라면 그 누가 충전을 해주겠는가?
무조건 그와 해야 한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마음을 굳게 먹은 아델은, 지혁이 중후한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물거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로사리오에게 답을 구했다.
‘주님... 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옳은 선택을 했지요? 맞다고 말씀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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