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8 비스트 슬레이어 셀린
“나 오늘도 늦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연구실에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날 향한 박사의 말이었다.
와이셔츠를 입던 내가 물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냥 집에 가서 쉬지?”
“하루 이틀만 더 고생하면 편해지니까... 그냥 한 번에 마무리하고 푹 쉬려고.”
“그럼 그렇게 해. 나 간다?”
“잠깐만...”
키보드를 따닥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박사는, 내게 다가와 방향이 어긋난 넥타이를 잘 고쳐주었다.
이후 어깨선을 툭툭 털어주며 내 입술에 간단한 키스를 했다.
“잘 다녀와요.”
씨익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연구실에서 나와 강남으로 향했다.
내가 들른 곳은 요식업 프랜차이즈.
여기서 아델과의 밀회를 즐길 생각이었다.
연락은 연구실에서 나가자마자 해놓았으니, 날 보고 싶어 하는 아델은 금방 올 것이다.
‘아람이가 없어서 아쉽군.’
질투심을 유발하는데 있어 아람만큼 좋은 카드가 없다.
적당히 예쁘고, 유능하기까지 하니까.
세화도 아람이에게 한 번 질투를 느낀 적이 있었다.
당시 악의를 꽤 많이 주입한 상태라, 홍채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가 돌아왔었지.
어쨌든 아람을 부르려면 부를 수 있지만, WW엔터와 사업을 연계하고 있느라 바쁘니까 넘어가자.
사장실 책상에 앉아 열심히 디바이스를 만들고 있던 나는,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피식했다.
아델이 제법 강하게 노크를 하는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여니, 상기된 얼굴의 아델이 한손을 어깨높이까지 들고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지혁 씨! 여긴 사람들이 발에 치일 정도로 너무 많아요! 건물은 엄청 높고...”
관광 소감이라도 말하고 싶은 듯 내 앞에서 신나게 조잘거리는 아델.
나는 온화한 미소를 띤 채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델이 내 전신을 아래위로 훑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정장차림의 내가 마음에 든 것 같다. 아니면 어제의 그 혀 사건이 기억났거나.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소파에 앉힌 내가 물었다.
“혼자 올라온 거에요?”
“아니요... 안내직원께서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주셨어요...”
아델은 방금 전 보여주었던 하이 텐션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수줍어하고만 있었다.
힘이 나게 만들어주지. 잠시 그녀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디바이스를 가지고 왔다.
“아델의 디바이스에요. 방금 막 완성됐고, 이 가운데에 아이테르만 넣으면 됩니다. 지금 해보실래요?”
그 말에 아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자신의 보관함을 꺼냈다.
“이, 이제 어떻게 해요?”
난 말없이 디바이스의 한쪽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아주 자그마한 대롱 같은 것이 옆에서 튀어나왔다.
아이테르를 옮기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둔 것이었다.
“보관함을 열어보세요. 아주 조금만.”
“네...!”
아델이 떨리는 손으로 보관함을 조작했다.
소리조차 없이 원형으로 작게 열린 보관함의 윗부분.
그 부분에 대롱을 댄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얼마 뒤,
스으으...
모래사장에서 바람이 부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나더니, 아이테르가 아주 조금씩 대롱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이테르는 이내 보관함에서 다 빠져나가 디바이스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고, 새로 얻은 집을 살펴보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디바이스 전체로 퍼져나갔다.
우우웅...!
알록달록하게 빛나기 시작한 디바이스는 휘황찬란한 무지개색 빛을 사방팔방으로 뿜어내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델은, 생긋 웃은 내가 디바이스를 내밀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제 공식적으로 비스트 슬레이어가 된 겁니다.”
“.....”
똥글똥글했던 아델의 눈이 가라앉더니 결의가 가득 찼다.
비스트 슬레이어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겠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디바이스를 받은 아델은, 내가 팔에 시계를 차는 시늉을 하자 그대로 따라했다.
철컥!
얇은 손목에 자동으로 착 감기는 디바이스의 스트랩.
아델이 침을 꼴깍 삼키고 날 올려다보았다.
“뭔가... 제 몸에 뭔가가 들어온 느낌이 확 났다가 사라졌어요...”
“아이테르와 동화된 것 같네요. 변신해보실래요?”
“지, 지금이요?”
“네. 아무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 번 터치하면 자동으로 반응할 겁니다. 변신을 해제할 때도 똑같아요.”
“잠깐만요...! 심호흡...! 심호흡!”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길 반복하던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내가 리모컨으로 사장실의 커튼을 전부 닫는 것을 본 아델은, 눈을 질끈 감고 디바이스 화면을 터치했다.
키잉-!
**
찬란한 금빛 광채. 눈이 멀어버릴 것 같다.
나는 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변신한 아델의 모습을 두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아델은 세화나 유리아처럼 극단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머리카락도 기존의 색인 밝은 금발을 유지했다.
하지만 눈만큼은 달랐다.
에메랄드 같던 녹색 홍채가 금색으로 바뀌어있었던 것이다.
아몬과 싸웠을 땐 외견의 변화가 없었는데 왜 지금에서야 완전한 변신을 이루었을까?
그건 바로 폴리머스 덕분이었다.
실비아의 행성에서 만든 아이테르 보관함은, 이름대로 그저 보관만 하는 용도다.
그 상태에서 변신한다는 건, 가공 전의 보석을 그대로 반지에 끼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디바이스 전체를 구성한 폴리머스는 우주에서 가장 완벽한 물질이며, 아이테르와 동화되어 그 에너지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한다.
이로 인해 아델의 육체는 한 층 더 강화됐을 터. 여기서 신성력까지 있으니... 바야흐로 진정한 괴물이 탄생한 거다.
‘고맙다, 에드워드 파슨스.’
놈은 내게 축복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디바이스의 기반을 다져줘, 일찍 뒈져서 아름다운 박사까지 내게 넘겨줘... 기특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속으로 그에게 감사인사를 전한 내가 한손으로 눈을 가리며 물었다.
“기분은 어때요?”
그 말에 자신의 온몸을 살펴보고 있던 아델이 날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힘이... 넘쳐흘러요...”
저 대사는 세화가 타락한 이후 내게 했던 말이었는데... 괜히 꼴리잖아.
“나중에 연구실이나 의정부에서 마음껏 다시 변신해보시고, 지금은 해제하세요. 여긴 강남 한복판에 있는 회사 안이니까요. 혹시라도 누가 의심하면 골치 아파집니다.”
“아, 알겠어요...”
다시 화면을 두 번 터치해 변신을 해제한 아델.
그러자 아델의 몸을 두르고 있던 빛이 디바이스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완전히 사라지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공중에 붕 떴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홍채는 다시 녹색으로 돌아온 상태.
빛으로 인한 안통 때문에 눈 윗부분을 꾹꾹 누르던 나는, 잔뜩 흥분해있는 아델에게 다가가 말했다.
“활동명은 셀린으로 할까 합니다. 비스트 슬레이어 셀린, 어때요?”
“셀린...”
셀린이라는 이름을 한 번 되뇐 아델이 냅다 소리쳤다.
“마음에 들어요!”
“고민이라도 하고 대답하시지...”
“싫어요! 셀린으로 할래요!”
셀린이 아니라면 태업도 불사할 것 같은 태도에 헛웃음을 켠 나는, 아델을 다시 소파에 앉히고는 나 또한 그녀의 옆에 앉았다.
“나중에는 슈트도 만들어드릴게요.”
“네!”
“이제 여러 기능을 알려드려야겠죠? 여기 있는 버튼은 포탈이에요. 본부에서 이블리언 에너지를 감지하면, 마물의 출몰장소와 가장 가까운 포탈로 위치가 자동 입력됩니다. 누르기만 하면 포탈이 생성되고, 그 위치로 순식간에 갈 수 있어요. 저번처럼 전투기를 탈 필요가 없다는 얘기죠.”
“와아...!”
“그리고 이건 통신기인데...”
그녀는 어느새 내가 옆에 딱 달라붙어있는 것도 모른 채로, 내 설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아델이 알아듣기 쉽게 디바이스의 기능들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 됐다.
“마지막으로, 가운데 아래에 있는 건 충전량을 표시해주는 버튼이에요. 제가 한 번 눌러볼게요.”
딸깍!
버튼을 누른 순간 허공에 뜨인 숫자.
반투명한 흰색으로 빛나고 있는 충전량은 [49%]라고 표시되어있었다.
아몬과 싸우기 전엔 90퍼센트 이상이었는데, 상당히 소모됐구나.
괘씸한 놈이라도 쓸모가 있단 말이지.
“절반 조금 안 되게 사용하셨네요.”
“네...”
말끝을 늘어뜨린 아델이 내 눈치를 보았다.
아이테르의 충전방식을 기억해낸 모양.
그녀의 귀여운 반응에 낮은 웃음을 터뜨린 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물쭈물하면서 휘파람을 불기 시작하는 그녀.
눈동자를 데굴 굴리는 걸 보니 상황을 무마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되도 않는 행동을 하는 모습이 정말 웃기다.
어떻게, 여기서 충전을 시도해볼까?
사전작업은 착실하게 해왔다. 디바이스도 완성된 상태니까 한 번 해보자.
나는 슬쩍 아델의 새끼손가락을 잡고 내 무릎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손톱을 살살 문질렀다.
“네일이 깨졌네요. 저번엔 깨끗했는데.”
“네에... 마물이랑 싸우다가 조금...”
“다시 하러 갈 건가요?”
“모, 몰라요... 근데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나는 아델의 새끼손가락과 넷째 손가락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아델이 소파 등받이에 얼굴을 푹 묻었다.
내게 잡힌 손은 빼려고 하지 않는 상태.
아주 좋은 징조였다. 나는 조금 더 나아가서, 그녀의 손 전체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후아...”
이윽고 뜨거운 한숨을 내뱉기 시작하는 그녀.
저건 그냥 부끄러워서 나오는 반응이었다.
디바이스 또한 조용했다. 아델이 이 스킨십을 성적인 행위라 생각하고 흥분했다면 충전이 됐을 테지.
난 손 마사지를 멈추고 엉덩이를 옮겨 아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이런 내 행동에 화들짝 놀라선 소파 구석으로 도망쳤다.
그런 아델의 겁먹은 반응에, 나는 실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는데요?”
“저,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나도 알고 있어.
오늘은 허리만 건드려볼게. 충전이 되나 안 되나 확인만 하려는 거야.
양팔을 쫙 벌린 내가 말했다.
“그냥 안고 싶어서 다가간 거에요. 다른 생각은 안 했습니다.”
“.....”
경계심 어린 눈초리의 아델.
지금 내 저의를 의심하는 건가? 이건 좀 실망인데... 아무리 상황이 묘하다고 해도 서운하네.
“안 올 거에요?”
나긋한 내 목소리에 안심한 걸까?
아델이 머뭇거리더니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팔을 감더니 말한다.
“영화보고 싶어요... 배도 고파요...”
“조금만 이러고 있다가 나가죠.”
“네...”
나는 아델을 부서져라 안으면서, 은근슬쩍 손톱을 세워 그녀의 척추기립근을 콕 찔렀다.
움찔하는 아델의 몸. 디바이스는 여전히 조용했다.
조금 실망한 나는 실수인 척 손을 내려 손가락으로 그녀의 중둔근... 즉, 엉덩이 윗부분을 눌렀다.
“흐아아...”
내 명치부근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델이 나른한 숨을 내뱉었다.
동시에 우우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세하지만 분명히 들었다. 디바이스는 충전이 되고 있다.
아델이 내 행동에 아주 약간이나마 흥분했다는 증거.
엄청난 희열을 느낀 나는 조금 과감해져보기로 했다.
내게 안기느라 약간 들려진 아델의 대둔근까지 손을 가져간 나는, 방금처럼 손가락으로 그 부위를 꾸욱 눌렀다.
“히약!”
그러자 깜짝 놀라선 소리를 지른 아델이 내 가슴팍을 확 밀쳤다.
이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헉헉거리면서 날 노려보더니, 이내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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