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194화 (194/471)

EP.194 성녀의 입술은

의정부의 어느 공원.

인적이 드문 이곳의 벤치에서, 나는 아델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삐쳤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중이었다.

날 벤치 구석에 몰아넣고 팔짱을 낀 채로 맞은편에 서서, 마치 교도관처럼 눈을 부릅뜨며 날 감시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건 덤.

성경을 읽으면서 그녀의 눈치를 보던 나는 엉덩이를 달싹였다.

자리가 제법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델이 건수를 잡았다는 듯 눈에 불을 켰다.

“이틀 동안 연락도 없던 지혁 씨, 출장에 집중하신 것처럼 성경에도 집중하셔야지요?”

“자세가 조금 불편해서...”

“학습태도가 불량해요!”

“.... 창세기는 다 끝냈습니다. 과도기 주세요.”

그 말에 아델이 가방에서 거대한 공책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내 무릎에 탁! 소리가 나도록 올려놓았다.

“여기 있어요!”

이번 것도 직접 쓴 티가 나는 엉성한 성경이었다.

[과도기]라고 귀여운 필체로 적혀져 있는.

여러 행성을 안정시킨 로사리오가 규율을 정한 뒤, 본격적으로 교리를 퍼뜨리는 과정이 적혀져있는 로사리오교 성경의 두 번째 권이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책을 보며 혀를 내두른 내가 물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봐도 될까요?”

“아니요!”

“지금까지 네 시간동안 성경만 읽었습니다. 봐주세요.”

“으음... 좋아요. 10분을 드리겠어요.”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30분은 줘야...”

“그렇게 계산적으로 행동하면 안 되어요! 그리고 지혁 씨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더 높은 직급의 교도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는 거죠!”

“수업도 쉬는 시간은 기본으로...”

“조용히 하세요!”

“알겠습니다.”

아쉬운 듯 혀를 찬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벤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 다음 다리를 살짝 벌리려고 하는데, 아델이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아서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아델, 자리도 많은데 조금만 옆으로 가주세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딱딱하게 앉은 자세로 정면만 주시할 뿐.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편의점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런 내 뒤로 아델이 후다닥 달려오며 묻는다.

“지금 어딜 가시는 거죠? 설마 도망을...”

“도망이 아니라 편의점에 가는 겁니다. 먹거리라도 사오려고요.”

“그렇다면 같이 가도록 하지요.”

아델은 뒤를 따라오면서 내 손목을 툭툭 건드렸다.

걸어가면서 자연스레 부딪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잡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간을 보는 것이 분명했다.

절로 흐뭇한 미소가 새어나온 나는, 아델이 손목을 칠 타이밍에 맞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

짧은 탄성을 터뜨린 아델.

나는 자리에 멈춰 서서 아델을 내 옆으로 옮겨왔다.

그녀의 주먹은 내 손 안에 다 들어갈 만큼 작았다.

꽉 쥐어져있었고, 긴장한 듯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이런 조막만한 손으로 망치를 휘두른다니... 세상 참 말세다.

“갈까요?”

“.... 네...”

내 옆엔 아까의 삐친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부끄러워하는 처녀만 있었다.

기세등등했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는 모습을 보니 웃기기도 하고, 예쁘기도 했다.

땅만 쳐다보면서 길을 걷는 아델. 그녀를 바라보던 내가 제안을 하나 했다.

“아델.”

“왜요...”

“우리 재미있는 거 할래요?”

“뭔데요...?”

이를 드러내며 환한 미소를 지은 나는, 아델의 오른발 옆면에 내 왼발을 딱 붙였다.

그 뒤 힘을 주어 아델의 오른발을 조금 들리도록 한 다음, 내 발과 동시에 땅을 딛도록 했다.

이후 몇 걸음 걸어가니, 이 2인 3각 놀이에 적응을 한 아델이 까르르거리면서 나와 보폭을 맞추었다.

그렇게 우린 서로의 손을 꼭 맞잡은 채로 처음엔 천천히, 이후엔 속도를 붙여서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화는 다 풀린 것 같구나.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델은 알기 쉬워서 좋단 말이지.

**

한동안 성경에 집중해서인지 눈에서 안압이 느껴졌다.

더 읽다간 두통으로 바뀔 것 같았기에, 나는 성경을 덮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싶었지만, 움직이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자고 있는 아델이 깰까봐 그러지 못했다.

아델의 손은 내 허리춤에 내려가 있었다.

사타구니 바로 위에 올라가있는 그녀의 여린 손.

손톱의 흰 네일은 여전히 광택으로 빛나는 상태였다.

어느 샵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력 한 번 좋네. 세화는 일주일 만에 벗겨지고 깨진다고 칭얼거렸었는데... 나중에 아델한테 물어본 다음 알려줘야지.

아델의 손을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깨어났다.

눈을 게슴츠레 뜬 그녀는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벤치에 옆으로 누운 다음 내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어깨 근처에 있던 아델의 검은색 가방이 땅으로 떨어진 건 덤.

난 조심스레 발을 움직여 가방을 옮겼고, 손으로 윗부분을 집어 벤치 옆에 놔두었다.

‘어쩐다...’

아델에게 디바이스의 충전방식을 알려줘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잠을 자버리니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에라 모르겠다 싶었던 나는 선선한 바람으로 인해 흩날리고 있는 아델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너무나도 부드러운 머릿결. 마치 극세사를 만지는 것 같다.

“으움...”

그러길 얼마 후, 아델이 잠꼬대를 했다.

몸을 뒤척이면서 얼굴을 내 배 쪽으로 향하게 한 그녀는, 내 허벅지를 베개로 착각했는지 밑으로 손을 넣어 위치를 재조정했다.

‘미치겠네.’

나는 나도 모르게 아델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다.

얼굴이 워낙 작아서 손바닥이 크게 남는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으니, 아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지혁 씨...”

“예.”

“무거워요...”

“죄송합니다. 일어나실래요?”

“더 자고 싶은데...”

“댁으로 바래다드릴까요? 이제 곧 저녁이라 날씨도 추워질 텐데.”

“아직 괜찮아요. 추워지면 갈래요.”

이런 어리광을 일일이 받아주면 버릇 나빠지는데...

“알겠습니다.”

만족스런 얼굴로 대답을 들은 아델이 자세를 바꾸었다.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정자세로.

그 상태에서 날 올려다보던 그녀의 선홍색 입술이 열린다.

“지혁 씨가 좋아요.”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노을이 지는 저녁 분위기에 취해서? 아니면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아 잠결에 속내가 튀어나온 건가?

뭐든 상관없다. 아델의 진실한 고백을 들은 소감은 그야말로 최고였으니까.

지금은 계산적인 생각 따윈 넣어두자.

“.... 저는 이런 기분은 처음 느껴봤어요.”

이어지는 아델의 말.

내가 물었다.

“어떤 기분이요?”

“말랑말랑한 기분이요.”

그 말랑말랑한 게 뭔지 나로서는 전혀 가늠이 안 가지만, 무척 긍정적인 기분임이 틀림없었다.

양쪽 입꼬리를 짜악 찢은 나는, 이 무르익은 분위기를 그대로 따라가 보자고 다짐했다.

나는 아델의 이마에서부터 앞머리까지 살살 쓸어 넘기면서 고개를 서서히 내렸다.

아주 천천히, 마치 굼벵이처럼.

“.....”

처음엔 그저 내 손길을 느끼기만 하던 아델은, 내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눈을 크게 떴다.

가빠져가는 그녀의 호흡. 콧바람을 내뱉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 상황이 매우 낯설어서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원래라면 여기서 멈추고 아델의 의사를 물었을 테지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여태까지 너한테 많이 맞춰줬으니까 보상을 줘라.

서로의 얼굴과 얼굴이 거의 맞닿을 때쯤, 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아델이 좋습니다.”

“.....”

그 말에 아델의 목젖이 크게 꿀렁거렸다.

꿀꺽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딱히 만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결심을 한 듯싶다.

나는 더 뜸을 들이지 않고 아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그와 동시에 질끈 감기는 아델의 눈.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성녀의 입술을 처음 훔친 기념비적인 날.

느낌은 그냥... 말랑말랑했다.

**

의정부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아델은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꽉 쥔 채 조수석 창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를 흘긋거리면서 다음 약속을 잡았다.

“내일 저녁에 들를게요. 연락하면 나오세요.”

아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위아래로 허겁지겁 주억거리기만 했다.

키스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던데... 어지간히 부끄러웠나보네.

나중에 혀를 집어넣을 땐, 기겁하면서 뺨을 갈기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제가 불편하세요?”

이어지는 질문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그녀.

얕은 한숨을 내쉰 내가 말했다.

“저 운전하고 있잖습니까. 아델의 반응을 확인해보려고 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요?”

“.....”

“그러니까 행동으로 대답하지 마시고, 말로 해주세요.”

“.... 어요...”

“네?”

“알았다니까요...”

귀를 쫑긋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래... 대답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사탕 드실래요?”

“아니요... 네...”

먹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그냥 주자. 콘솔박스를 연 나는 새로 사놓은 민트향 사탕을 꺼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로 보아 입 안에 대여섯 개 정도 들어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잠자코 운전에 집중하고 있으니, 사탕을 다 먹은 아델이 기다란 숨을 내뱉는다.

“후아...”

운전석까지 은은하게 퍼지는 민트향. 지금 내 기분만큼 시원하다.

한숨을 내쉬고는 또다시 안전벨트를 꽉 쥐는 아델.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아델에겐 다행스럽게도, 공원과 집까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별채 입구에 차를 세운 나는 그녀를 불렀다.

“아델.”

“왜요...”

“도착했습니다.”

“.....”

그제야 벨트에서 손을 놓은 아델이 날 쳐다본다.

“지혁 씨...”

“예, 말씀하세요.”

“저를 어떻게 하실 속셈이신가요?”

누가 듣는다면 오해하기 딱 좋은 질문이로군.

게다가 속셈이라니... 단어선정이 참 거시기하다.

내가 입을 살짝 벌리며 황당한 표정을 짓자, 자신의 실책을 자각한 아델이 황급히 말을 정정한다.

“마, 말을 잘못했어요... 이제부터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라고 여쭈려 했어요.”

“말이 헛나와도 한참 헛나왔네요. 그렇죠?”

“네...”

“저는 오늘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아델은 어때요?”

“저, 저도 똑같아요...”

“후회하십니까?”

“아니요...”

망설임 없이 나오는 아델의 대답.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린 내가 다시 물었다.

“기분은 어땠나요?”

그 질문에 어깨를 움찔 떤 아델이 곰곰이 생각을 하다 답을 내놓았다.

“좋았던 것 같은데에... 아니, 좋았어요...”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 후회가 없고, 기분까지 좋았다면 된 것 아닌가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델이 대시보드에 이마를 쿵! 하고 찍었다.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빨개진 상태.

반응이 너무 순수하잖아.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해도 이 정도로 창피해하다니...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할 예정인데 버틸 수 있겠어?

아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나는 슬슬 아이테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이, 이만 가볼게요!”

아델이 돌연 소리를 지르더니, 조수석 문을 벌컥 열고 차에서 내렸다.

이후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현관문을 향해 쌩하고 달려갔다.

그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하려 했는데... 저러면 집에 찾아가기도 그런 상황이 됐잖아.

묘한 분위기를 따라갔는데 일이 어그러져버렸다.

아니, 어그러진 게 아니라 오히려 잘된 거지.

키스를 하기 전에 충전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면, 이후에 내가 들이댈 때 저의를 의심할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어깨를 으쓱인 나는 차를 자동운행모드로 설정해놓은 다음 휴대폰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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