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7 말랑말랑
다음 날 오후.
세계 감시라는 명목으로 연구실에서 디바이스 제작에 몰두하고 있던 나는, 아델의 톡을 받고 피식했다.
[심심하다... (๑-﹏-๑)]
실비아는 집에 없나?
네가 좋아하는 게임이라도 하던가.
그녀의 톡을 씹고 10분이 지나자,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왜 무시해요? (๑❛ᴗ❛๑) 참고로 지혁 씨가 제 톡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다 나온답니다. 별표가 사라지면 읽었다는 뜻이에요! 모르실까봐 알려드려요!]
그건 나도 알아. 그냥 널 무시한 거야.
저 밝은 이모티콘이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나는 키패드를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바빠서...]
[디바이스 만들고 계셨죠? 실비아 언니도 없는데 연구실에 가도 될까요?]
[오면 할 일이 없을 텐데요.]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절대 방해하지 않고 구경만 할게요.]
[그럼 오세요.]
[٩( ᐛ )و]
문자를 끝내고 다시 제작에 착수하던 나는, 아델이 올 시간이 됐을 때쯤 어제 박사의 집에서 가져온 샌드위치를 꺼내놓았다.
얼마 뒤,
푸쉬익-!
연구실 문이 열리더니 만면에 미소를 띤 아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패션은... 긴팔 소매 부분이 하늘하늘한 흰색 플레어 원피스구나.
밑단은 무릎이 약간 보일 정도. 리본이 달린 샌들도 잘 어울린다.
빵빵한 검은색 백팩은 옥의 티긴 하지만.
“지혁 씨! 안녕하세요!”
실내화로 갈아 신은 아델의 밝은 인사.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아빠미소를 지으며 휴게실을 가리켰다.
“샌드위치 드세요. 휴게실 탁상에 올려놨어요.”
“저 밥 먹었어요!”
“그럼 배고프실 때 드세요.”
“알겠어요. 참, 저는 없다고 생각하시고 일 보셔요. 아시겠죠?”
“네. 그러겠습니다.”
아델은 곧장 휴게실로 들어갔고,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에 손을 가져갔다.
이후 입을 우물거리면서 편한 자세로 TV를 보기 시작했다.
밥 먹었다더니... 어이가 없네. 하긴, 저래야 아델이지.
어깨를 으쓱한 나는 제작대에 앉아 용접기를 들었다.
디바이스를 만드는 중간중간에 아델이 무얼 하나 살펴보았는데, 그녀는 많던 샌드위치를 다 먹고도 모자랐는지 휴게실에 비치된 과자를 먹거나, 냉장고 문을 열어 음료수를 꺼내 마시거나 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 절로 흐뭇한 미소가 새어나온다.
그녀는 곧 식곤증이라도 찾아왔는지 잠에 들었다.
소파에 일자로 누워 쌕쌕거리며 자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꽉 안아주고 싶어.
나는 아주 조용히 휴게실로 들어가서, 얇은 이불을 아델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 뒤 다시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지혁 씨.”
아델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날 부르자 멈칫했다.
“죄송합니다. 깨워버렸네요.”
“애초에 잠들지도 않았답니다. 그냥 눈만 감고 있었어요.”
그러냐...? 누가 봐도 자는 것 같았는데.
“그렇군요.”
키득거리면서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아델.
이불의 감촉을 확인해본 아델의 입가가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
“너무 부드러워요. 이거 가져가도 돼요?”
“그러세요. 그런데 실비아 씨는 어디 갔나요?”
“언니는 매일 운동만 해요. 오늘은 격투기 도장에 등록한다고 했어요.”
“그녀답네요. 아델은 하고 싶은 건 없으십니까?”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고 싶고, 피크닉도 가고 싶어요. 지구의 바다도 보고 싶구요. 하지만 혼자서는 외로워요.”
“실비아 씨께 말하면 같이 가주실 텐데요?”
“언니는 지구의 생활을 즐기고 있어요. 방해하기는 싫어요.”
그럼 난 방해하고 싶냐? 이런 괘씸하고 앙칼진 것.
그래서 더 좋아...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겠네요?”
“요즘은 그래요.”
“그럼 오늘은 저랑 영화 보실까요?”
아델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기쁜 표정. 하지만 내가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시무룩해졌다.
“아니어요. 오늘 하루 종일 디바이스를 제작하신다고 했잖아요. 방해하지 않을 거에요.”
“쉬는 시간도 없이 제작한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근처 영화관에서 가장 빠른 시간 영화로 한 편 보고 돌아오죠.”
“세계 감시는요?”
“저와 박사님의 휴대폰에 다 연동되어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곧바로 알림이 울릴 테죠. 어떻게 하실래요?”
아델의 귀가 팔랑거리는 게 보이는 것만 같다.
혹하고 있다는 소리. 얼른 승낙해라.
나도 너랑 영화 보고 싶어서 미치겠어.
“보, 볼래요...!”
소파에서 잽싸게 일어난 아델이 벗어둔 실내화를 반대로 신고는 좋아라했다.
방방 뛸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은 내가 말했다.
“실내화 반대로 신었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나갈 거니까!”
“그렇긴 하네요. 가죠.”
“네!”
**
“우와... 진짜 맛있다...!”
버터 오징어를 입에 우겨넣은 채로 우물거리는 아델.
표를 확인하고 있는 내 눈치를 슬쩍 본 그녀가 오징어 하나를 내민다.
“지혁 씨도 드세요. 이거 엄청 맛있어요.”
나는 자연스럽게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자 아델이 오징어를 내 입에 넣어주다가 목젖을 툭 건드리고 말았다.
“커헉! 콜록!”
순간적으로 기침을 터뜨린 내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변했다.
아델은 그런 날 향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괜찮아요?”
몇 차례의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괜찮습니다.”
“어떡해요... 아팠어요?”
“그냥 기침만 나왔던 겁니다. 제 실수기도 하니 신경 쓰지 마세요. 시간 됐으니까 들어가요.”
“네...”
상영관 안에서도 아델의 추태는 계속됐다.
사운드가 빵빵한 광고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거나, 버릇대로 다리를 교차하다가 앞좌석을 툭 차거나, 팔걸이에 달린 컵 홀더에 휴대폰과 콜라를 함께 놓으려 하다가 쏟을 뻔하거나...
맹탕 같은 행동을 많이 보여주었고, 그 수습은 전부 내 몫이었다.
몇 번의 실수 끝에 영화관 에티켓을 온몸으로 터득한 아델은, 주위가 시커멓게 변하면서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자 내게 귓속말을 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귀에서 야릇한 감각이 일어난다.
숨결 한 번 따뜻하구나. 꼴린다 꼴려.
아델의 귀에 입을 가져간 나는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이렇게 배워나가면 되는 겁니다. 괜찮아요.”
아델은 귀가 가려워졌는지 어깨를 올렸다.
그러면서 내 턱을 툭 쳤다.
본의 아니게 폭력을 행사해버린 아델이 우왕좌왕하며 고개를 숙인다.
“죄, 죄송...”
퍽!
그러다 내 코에 박치기까지... 아주 지랄났다, 지랄났어.
그나저나 머리 한 번 단단하네. 코가 찡하다.
“흐아아... 어떡해요... 죄송합니다아...”
거의 울상으로 변한 아델의 얼굴.
콧대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고통을 참아낸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웃어주었다.
“괜찮습니다. 영화 시작하니까 집중할까요?”
“네에...”
쿠궁-!
타이밍 좋게 들려오는 배급사 BGM.
내려놓았던 팝콘을 다시 품으로 가져오려던 아델이 깜짝 놀라 팔을 치켜든다.
“허엄마야...!”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팝콘.
공중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들 몇 개를 잡아챈 나는, 그걸 입으로 자연스럽게 가져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팝콘을 맞은 관객들을 향해 일일이 사과했다.
그러자 아델도 벌떡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오늘은 아델에게 있어서 운이 참 없는 날이었다.
**
신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내 뒤를 따라오는 아델.
그녀는 완전히 풀이 죽어선 주차장으로 갈 때까지 아무 말도 못했다.
상영관 안에서의 민폐가 무척이나 심란했던 모양이다.
보고 싶어 하던 영화도 집중하지 못할 정도면 말 다한 셈.
너무 착하다. 그래서 사악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차에 탄 나는 느릿느릿 벨트로 손을 가져간 아델이 이런 말을 하자 픽 웃었다.
“제가 너무 오두방정을 떨었죠...?”
오두방정이라니... 단어선정이 너무 올드하잖아.
내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으니,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 정말 바보 같아요. 별 것도 아닌 부분에서 깜짝깜짝 놀라고... 주변사람들에게 피해만 끼치고 말았어요.”
자신을 나무라는 그녀.
이런 기죽은 모습도 나쁘지 않네. 깜찍하다.
“살면서 누구나 하는 실수입니다. 저도 그런 적 많아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지혁 씨는 저 같은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에요. 항상 침착하시니까요.”
“저도 사람인지라 자주 놀라고는 합니다. 공포영화를 볼 땐 더하죠. 팝콘을 옆자리에 앉은 관객의 무릎에 죄다 들이붓는 수준이에요. 덕분에 그 사람은 공짜 팝콘을 먹고요.”
실없는 농담. 아델이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진정이 되었다고 판단한 나는 차를 몰고 밖으로 나왔다.
아델은 내가 연구실에 가는 줄 알았는지 가만히 있다가, 차가 어느 장소에 들어서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긴 어디에요...?”
“자동차극장이요.”
“네...? 자동차극장?”
“차 안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에요. 요새는 많이 사라졌는데, 그래도 구에 하나씩은 있는 편이죠. 날도 어둑해진 시점이라 보는데 문제는 없어요.”
아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에 맞는 영화들 중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고르고, 발권하는 날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매점에서 각종 먹거리들을 샀고, 주차라인이 있는 공터로 가서 제법 좋은 자리에 주차를 한 다음 라이트를 껐다.
라디오를 조작해 표에 있는 주파수로 맞춘 나는, 아델에게 팝콘을 넘긴 뒤 등받이를 조금 내렸다.
“타이밍 좋게 와서 다행이네요. 곧 시작이에요.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좋네.”
그때까지 멍하니 있던 아델이 머리를 흔들고는 정신을 차렸다.
“여긴 왜 오신 거에요...? 영화는 다 봤잖아요...”
“주변 관객들에게 미안해서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하셨잖습니까.”
“하, 하지만...”
아델이 무언가를 말하려 함과 동시에,
두둥-!
차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스피커에서 웅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무슨 말을 하려던 아델은 놀라선 영화관에서처럼 팝콘을 쏟아버렸다.
절망한 아델이 내게 울먹거리는 투로 말한다.
“어떡해... 또 쏟아버렸어요... 자동차가 더러워졌어요...”
뭔가 야릇한 말이군.
히죽 웃은 나는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요. 청소하면 그만이니까.”
“죄송해요... 정말...”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수그리는 아델.
그녀의 안색을 살핀 나는 라디오 음량을 줄였다.
“아델.”
“네...?”
“제가 저번에 연구실 복도에서 했던 조언 기억해요? 인품 얘기.”
“기, 기억해요...”
“오늘 아델이 실수를 여러 번 했을 때, 눈총을 주거나 뭐라고 한 사람들이 있었나요? 없었죠?”
아델이 곰곰히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비웃으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셨어요...”
“그건 비웃은 게 아니라, 아델의 순수하고 착한 모습이 보기가 좋아서 웃은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좋게 넘어가준 거죠.”
“.... 정말이요?”
“네. 저 또한 아델이 악의가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이 정도론 끄덕도 안 해요. 실수로 인한 사과는 당연한 거지만, 그렇다고 주눅들어있지는 마세요.”
“.....”
아델이 벙 쪄선 날 쳐다보았다.
내 말에 제법 감동을 먹은 모양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해주고는 라디오 음량을 다시 올렸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에요.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를 뒤져봐도 흔치 않아요.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요. 평소 로사리오 님을 받들 때의 아델처럼.”
스크린으로 눈을 돌린 나는, 곧이어 팝콘을 먹는 소리, 과자 봉지가 부스럭거리며 까지는 소리, 그리고 음료수 캔 뚜껑을 따는 소리를 들었다.
귀여운 아델의 행동에 절로 미소가 나오려 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녀가 먹거리를 먹으면서도 날 빤히 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영화에 집중하는 척하자.
라고 생각했던 나는, 아델이 팝콘 다섯 개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 입으로 가져오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웃음이 터지려고 해... 참자... 참아야 한다.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은 내가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전 괜찮아요.”
“이거 맛있어요. 드세요.”
“괜찮다니까요?”
“드실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에요. 제가 영화를 보지 않길 바라신다면 가만히 계셔도 되어요.”
협박도 귀엽게 하잖아...
참고 참아왔던 웃음을 헛웃음 한 번으로 퉁친 나는 머뭇거리면서 입을 벌렸다.
그러자 아델이 새하얗고 고른 이를 드러내면서 입꼬리를 올렸고, 내 입에 팝콘을 넣어주었다.
“어때요? 맛있죠?”
팝콘을 씹어 삼킨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캐러멜 팝콘이에요.”
나도 알아. 내가 산 거라고.
“그렇군요.”
“목도 마르실 것이 분명하니까 콜라 드릴게요. 잠깐만요...”
“아델, 영화는 이미 시작했는데... 목마르면 제가 알아서 마실 테니까, 영화내용 놓치기 전에 스크린을 보세요.”
내 말을 상큼하게 무시한 아델은 낑낑거리며 콜라를 따고는 내밀었다.
내가 콜라를 받고 마시는 것까지 확인한 그녀는, 이내 싱글벙글한 얼굴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기력이 돌아왔나 보다. 다행이야.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