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5 심경의 변화 #2
-지혁아! 내가 지금 당장 연구실로...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박사의 다급한 목소리.
나는 아델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쉬고 있어.”
-하, 하지만... 마물이 두 마리잖아...!
“이미 세화와 유리아 씨를 보내놨어. 실비아 씨와 아델도 대기시킬 거야. 수틀리면 연구실 포탈을 통해서 지원 보내면 되니까 진정해.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이 절대 아냐.”
그 말에 박사가 안도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지금 어디야?”
-요가학원... 미안해.
“미안할 게 있나? 걱정하지 말고 볼일 봐.”
-네... 부탁할게요...
전화를 끊은 나는, 구석에서 실비아에게 연구실 주소를 알려주고 있는 아델을 바라보았다.
“여, 여기... 주소가... 서울시 은평구... 은평구 어디였더라...”
말을 더듬으며 혼란에 빠진 아델.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델이 냅다 휴대폰을 넘겨준다.
“여보세요, 실비아 씨?”
-응, 말해.
“플라잉 택시로 은평구……”
나는 실비아에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녀의 당장 가겠다는 대답을 들은 나는, 통화종료버튼을 누르고 아델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이후 상황판에 앉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아델을 향해 말했다.
“옆에 앉으세요. 침착하시고.”
“아, 네...!”
후다닥 다가와 자리에 앉은 그녀의 몸이 빳빳해졌다.
부동자세 그 자체. 눈도 깜박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힘 빠진 웃음을 터뜨린 나는 아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나타난 마물 두 놈은 B급 상위에요. 세화와 유리아 씨, 두 명이서 물리치기에는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그, 그래요...? 두 분은 어디 계신가요?”
“디바이스에 연동된 포탈을 타고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델, 그랜드캐니언의 마물은 침착하게 잘 처리했다고 들었는데... 왜 긴장하고 계시는 거에요?”
“아, 그렇죠... 후아아...”
가슴에 손을 얹고 긴 날숨을 내뱉는 그녀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키보드를 조작해 1번 모니터론 텔아비브 해안가에서 열리려 하고 있는 두 개의 포탈을, 2번 모니터론 세화와 유리아가 도착할 거라 예상되는 지점을 비추었다.
언제 봐도 흉물스런 마물의 아가리가 벌어지려 함과 동시에, 2번 카메라에서 번쩍! 하는 섬광이 일더니 비스트 슬레이어로 변신한 세화와 유리아가 도착했다.
“와아아...!”
감탄을 터뜨리며 그녀들을 주시하는 아델의 눈빛엔 동경심이 가득 차있었다.
하긴, 저 모습이 멋지긴 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 포탈의 아가리가 쩌어억! 열리면서, 그 안에서부터 도끼와 창을 든, 붉은 피부의 도깨비처럼 생긴 마물이 나타났다.
아델은 포탈이 열릴 때부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놈들이 나타나자 마치 잔인한 슬래셔 무비를 본 듯 토를 하는 시늉을 했다.
“으으... 징그러워요!”
처음 제대로 나타난 마물에 대한 감상이 징그럽다라...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긴장은 다 풀린 것처럼 보이니까, 여기서 점수를 조금 따놓자.
나는 통신기를 연구실 전체에 울리도록 바꾸어놓고, 세화와 유리아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다행스럽게도 마물이 활개 치기 전에 도착했네요. 빠르게 처리하되, 최우선 순위는 사람들을 지키는 겁니다.”
-응.
-알겠어요.
동시에 들려오는 대답.
난 아델이 내 얼굴을 슬쩍 흘깃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선을 모니터에 두고 있느라 잘 보이진 않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다.
인간들을 먼저 살피려는 마음을 확인하고 점수를 땄나보구나. 예상대로 됐다.
마물의 전신을 재빨리 스캔한 내가 다시 명령했다.
“인간형 마물인 만큼 약점은 목이야. 시작해.”
알겠다고 대답한 그녀들은 무기를 휙휙 돌리고 있는 마물들을 주시했다.
그리고,
뻐어엉-!
허공을 걷어찬 세화가 짓쳐 들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유리아가 시위를 놓았다.
**
마물들은 세화의 검격을 몇 번 막아내다가 유리아의 화살을 맞고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후 얼마간 합을 겨루다가 상황 종료.
두 마물은 세화의 검에 모가지가 날아가 먼지로 화해 소멸되었다.
애초에 짜고 치는 판이라 그런지 금방 끝났다.
세화와 유리아가 보고를 끝마치고 돌아간 후, 나는 제니퍼 캐시의 이름으로 세계연합에 뒷일을 맡겼다.
인간들의 피해는 전무. 건물 피해도 없으니 세계연합에서도 빠르게 일을 처리해줄 터였다.
다만 아르헨티나의 항의는 받을 거다.
왜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빨리 도와주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 소식이 박사의 귀에 들어가면 인간들에게 실망할 터.
박사의 변절이 빨라진다는 뜻과도 상통했다.
모든 일은 순조롭다. 석연찮은 부분도 전혀 없었다.
다만 고위급이라고 할 수 있는 B급 상위 마물을 두 마리나 그냥 없애버린 만큼, 마물들의 설움이 폭발하겠지.
그럼에도 날 배신할 마음 따윈 전혀 없겠지만, 자비로운 마왕으로서 죽은 마물들과 친하게 지내던 놈들에게 포상이라도 내려줘야겠다.
생각을 마친 나는 상황판에 머리를 박고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자 아델이 걱정스런 투로 묻는다.
“왜 그러세요?”
“항상 마물이 나타나면 잔뜩 긴장합니다. 지금에서야 조금 안심이 되네요.”
“지혁 씨는 전혀 긴장한 것 같지 않았는데요?”
“박사님과 함께 두 사람을 이끌어야하는 책임자이기도 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 상황도 방지해야하니까...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는 최대한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요.”
아델은 의자를 끌고 내게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는 애완동물을 칭찬하는 주인마냥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녀의 행동이 기껍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던 나는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진중한 투로 날 위로한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던 제가 봐도 지혁 씨는 정말 잘하셨어요. 앞으로 저와 실비아 언니도 세화나 유리아 언니처럼 전선에서 싸우게 될 텐데, 잘 이끌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심신이 지치시죠? 제가 힘이 나는 기도를 해드릴게요.”
하지 마! 제발!
나 하나도 안 힘들어!
“전능하신 주님……”
기어코 하는구나. 다른 생각을 하자.
몸에서 금빛 기운을 넘실넘실 뿜어내며 조잘거리는 아델의 기도를 애써 무시하고 있는데, 내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실비아였다. 구원투수가 따로 없는 수준.
한손을 들어 올려 아델을 제지한 나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실비아 씨.”
-네가 말한 곳으로 왔어. 이제 어떡해?
“잠깐만요. 금방 나가겠습니다.”
-나가다니? 마물이 아직 이스라엘에...
“상황은 종료됐어요. 마물은 세화와 유리아에게 소멸됐죠.”
-하아... 다행이다. 민간인 피해는 없어?
역시 너도 아이테르의 적합자라 그런지 정의감이 살아있구나.
“없습니다. 금방 데리러 나갈 테니 기다려주세요.”
-응.
**
연구실을 본 실비아는 아델과 비슷하게 감탄했다.
하지만 아델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그저 놀란 눈빛으로 신이 난 아델을 따라다니며 연구실을 소개받았다.
“여긴 박사님 전용 휴게실!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답니다!”
그래도 며칠 먼저 연구실을 본 선배라고, 실비아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주의사항을 말해주는 아델을 보니 웃음꽃이 피어난다.
나는 잠자코 두 사람을 보고 있다가, 아델이 연구실 소개를 끝마칠 때쯤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어때요? 실비아 씨의 행성엔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시설이 괜찮죠?”
“상상이상이야. 아델한테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까 더 놀라워. 발전한 우리 행성에서도 이런 기계들은 못 봤어. 특히 치료를 할 수 있는 의료기기가 너무 신기하더라.”
진심으로 감명깊게 봤나보다. 감정표현이 지나치지 않은 실비아가 저럴 정도면.
나는 상당히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연구실을 좋게 봐줘서 뿌듯한 게 아니라, 연구실을 만든 박사, 그리고 그 박사가 이젠 내 것이라 뿌듯한 거다.
“박사님이 다 만드신 겁니다.”
“대단하신 분이구나... 소모품 같은 무기는 너랑 공동연구로 만든다며?”
“네. 근데 이젠 세화와 유리아 씨의 힘이 강해져서 소모품이 그다지 필요가 없어요. 때문에 저는 그냥 디바이스 제작에 집중하거나, 상황판을 바라보며 세계의 정황을 살피기만 해요.”
“그래도 대단한데... 자기 자신을 너무 낮추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일단 연구실에 실비아 씨의 생체정보를 등록할게요. 따라오세요.”
“응.”
실비아는 얌전히 스캔과 출입 확인까지 완료했다.
그런 실비아를 보던 아델은 주눅이 들어있었는데, 똑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무섭다고 칭얼댔었던 것과 지금 실비아의 의연한 모습을 비교해보고 있는 듯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끝났어요.”
패널을 조작하면서 그리 말하자, 실비아가 내게 다가오더니 등을 툭 친다.
“수고했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상황 종료라고 했지? 이제 해산이야?”
“아뇨. 마물이 두 마리가 나온 적은 처음이라서, 하루 정도는 연구실에서 대기하면서 경과를 지켜보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실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솔직히 희박하다고 봐요. B급 상위 마물이 순식간에 소멸한 만큼 타이라트가 경거망동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만에 하나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니까... 지켜보는 게 맞아요.”
“맞는 말이네. 그럼 우린 어떡할까? 여기서 대기해?”
“그럴 필요는 없고요. 잠깐만요...”
나는 보관실로 들어가 일회용 포탈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그걸 실비아와 아델에게 각각 하나씩 주었다.
“제가 연구실에 온지 얼마 안 됐을 때 만들었던 일회용 포탈인데, 중앙에 있는 버튼을 누르고 바닥에 던지면 빛이 올라올 겁니다. 연구실 창고로 연결되어있으니까 연락하면 곧장 타고 오세요.”
포탈을 유심히 살펴보던 실비아가 감탄한다.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네...?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네. 다만 다듬지 못한 만큼 부작용이 있습니다.”
“무슨 부작용인데?”
“어지럼증이요. 뒤틀린 공간 안은 정말... 끔찍하거든요. 다만 일반인이나 호소하는 정도지, 아이테르를 다룰 수 있는 실비아 씨나 아델 같은 분들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거에요.”
“그렇구나... 이거 더 줄 수 있어?”
“아뇨. 양이 한정적이라 안 됩니다. 조만간 유리아 씨의 댁에서 포탈을 빼와 의정부에 설치해드릴게요.”
본격적으로 네 명을 굴릴 준비를 하겠다는 의미.
실비아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우린 지금 돌아가면 돼?”
“네. 여긴 박사님이랑 제가 교대로 볼 테니까 돌아가셔서 쉬세요.”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야?”
“여러분들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 책임져주는 게 저와 박사님의 일인 걸요. 이미 적응할 대로 적응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그럼 난 돌아갈게.”
실비아는 내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한 차례 해주고는, 두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는 아델에게 다가갔다.
“나는 이제부터 운동하러 갈 건데, 너는 어떡할래?”
“저는... 지혁 씨랑 성경공부를 하다가 갈 거에요.”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는구나. 이제는 적응이 됐지만.
“알았어. 그럼 택시타고 와.”
“네, 언니.”
실비아는 날 향해 시크하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연구실을 나섰다.
출입문이 닫힐 때까지 실비아에게 손을 흔들던 아델이 내게 다가오더니 말한다.
“지혁 씨.”
“왜 휴식하러 가시지 않고...”
“지혁 씨도 심심할 테고, 저도 지혁 씨와 함께 공부를 하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아델은 내가 준 일회용 포탈을 책가방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날 올려다보며 묻는다.
“왜 제가 연구실에 처음 왔을 땐 이걸 주지 않으셨나요?”
아델의 눈과 말투는 서운함이 가득했다.
실비아에게 질투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저건 그저 자신의 어리광적인 성격을 내가 미더워하지 않을까봐 확인을 해보려는 거다.
대놓고 말하라고 조언을 해주었어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니... 이럴 때의 아델은 참 소심하단 말이지.
삐치기 전에 달래줘야겠다.
“그땐 큰일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언제 타이라트가 군대를 이끌고 올지 모르게 됐으니까, 대비하기 위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못 미더우신 건 아니구요?”
“전혀 아닙니다. 오해를 하고 계세요.”
“정말이에요?”
“그럼요. 제가 왜 아델을 못 미더워하겠습니까. 솔직히 말할까요? 이렇게 차등을 두는 건 옳지 않지만... 저는 실비아 씨보다 아델을 더 믿습니다.”
아델의 얼굴이 해맑게 변했다.
그녀가 살가워진 말투로 당부한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실비아 언니도 저만큼 믿어야 해요. 아예 동급으로 두셔요. 아셨죠?”
“어려울 것 같은데요...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저도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휴게실로 움직이셔요! 마물이 공부를 방해했으니 오늘은 늦게까지 집에 가지 않을 거에요!”
힘차게 말을 마친 아델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휴게실로 향했다.
힘 빠진 웃음을 터뜨린 나는, 간이 냉장고를 열어 생수통을 두 개 들고 휴게실 문을 열었다.
나에 대한 아델의 호감은 착실하게 오르고 있다.
이성으로서의 호감도, 동료로서의 호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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