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2 무슨 짓이에요!?
“오늘도 쉰다고?”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박사가 힘겹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힘들어...”
말은 저렇게 하고 있어도 이불을 목까지 덮은 박사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어제 돌아와서 아주 정성을 들여 만족시켜줬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거다.
물론 내 계획이었다. 아델과 오랜 시간을 보내기 위한.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나는, 옷을 입다 말고 박사의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박사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몸을 밀어내려고 한다.
“이러지 마... 힘들다니까...?”
“표정은 전혀 안 힘들어 보이는데?”
“진짜 힘들어... 못 움직이겠어.”
“지금 한 번 할래?”
이불을 턱까지 올린 박사가 부끄러운 듯 대답한다.
“아니... 쉬고 싶어요...”
어제 어지간히 힘들었나보다. 성욕이 왕성한 박사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그런 박사의 반응에 실소를 터뜨린 나는, 검지를 세워 그녀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움찔거리는 박사의 허리를 보며, 내가 말했다.
“못 움직이겠다면서?”
“이건 간지러워서 본능적으로...”
“거짓말했네?”
“.... 잘못했어... 어, 얼른 출근해요.”
난 말없이 박사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입술을 들이밀자, 박사가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해주었다.
혀끝을 내밀어 내 입술 사이를 살짝 파고들어 핥기까지 했다.
박사의 행동에 만족스런 웃음을 흘린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 마저 옷을 입었다.
“다녀올게.”
“응... 아, 오늘 올 때 토마토 좀 사올 수 있어?”
“토마토는 왜? 다 떨어졌어?”
“어제 이탈리아 요리 하느라 거의 다 썼어요. 부탁해요.”
“그렇게 할게. 쉬고 있어.”
“네...”
집에서 나온 나는 곧장 차를 타고 연구실로 향했고, 거기서 디바이스를 만들다가 박사의 전화를 받았다.
밥은 먹었냐는 물음에 흠칫한 나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점심을 훌쩍 넘어있는 상태.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는 채 용접기만 만지작거렸구나. 의욕이 과했나보다.
대충 먹었다고 둘러대고 전화를 끊은 나는, 눈이 급속도로 피로해지자 박사의 휴게실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인간의 몸은 참 불편하다 이 말이지.
아델만 떨어뜨리면 된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자.
이마에 팔을 얹어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진동소리가 울리자 휴대폰을 보았다.
[지혁 씨! 연구실이에요? 오늘 잊지 않으셨죠?]
아델의 톡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6시까지 갈게요.]
[네! 오늘도 파이팅!]
톡을 빤히 보던 나는 왠지 모를 서운한 감정에 휩싸였다.
공허한 기분도 드는 것 같다. 무언가가 빠진 느낌.
왜 이럴까?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이어지는 아델의 톡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ᴗ •́*)و]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런 씨발... 이따위 이모티콘에 조교되어버리다니.
자존심이 팍팍 상한다.
[아델도 파이팅. 이따 뵐게요.]
[아, 저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세화한테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보니까 떡볶이를 가장 좋아한대요. 저도 세화가 먹는 걸로 먹어보고 싶어요. 사주실 거죠? (๑❛ڡ❛๑)]
내가 아델을 벗겨먹는 게 아니라, 아델이 날 벗겨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어제 한 간접적인 고백은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아니면 신경은 쓰는데 그냥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만나보면 알겠지.
나는 손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사갈게요.]
**
시간에 맞춰 별채에 도착한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후, 실비아가 현관문을 열고 날 맞이한다.
“어서와. 손에 든 건... 떡볶이지?”
“맞아요. 아델이 세화가 먹는 걸 먹고 싶다고 해서 사왔는데... 다 식었네요.”
“너 그거구나? 호구.”
호구라니... 너희들의 복지를 위해 땀 뻘뻘 흘리며 뛰고 있는데, 말이 너무 심하네.
“대체 그런 단어는 어디서 배우시는 거에요?”
“영화, 드라마, 인터넷... 이런 곳에 다 널려 있잖아. 일단 얼른 들어와.”
실비아와 함께 거실로 간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던 아델이 달려오자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아델.”
“지혁 씨! 떡볶이 사왔어요?”
이년! 주인님이 오셨는데 인사부터 해야지 떡볶이 타령이라니.
혼쭐을 내줄 것이다.
식탁 가운데에 놓인 봉투를 가리킨 내가 대답했다.
“네, 여기.”
“와아! 몇 인분이에요?”
“3인분요.”
“다 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세화가 그릇에 옮겨 담고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라고 했어요!”
혼자 속사포처럼 말을 한 아델이 콧노래를 부르며 부엌 선반을 열었고, 큰 그릇을 가져왔다.
나는 떡볶이에 동봉된 플라스틱 칼로 포장을 뜯어 아델에게 내어주었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실비아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호구 맞네.”
“다 들립니다.”
“들으라고 말한 거야. 아델의 부탁을 계속 들어주다간 끝도 없어질 걸? 조심해.”
떡볶이를 옮겨 담던 아델이 실비아를 쏘아보았다.
“저도 다 들리거든요!? 포크 꺼내주세요!”
“그래... 알았어.”
지도 꼬랑지를 내리는 건 똑같으면서 호구라고 하고 지랄이야.
입을 내밀고 불만을 웅얼거린 나는, 실비아의 손톱이 검게 물들어있자 눈을 빛냈다.
역시 예비 이블 발키리답게 가장 완벽한 색인 검은색으로 칠했군. 마음에 든다.
아델은 뜨겁지도 않은 떡볶이에 입바람을 후후 불어대면서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그런 애 같은 행동에 고개를 가로저은 실비아가 식탁에 포크 세 개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내가 실비아의 맞은편에 앉자, 그녀가 늘어지는 한숨을 내쉰다.
“흐아... 맨날 이렇게 사는 것도 적응이 안 돼. 평화롭다...”
“평화로우면 좋은 거죠.”
“하지만 가짜 평화지. 타이라트가 암약하고 있으니까.”
“동의합니다.”
“빨리 모든 일을 마치고 지구에서 눌러 살고 싶다...”
그렇게는 안 되지. 너희들은 날 도와 전 우주를 정복해야 한다니까?
묵묵히 실비아의 말을 받아주고 있는데, 떡볶이를 다 데워온 아델이 식탁 중앙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지 혼자 냅다 포크를 들고 떡을 찍어 입에 가져갔다.
“맛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떡 맛을 음미하는 그녀를 보며 헛웃음을 켠 실비아와 나.
서로 눈을 마주친 우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포크를 들었다.
**
“.... 흐흠...!”
스터디카페에서 묵묵히 성경을 읽고 있던 나는, 아델이 헛기침을 하자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 궁금하신 부분은 없나 해서요...”
세 시간째 말 한 마디 없이 성경만 읽고 있으니 저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속으로 낄낄 웃은 내가 지나가는 투로 대답했다.
“딱히 없습니다. 다 이해하고 있어요.”
“아, 네에... 잘하셨어요.”
“예.”
나는 성경으로 눈을 돌렸다.
얼마 뒤,
“흠...! 흐흠!”
아델이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했다.
고개를 든 나는 이번엔 미간을 아주 약간 좁혔다.
“왜요?”
“이해하고 계신 거 맞아요...? 세 시간동안 질문이 하나도 없었잖아요.”
“설마 제가 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 그럼 퀴즈 낼게요! 로사리오 님께서 순수악 헬릭스와 대결하실 때 사용했던 무기는 뭐게~요?”
끝부분을 늘어뜨리며 질문하는 아델.
심장이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은 내가 대답했다.
“빛의 검이요. 검은 로사리오 님의 기운으로 생성됐고, 손잡이 끝부분에 태양이 달려있는데다 칼날이 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죠. 그걸로 헬릭스가 생성한 어둠을 가른 뒤, 심장을 찔러 소멸시켰고요. 덕분에 론겔 은하를 비롯한 다섯 개 은하의 어둠이 걷히고 평화가 찾아왔죠.”
막힘없는 내 대답을 들은 아델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뾰로통한 표정. 너무나도 깜찍하다.
그녀를 향해 히죽 웃은 내가 물었다.
“맞죠?”
“네...”
“더 낼 거 있어요?”
자신감이 뚝뚝 묻어나오는 말투에 눈썹을 찌푸린 아델이 잽싸게 묻는다.
“로사리오 님의 첫 번째 대리인! 그분의 이름!”
그년? 아주 잘 알지.
헬릭스라는 고대의 악이 나와 비슷하게 음습한 놈이었고, 초대 성녀를 유혹해 타락시킨 다음 수하로 삼았다고 나왔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프리시아. 헬릭스의 간계에 넘어가 변절했죠. 로사리오 님의 등을 찌르려 하다가 소멸됐고요.”
너도 프리시아처럼 로사리오의 뒤통수에 칼을... 아니, 망치를 휘두르게 될 거다.
“두, 두 번째는!?”
“카산드라. 프리시아의 배신 때문에 교도들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고, 대신 카산드라 님을 초대 성녀로 인정하고 있죠.”
“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세 번째는 엘리제. 네 번째는 모릅니다.”
그 말에 아델이 건수를 잡았다는 듯 콧바람을 훅 내뿜었다.
“어떻게 마리암 님을 모르실 수가 있죠? 그래놓고 다 이해했다고 하시다니! 지혁 씨는 거짓말을 하셨어요! 학습태도가 너무 별로에요!”
“진정하세요. 아직 네 번째 성녀님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아델이 자신의 검지 첫 마디를 잘근잘근 깨물면서 생각에 잠겼다.
성경을 복기하며 내가 나간 진도와 비교해보는 모양.
잠시 후, 그녀의 눈이 큼지막해지더니, 이내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린 듯 낭패한 얼굴을 한다.
“그, 그렇죠...”
“거봐요. 그리고 그렇게 손가락을 깨물면 기껏 한 네일이 다 사라질 거에요.”
“아...!”
황급히 손을 아래로 쏙 내리는 아델.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나는 시선을 다시 성경으로 내렸고,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물었다.
“제 학습태도가 별로라고 느껴지셨어요?”
“아, 아니에요... 훌륭하세요...”
“감사합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30분 가까이 성경만 읽던 나는, 아델이 방 안에 있는 여러 물건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아델이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요! 저도 마침 화장실이 가고 싶었던 참이었어요!”
그런 건 힘차게 말하지 않아도 돼.
“예, 다녀오세요.”
아델이 방에서 나간 후, 나는 책상에 팔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어제 고백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건가? 이러면 아쉬운데...
그래도 내가 좋아하고 있다고 인지는 했으니까 이걸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방 안에 마련된 커피포트를 조작했다.
두 사람 몫의 커피를 준비하고 있는데, 손에 물기를 묻힌 아델이 들어와 내 옆에 선다.
“지혁 씨, 뭐하세요?”
“커피 타고 있어요.”
“어!? 저도 알려주세요!”
아델은 자신의 맨투맨 티셔츠에 손을 닦고 있었다.
힘 빠진 웃음을 터뜨린 난, 옆에 놓인 티슈를 꺼내 아델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닦아요. 옷에다가 닦지 마시고.”
“고맙습니다!”
생글거리며 감사인사를 한 아델이 휴지로 손을 닦아냈다.
하지만 부드러운 티슈라 찢어진 조각들이 손가락에 붙었다.
여기서 악셀 한 번 밟을까? 아니면 한 발 물러설까?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델의 오른손목을 부드럽게 잡은 나는, 그녀의 얇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붙어있는 휴지조각을 하나하나 떼어주기 시작했다.
만약 여기서 아델이 큰 반응을 보인다면, 어제의 내 고백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왜냐? 아델은 내가 머리를 만져줘도, 등을 두드려도, 심지어는 어깨를 안마해도 아무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었으니까.
예전의 그녀였다면 손 하나쯤 잡는다고 당황해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아델은...
“.....”
놀라선 벙 쪘다.
안 그래도 큰 눈은 더욱 크게 떴고, 입은 계란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떡 벌린 상태였다.
의식하고 있구나. 이로서 확실해졌다.
휴지를 다 떼어낸 나는 아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힘을 하나도 주지 않은 그녀의 팔이 쭉 내려가더니, 바지에 닿아 툭! 하는 소리를 냈다.
“화장실에 있는 페이퍼타올이 닦기 훨씬 좋아요. 알아두세요.”
내 무감정한 말에 정신을 차린 아델이 얼굴을 몇 번이나 좌우로 흔들어댔다.
그리고는 내가 잡았던 손을 자신의 몸으로 끌어당기며 소리친다.
“무, 무무무, 무슨 짓을 하시는 거에요!?”
반응이 너무 솔직하잖아... 슬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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