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9 성녀에게 뻗치는 마수 #2
의정부의 별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스터디카페의 룸 안.
쿵-!
기다란 책상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스터디카페를 통째로 빌린 나는, 얼빵한 얼굴로 눈앞에 놓인 어마어마한 크기의 책과, 힘겨운 기색으로 헥헥거리고 있는 아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뭡니까? 설마 성전이에요?”
아델이 호흡을 고르고는 힘차게 대답한다.
“네! 맞아요! 저희 교의 성경이랍니다!”
아니... 뭔 성경이 엄지와 소지를 쫙 벌리고도 모자랄 크기냐.
게다가 책은 표지도 없었고, 옆에 스프링이 껴있었다.
그냥 덩치만 무척 큰 공책. 이렇게 대충 만든 성경이 있나?
그리고 성경은 또 어디서 가져온 거지?
나는 조심스럽게 성경을 펴보았다.
첫 페이지에 한글로 큼지막하게, 그리고 귀여운 글씨체로 쓰인 [로사리오교의 교리] 라는 제목이 보인다.
난 이 성경을 아델이 직접 썼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헛웃음을 켠 나는, 내 맞은편에 앉아 방실방실 웃고 있는 아델에게 물었다.
“설마 직접 다 쓰신 거에요?”
“네! 제가 한글을 배울 때부터 쓰기 시작한 거에요! 완성은 일주일 정도 전에 했고요! 이것 외에도 다섯 권이 더 있는데, 그것들은 아직 미완성이에요!”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쫙 펴는 그녀였다.
이 책이 총 여섯 권이라니. 눈앞이 아찔해진다.
그냥 평범하게 호감스택을 쌓고 데이트를 신청할 걸... 괜히 교리를 배우겠다고 깝쳐가지고는...
과거의 내게 욕지거리를 쏟아낸 내가 물었다.
“그럼 그 여섯 권을 다 외우고 있었던 건가요?”
“당연히 외워야죠! 저는 로사리오 님의 뜻을 전달하는 대리인인 걸요?”
근성이 보통이 아니구나.
왠지 교리를 무척 자세하게, 하나하나 풀어서 알려줄 것 같은 느낌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아델이 생수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귀엽게 물을 꼴깍꼴깍 마신 그녀는 책상에 팔을 괴고는 멀뚱히 있는 내게 말했다.
“뭐하세요? 어서 읽어요.”
“.... 예? 이걸 읽으라고요?”
“한글로 써서 이해하는데 문제는 전혀 없을 거에요. 오늘은 백 페이지 정도만 완벽히 외우도록 하세요!”
뭐 이런 주먹구구식 교육이 다 있냐.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 전도 대상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이 종교의 소개라던가... 이런 것부터 시작하는 게 맞지 않나요?”
“아, 그런가요?”
반문하면 어떡해?
포교활동의 일선에 서야할 성녀잖아. 근데 이런 것도 몰라?
아, 네 행성에선 신도들이 까라는 대로 깠구나. 그래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고.
내가 픽 하고 실소를 터뜨리자,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아델이 재빨리 말을 잇는다.
“저, 저도 소개 먼저 하려고 했는데요?”
“그러시겠죠.”
약간 시원찮아하는 내 얼굴을 본 아델이 다급해졌다.
“음... 저희 교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그... 일단...”
나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는 아델에게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준비가 안 됐다면 다음에 해도...”
“아, 안 돼요! 도망가실 거잖아요!”
저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예비 신도가 도망쳤었던 전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가르치려고 하니 튀지.
도망가지 못해서 안타까운 척한 내가 잠자코 있으니, 아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을 마주쳤다.
“저희 기도부터 할까요? 팔꿈치를 책상에 올리시고, 손깍지를 낀 다음 이마에 두셔요. 고개는 살짝 숙이고 눈은 감으세요.”
“아, 예...”
나는 순순히 아델이 하라는 대로 했다.
그러자 내 귀로 아델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꽂혔다.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신 주님, 부족한 저를 긍휼이 여겨주시어 은혜를 내려주심에 감사드리옵니다. 송지혁 님을 교로 인도하셔주심에 무한한 기쁨을 느끼옵나이다. 주님께서 송지혁 님의 앞길을 밝혀……”
모두 한국어로 된 기도문.
말을 더듬거리지도 않는 것이 날 위해서 꽤나 많은 연습을 한 듯했다.
실눈을 뜬 채로 아델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그녀의 몸에서 황금색 빛무리가 미세하게 피어오르자 흠칫했다.
‘기도문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신성력이 나온다고?’
괜히 교리를 배우겠다고 했나? 설마 저게 내 몸으로 들어오지는 않겠지?
불안한 마음을 삼키던 나는, 금빛 광채가 방 안을 가득 메우자 왠지 모르게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꽁꽁 숨겨둔 마기가 반응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좆같았다.
그래도 인간의 몸인 상태라 그런지 지척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구나. 정말 다행이다.
“…… 앞으로 주님을 믿고 살아가게 될 송지혁 님의 인생에 거룩한 빛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송지혁 님의 삶을 영원히 인도하실 것을 믿사오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아델이 기도를 마치는 순간, 광채가 순식간에 그녀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잽싸게 눈을 감은 나는 아델이 눈을 떠도 괜찮다고 하자 깍지를 낀 손을 풀었다.
기도문을 읊기 전과 똑같아진 방 안.
나는 한 차례 큰 폭풍이 지나간 양, 숨을 크게 들이켠 뒤 한꺼번에 내쉬었다.
그러자 아델이 묻는다.
“어떠세요? 마음이 경건해진 느낌이 드나요?”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뭔가 상쾌한 기분이 드네요.”
“그거에요! 그 느낌을 잊지 마셔요!”
호들갑을 떨며 좋아라하는 아델.
그런 아델을 향해 방긋 웃어준 나는, 그녀가 로사리오교의 소개를 시작하자 귀를 쫑긋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미리 정보를 알아보고 움직여서 손해를 본 적은 거의 없었으니, 모든 것을 열심히 파헤쳐주지.
**
나는 제법 많은 정보들을 아델에게서 들었다.
로사리오교의 존재의의는 악을 처단하고 생명체들을 구원해 평화를 이룩하는 것.
신비한 힘인 아이테르의 특성과 비슷했다.
그리고 로사리오는 빛의 신이자 천계의 수장이었다.
천계라고 해봐야 그녀 한 명뿐인 공간이지만, 내 예쁜 마물들처럼 그녀가 부리는 권속들이 있다고 한다.
로사리오는 먼 옛날, 우주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을 땐 활동반경을 매우 넓게 가져갔지만, 지금은 직접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다.
대신 예지몽 같은 꿈을 꾸는데, 꿈 내용이 심상찮으면 대리인을 선택해 신탁을 내리고,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다고 한다.
‘아이테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아델의 교 소개는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이 이상의 추가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일단 로사리오가 꿨다는 예지몽은 특정한 대상을 정확히 집어주지 않는다.
이는 자신할 수 있었다. 아델은 동료들을 모아 악으로부터 지구를 구하라는 신탁만 받았기 때문이다.
꿈 내용이 상세했다면 내 정체를 들키고도 남았겠지.
이 정도면 안심이다. 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오늘 수확은 여기까지가 끝.
조금 아쉽긴 하지만, 나중에 아델과의 관계가 훨씬 가까워지면 정보를 더 캐낼 수 있을 테니... 오늘은 아델이 하라는 것만 하면서 얌전히 있어야겠다.
정보를 정리해 머릿속에 집어넣은 내가 말문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로사리오교에 대한 존경심이 솟구치는 것 같네요.”
그 말에 아델이 활짝 웃었다.
저 주변이 빛으로 물드는 것 같은 아름다운 미소를 사악한 미소로 바꿀 날이 정말 기대되네.
의욕이 확 솟아오른다.
“그렇죠!? 대단하죠? 역시 지혁 씨는 마음가짐이 잘 되어있으세요.”
“감사합니다. 이제 성경을 읽을까요? 여기 창세기부터 시작하면 되나?”
“넷! 저는 여기서 가만히 있을 테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얼마든지 분석하셔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는 거에요! 내가 거기 있다고 생각하면서요!”
“알겠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어나가며 궁금한 부분을 아델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학습태도가 매우 좋은 날 기꺼워하며 아주 상세히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그렇게 우린 여덟 시간 가까이 성경 이야기만 했다.
해가 완전히 저문 시간.
계속 집중한 채로 성경을 읽어나가던 나는, 아델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풉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아델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소리친다.
“비, 비웃지 마세요! 저 아침도 안 먹고 왔거든요!?”
버럭 화를 내다니... 기분 좋다.
아델이 날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느껴져서.
“비웃은 거 아닙니다. 저도 배가 고파서 마주 웃은 것뿐이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때요?”
“음... 좋아요. 20페이지가 남았지만 봐드릴게요.”
“상당히 스파르타식 교육이네요.”
“스파르타식 교육이 뭐에요?”
“옛날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채용했던 군인들의 교육법이에요. 아고게라고도 하는데, 혹독한 걸로 악명이 높았죠.”
아델이 손뼉을 짝! 쳤다.
“아하! 그 국가는 엄청 강대했겠네요?”
“그 교육 때문에 몰락했어요. 완전히 망했죠.”
“.....”
입을 떡 벌리는 그녀.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웠던 나는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방 안이 떠나가라 웃던 내가 손사래를 쳤다.
“농담입니다. 밥 먹으러 가요.”
그에 안심한 아델이 힘 빠진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날 타박한다.
“후아... 놀랐잖아요! 어제 사탕도 그렇고... 정말 너무해요!”
“사죄의 의미로 맛있는 가게를 소개시켜드릴게요.”
“맛없으면 재미도 없을 줄 아세요.”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대?
찔끔한 척 연기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경은 제가 가지고 갈게요. 그래도 되죠?”
“물론이에요. 시간이 날 때마다 읽으셔야 돼요? 모르는 부분은 문자나 전화로 물어보시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비싼 음식을 먹은 나는 소화 겸 산책을 하자며 아델에게 제안했고, 그녀는 고민도 않고 내 제안을 승낙했다.
레스토랑을 나온 우린 나란히, 그리고 천천히 인도를 거닐었다.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감탄을 터뜨리는 아델.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식사는 맛있었죠?”
“네, 엄청 맛있었어요.”
“재미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네요. 다행입니다.”
아델이 킥킥 웃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지혁 씨.”
“네? 뭐가요?”
“오늘 카페에서요... 생각해보니까 엄청 지루했던 것 같아요. 지혁 씨는 정신적인 편안함을 얻기 위해 가르침을 바란 건데, 저는 그런 지혁 씨의 마음도 잊어버리고는 신도를 받아들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어요. 교리를 전파하는 방법도 바보 같았죠. 지루해하실 만도 했어요. 반성할게요.”
아델의 푸념을 듣던 나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냈다.
어제 아델에게 주었던 민트향.
그걸 내민 내가 말했다.
“드실래요?”
“장난치는 거 아니거든요? 전 진지해요!”
“저도 진지하게 드리는 건데요.”
“저 긴장 안 했어요! 안 먹어도 돼요!”
“그냥 입가심하면서 응어리도 날려버리라는 뜻이었어요. 이거 시원하잖아요.”
“.... 그렇기는 한데... 그럼 먹을래요.”
어제처럼 손바닥 위에 있는 사탕을 홱 낚아챈 아델.
그녀가 사탕을 먹자, 나 또한 새 사탕을 꺼내 입 안에 집어넣고 씹었다.
아그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뒤, 아델이 입을 붕어처럼 내밀고는 공기를 빨아들였다.
박하 특유의 시원함을 느끼려는 행동.
그런 아델의 모습을 보고 아빠미소를 지은 나는, 그녀를 격려했다.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워나가는 거죠. 그리고 아델은 잘 했어요.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졌었거든요.”
그 말에 입술을 꾹 닫은 아델이 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반신반의하며 묻는다.
“그래요...?”
“네. 오늘은 편두통도 없어서 정말 좋았어요. 정말 만족했고, 또 배우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자주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예습 철저히 할게요.”
“우와아...!”
아델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자신이 도움이 돼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지혁 씨가 외워야할 부분의 후반부에 이런 구절이 나올 거에요. 거룩한 주님께서 순수한 악이었던 오르코스를 정화……”
성경의 내용을 재잘재잘 떠들어대기 시작하는 아델.
나는 그날, 아델을 집에 데려다줄 때까지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로사리오의 업적을 들었다.
그딴 거에 대해 관심은 하나도 없었지만 최대한 집중했다.
나중에 아델이 깜짝 퀴즈를 내거나 할 때, 막힘없이 대답해서 점수를 딸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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