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8 성녀에게 뻗치는 마수
“넌 우릴 이용하려는 생각밖에는 없지? 그냥 이블 발키리로 만들어놓고 나 몰라라 하다가 이럴 때만 부르는 걸 보면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아.”
서운한 점을 팍팍 쏟아내고 있는 세화.
난 묵묵히 그녀의 푸념을 들어주었다.
솔직히 할 말 없었다. 요즘 너무나도 소홀했었으니까.
나는 세화의 선홍색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올 때쯤, 그녀를 부서져라 꽉 안았다.
“이거 놔.”
내 허리를 잡고 밀어내려 하지만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을 내 겨드랑이 사이로 쏙 넣는 그녀.
말은 저렇게 했어도 품이 그리웠나보다.
내 가슴을 앙 깨문 그녀가 말한다.
“진짜 싫어...”
오랜만에 맛보는 세화의 앙탈이라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전보다 더욱 새침해진 모습도 예쁘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 내가 물었다.
“진심이야?”
그러자 세화가 가슴팍에서 얼굴만을 들더니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 아닌 거 알잖아.”
“다행이네.”
“다시 맹세해. 내가 네 가장 소중한 가족이지?”
“당연하지. 그건 영원히 변치 않아.”
세화의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
“그럼 됐어... 박사한테만 붙어있지 말고 우리도 봐줘.”
“그건 걱정하지 마. 조만간 찾을 테니까. 마기는 전부 지웠지?”
“응. 마르셀라가 준 약 먹었어.”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세화의 니트에 묻은 먼지를 살살 털어주었다.
연한 자줏빛 시스루 니트와 흰색 슬림핏 슬랙스를 입은 세화는 정말 아름다웠다.
마족이 되어 눈매가 섹시해진 그녀는, 청순한 옷차림보단 지금처럼 어른스러운 코디가 더 어울렸다.
기꺼운 표정으로 그녀의 패션을 감상하던 나는 시계를 보고 씨익 웃었다.
“시간 다 됐다. 갈까?”
“가긴 가는데... 왜 나만 가? 유리아 언니는?”
“유리아는 비스트 슬레이어로 변신했었잖아. 이블 발키리는 아니었다지만 아이테르의 힘을 빌렸던 건 똑같으니까 마기가 드러날지도 몰라. 그러면 골치 아픈 걸로는 끝나지 않으니까 신중해야지.”
“알았어. 근데 가서 무슨 얘기해야 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냥 친목회 한다고 생각하고 친해져봐. 친구 많아지면 좋잖아.”
세화가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할게.”
“소개 끝나면 차에서 기다릴까? 아니면 먼저 돌아갈까?”
“먼저 가도 돼. 나 유리아 언니랑 놀러가기로 했어.”
말을 마친 세화가 팔짱을 껴왔다.
그런 세화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그녀가 내 아랫도리를 덥석 잡자 허헉! 하는 신음을 터뜨렸다.
상체를 살짝 수그린 나를 야릇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말한다.
“분명히 말했지? 조만간 찾겠다고. 기억하고 있을 거야.”
“알았다니까. 이거 놔줄래...?”
내가 숙이고 들어가자, 세화가 요망한 미소를 짓더니 바지 사이로 손을 넣는다.
그리고는 점점 커져가는 내 고간을 살살 쓰다듬었다.
“지금 넣어주면 안 돼?”
“시간 다 됐다니까?”
“그럼 언제 넣어줄 거야?”
“조만간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거 좀 놓고... 너 진짜 혼난다.”
눈을 부릅뜨고 세화를 노려보니, 풀죽은 표정을 지은 그녀가 손을 떼어냈다.
잠깐 눈앞이 아찔해져왔던 나는 세화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통째로 빌린 카페를 향해 움직였다.
**
“안녕하세요! 이세화라고 합니다.”
방글방글한 얼굴. 그리고 상냥한 말투.
실비아의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인 세화는, 지금까지 다져온 연기력을 살려 서글서글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반가워요. 실비아 리즈에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실비아의 인사.
방긋 웃은 세화가 말했다.
“지혁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정말 강하시다고...”
“과찬이에요.”
“언니,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제가 네 살이나 더 어려요. 제가 커피 타드릴게요. 지금 여길 통째로 빌린 상태라서 직원들이 없어요.”
세화가 붙임성 좋게 다가가자, 조금 긴장하고 있던 실비아가 안심했는지 편안한 얼굴을 했다.
그녀들은 이내 조잘조잘, 까르르거리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먼발치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아델이 화장실 근처에서 날 부르자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갔다.
“왜 그래요?”
“지혁 씨... 저 엄청 긴장했어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그래 보여.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잖아.
나는 온화한 투로 아델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이제까지 지구인들을 많이 마주쳐왔잖아요. 긴장하지 마세요. 세화는 정말 착하니까 아델이 뭘 하든 받아줄 거에요. 세화가 실비아 씨와 더 친해지기 전에 얼른 가보세요.”
“검의 영웅을 처음 뵙는 순간이어요. 긴장이 되는 걸 어떡해요...”
“검의 영웅?”
“신탁을 받았을 때 들었던 이름이에요. 대검을 사용하시는 세화 씨는 검의 영웅이죠.”
아하... 그래? 그런 별칭이 있을 줄은 몰랐네.
그런데 어쩌나? 이제 세화는 검이 아니라 낫을 쓰는데.
로사리오 썅년아. 꼬우면 뒷북치지 말던가.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아뇨... 가긴 가야 하는데에... 우황청심원 같은 거 없나요?”
우황청심원이라니...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헛웃음을 켠 나는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 좋은 방법이 생각나 몸을 돌렸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여기 오기 전에 심심풀이로 씹던 민트향 사탕을 아델 몰래 하나 꺼낸 나는, 다시 몸을 돌리고 그걸 내밀었다.
“드세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사탕을 바라보던 아델이 묻는다.
“이게 뭔데요...?”
“제가 집중이 안 될 때마다 먹던 약이에요.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도 있으니까 먹어요.”
“저, 정말요...?”
아델이 자신의 자그마한 손으로 사탕을 냅다 집어갔다.
사탕을 입속으로 쏙 집어넣은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시원한 느낌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부드럽게 웃은 나는 이빨을 맞부딪치는 시늉을 했다.
내 이런 행동을 본 아델은 아하! 하는 감탄사를 내뱉더니 사탕을 꼼꼼히 씹어 먹었다.
그녀의 목이 꿀렁이는 것을 본 내가 말했다.
“비싼 약이라 효과가 바로 나타날 거에요. 어때요?”
“입 안이 무척 시원해요...!”
“약효가 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긴장이 풀리죠?”
그 말에 아델이 제자리에서 통통 뛰며 한 바퀴 돌았다.
그러더니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장의 떨림이 멎은 것 같아요!”
플라시보 효과 한 번 제대로 먹었구나.
나로서는 장난도 치고 점수도 따서 다행이긴 한데... 이런 종류의 사탕은 먹어본 적이 없나?
군것질을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속으로 낄낄 쪼갠 내가 말했다.
“이제 가 봐요. 아, 그리고...”
나는 빠르게 사탕박스의 비닐 포장지를 벗긴 다음 아델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야기하시다가 또 긴장할 것 같으면 하나씩 입에 넣고 씹어요. 아셨죠?”
“비, 비싼 거 아니었나요?”
“특별한 날이니까 드리는 거에요. 혼자만 드세요.”
“와...! 정말 감사해요 지혁 씨...!”
“이제 인사하고 대화 나눠요. 적극적인 게 중요해요. 아셨죠?”
“네! 적극적으로...!”
양손을 불끈 쥔 아델이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세화와 실비아를 향해 총총 걸어갔다.
흐뭇한 표정으로 아델을 지켜보던 나는, 그녀가 세화에게 힘찬 몸짓으로 고개를 숙이자 실소를 터뜨렸다.
세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한 나는 카페를 나와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딱 한 차례의 신호음이 지나가고,
-응, 지혁아.
박사가 전화를 받았다.
“전활 빨리 받는 걸 보니까 요가학원은 아닌가보네?”
-막 연구실에 도착했어. 디바이스에 들어갈 통제 버튼을 보수하는 중이야.
그녀는 내게 추적기를 들켰던 날 이후, 내가 무얼 하든 의문을 표하지 않고 뜻에 따랐다.
아니, 오히려 통제를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섰다.
심지어는 세화와 유리아의 디바이스에도 붙이자고 하기까지 했다.
박사가 이러는 이유는 내게 잘 보이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유리아가 했던 행동을 보고 적대감이 생긴 것이 더 컸다.
“쉬엄쉬엄해. 무리하지 말고.”
-응. 언제 와?
“지금 갈게. 밥은 안 먹었지?”
-아직 안 먹었어.
“같이 먹자. 도착하기 전에 연락할 테니까 바로 나올 준비해.”
-알았어요.
**
[지혁 씨! 정말 나빴어요! 제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셔요!? ٩(๑`^´๑)۶]
[왜요?]
[지혁 씨가 주신 약이요! 그냥 사탕이었잖아요! 세화가 엄청 웃었다구요!]
[혼자만 드시라고 했는데 그걸 꺼냈어요?]
[세화가 가슴에 손을 얹길래 긴장한 줄 알고... 그냥 둘 수 없어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구요! 저한테 장난친 죗값을 받으세요!]
진노한 아델의 귀여운 문자를 받고 끅끅거리던 나는 휴대폰을 재빨리 두드렸다.
[장난친 거 아닌데요? 효과가 있었잖아요. 분명 심장의 떨림이 멎었다고 들었었는데?]
[(งಠ _ಠ)ง]
[죄송해요. 그나저나 세화라고 부르는 걸 보니까 많이 친해졌나보네요.]
[네! 연락처도 교환했어요. 세화가 언제든지 톡해도 된대요! (˵ ᐛ ˵)]
아예 문자폭탄을 보내겠군. 세화가 귀찮다고 칭얼대는 그림이 그려진다.
너무 미안한데... 당분간 해달라는 건 전부 해줘야겠다.
[축하해요.]
[지혁 씨 덕분이에요! 좋은 동료를 소개시켜주셔서 고마워요!]
[언젠간 만날 운명이었는데 앞당겨진 것뿐입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에요. (๑ᴖ◡ᴖ๑) 참, 저번에 말씀하셨던 얘기... 기억하고 계시죠?]
교리를 들어보고 싶다고 한 것을 말함이었다.
[네. 기억합니다.]
[저는 언제든 가능해요. 기다리고 있답니다.]
나는 답장하지 않고 내 옆에 누워있는 박사를 흘끗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내 위에서 허리를 흔든 그녀는,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지쳐서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현재 박사의 상태라면 웬만한 부탁은 전부 순종적으로 들어줄 테지.
하지만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악의를 주입하지 않아 타락 성공의 척도라 할 수 있는 살인 등을 하지 못한다.
세화와 유리아를 향한 큰 질투도 단점. 물론 내가 의도한 일이지만 박사의 질투심은 상상이상으로 강했다.
이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다 쳐도, 사람은 바꿔 쓰는 게 아니라는 격언이 있듯, 박사의 본성을 바꾸는 일은 악의의 주입이 없이는 무척 긴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래도 기초를 다져놓기는 물론 진행이 상당부분 되긴 했으나 조금 답답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나는 결정을 내렸다.
아델 공략을 위한 작업을 쳐놓기로 말이다.
그녀의 신성력을 봉인하거나 제거할 방법만 찾는다면 박사를 떨어뜨리는 일도 무척 수월해질 테니까... 시작하자.
생각을 마친 나는 아델에게 답장을 보냈다.
[내일 가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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