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7 들켰다! #2
나는 정색을 하며 박사에게 다가갔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면서 말이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박사의 얼굴이 낭패로 물드는 게 보인다.
머리를 굴리고 있나본데, 무슨 핑계를 대나 한 번 들어보자.
수풀 위에 서있는 박사의 팔을 잡아끌자, 그녀가 힘없이 딸려왔다.
“여기서 대체 뭐하고 있어?”
내 물음에 박사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역으로 성을 내시겠다? 어디 해봐라.
“무슨 소리야? 누나가 왜 여기 있냐니까?”
“유리아를 만나러 왔는데, 걔가 술집에서 너랑 나오는 걸 봤어. 그래서 따라와 본 거고.”
“뭐? 그럼 미행했다는 거야?”
“맞아.”
당당하군. 나는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아니, 애초에 유리아가 술집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는데?”
그녀가 곧장 대답했다.
“유리아의 디바이스에 위치추적기가 있잖아.”
그렇긴 하지. 나름 괜찮은 핑계다.
근데 유리아는 오늘 디바이스를 안 차고 나왔는데, 그건 확인해보지 못했나보네?
“유리아 씨 팔엔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항상 세화와 유리아에게 디바이스를 옆에 두라고 했어. 핸드백 같은 곳에 넣어놔서 보지 못했던 거겠지. 생각해봐, 유리아에게 디바이스가 없었다면 내가 무슨 수로 여기 왔겠어?”
“잠깐만...”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유리아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박사가 재빨리 내 폰을 낚아채더니, 그걸 자신의 주머니에 우겨넣었다.
미간을 잔뜩 구긴 나는 언성을 조금 높였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박사의 언성도 마주 높아졌다.
“이딴 건 중요한 게 아냐. 너야말로 뭐하는 짓인데? 유리아랑 커플처럼 포옹하고... 나랑 장난해?”
“유리아 씨가 힘들어하길래 위로해준 것뿐이야. 게다가 난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어. 애초에 유리아 씨가 먼저 다가왔다고.”
“다가오니까 좋다고 안던데? 좋아, 일단 그건 그렇다고 쳐. 톡 하나 달랑 남겨놓고 내 연락 씹은 건 어떻게 설명할래?”
“무음으로 해놔서 몰랐고, 유리아 씨가 계속 말을 걸기도 했고... 또 내가 연락을 보낸 직후에 누나가 답을 안 주길래 자고 있거나 다른 볼일을 보는 줄 알았어. 그래서 그냥 놔뒀지.”
“웃기시네. 그냥 까먹었다고 하지? 아니면 유리아에게 마음이 생겨서 나 같은 년한테 쏟을 시간이 아까워졌다고 하든가!”
이건 화제를 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진심으로 서러웠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려는 박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고 날 죽일 듯 노려보았다.
“난 너한테 올인해서 전남편의 유품까지 다 버렸는데, 넌 왜 날 두고 다른 년이랑 바람을 피우려고 해?”
“뭐라는 거야... 바람 필 생각이었으면 모텔이나 호텔로 갔겠지, 공원에서 포옹으로 끝내고 헤어졌겠어? 그리고 년이라니... 그게 유리아 씨한테 할 말이야?”
“왜 편들고 난리야!?”
공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박사.
어지간히 서글펐던 모양이다.
내가 침착하게 말했다.
“확대해석하지 마. 오해야.”
“그럼 해명을 해!”
“난 해명했는데 누나가 안 믿잖아.”
“믿을만하게 하면 돼!”
억지 부리긴. 나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부터 줘.”
“웃기지 마.”
“지금 누나 반응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 누나가 여기 왜 있냐는 주제를 피하는 걸로밖에 안 보여.”
“.....”
“누나는 막무가내인 성격이 아니야. 유리아 씨를 만나려고 했으면 먼저 연락을 하고 왔겠지.
근데 유리아 씨는 나와 계속 같이 있으면서 전화를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박사가 콧바람을 훅 내뱉었다.
“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기회를 줄게. 지금 솔직하게 말해.”
“뭐래...! 날 의심하는 거야 지금?”
당황함이 역력한 표정.
놀아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누나가 의심할만하게 행동하고 있는데?”
“해명이나 똑바로 해.”
또 화제를 돌리시겠다?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다니...
맞춰주지. 하지만 네가 이럴수록 내가 더 유리해진다는 것만 알아라.
“아까도 말했잖아. 힘들어하던 유리아 씨가 다짜고짜 위로가 필요하다면서 나한테 안긴 것뿐이야.”
“위로가 필요하다고 했어? 걔 너한테 관심 있네. 냉정하게 쳐냈어야지.”
“인간을 죽일 뻔했다고 시무룩해져있는데 어떻게 냉정하게 쳐내? 누나라면 그럴 수 있어?”
“인간은 폭력적이라고, 지구를 좀먹는다고 할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성인군자 노릇인데? 그깟 사람 몇 명 죽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리고 그때 사람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도 모르잖아!”
아아... 희열이 느껴진다.
가치관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박사에게.
물론 지금의 그녀는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임을 감안해야 한다.
허나 뼛속까지 정의로웠던 박사가 홧김에 저런 말을 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내 노력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
“인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유리아 씨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게 문제지. 그녀는 비스트 슬레이어야. 앞으로도 마물과 싸워야 하는데 멘탈이 흔들리면 일 못해.”
박사의 어깨가 몇 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기다란 한숨을 내쉰다.
나는 그런 박사의 팔을 잡아당겨 품으로 데리고 왔다.
그녀는 잠시 버둥거리긴 했으나, 내가 등을 툭툭 두드려주자 이내 얌전해졌다.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주던 내가 말했다.
“이대로 가면 더 크게 싸울 것 같아. 그러니까 집에 돌아가서 얘기하자. 어때?”
“하지만 너...”
“돌아갈 때까지 이번 일 이야기는 하지 말자. 나도 할 말 많은데 참고 있어.”
“.....”
“계속 다투고 싶으면 말해. 그러기 싫으면 조용히 있고.”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박사가 내 허리춤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제안을 승낙한다는 의미.
나는 아무 말 없이 박사의 뒷목을 잔머리와 함께 살살 만져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진정이 되는 것 같자,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는 공원 출구로 향했다.
**
안방 화장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나는, 침대에 잘 개어진 팬티와 티셔츠, 그리고 반바지가 있자 피식했다.
화는 났어도 잘 챙겨주려고는 하네.
옷을 입은 내가 거실로 나오니, 소파에서 정색을 한 채 앉아있던 박사가 묻는다.
“밥은?”
“술집에서 안주 많이 먹었어. 누나는?”
“배 안 고파.”
“그래.”
나른한 숨을 내쉰 나는 박사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박사가 다리를 내 쪽으로 돌렸다.
“지혁아. 이제 얘기해도 돼?”
“해도 돼.”
“난... 네가 톡 하나만 남겨두고 이런 늦은 시간까지 유리아를 만난 게 이해가 안 돼. 게다가 공원에서 서로 껴안기까지... 네 설명을 들었어도 납득이 안 됐어. 아직도 화가 나고, 이런 내 감정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해.”
“그래, 이해해.”
“안아주라.”
갑자기 응석을 부리는 박사.
픽 하는 웃음을 터뜨린 나는 공원에서처럼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 품 안에 있던 박사는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엉엉 울지는 않았다. 그저 코를 훌쩍이며 내 티셔츠를 적시는 정도가 다였다.
분을 참지 못한 게 아니다. 그랬다면 대성통곡을 터뜨렸겠지.
저건 추적기를 숨긴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이성보단 감성이 앞선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나는 박사를 안은 채 마치 아이를 달래듯 앞뒤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그에 박사가 내 몸에서 떨어지더니 눈가를 훔친다.
“.... 넌 왜 아무 말도 안 해?”
“일단 누나를 달래려고.”
“날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내 생각을 얘기해보라는 소리였다.
얕은 한숨을 내쉰 나는 티슈를 뽑아 박사의 눈을 닦아내주었다.
이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뭐하는... 거야...?”
박사의 불안한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나는, 추적기가 설치되어 있는 폴더를 연 다음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이 네 개의 파일이 뭘까?”
박사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려왔다.
“내가 알기론 이건 무인기에 설치하는 위치추적파일인데, 왜 내 휴대폰에 있지?”
“그, 그건...”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더 감당하기 힘들어지기 전에.”
박사의 목젖이 크게 꿀렁였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내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고 이도저도 못하던 그녀가 결국 눈을 내리깔고 사과했다.
“미안해...”
“그래도 순순히 인정하네. 공원에선 곧 죽어도 핑계만 댈 것 같더니... 어쩐지 이상하더라고. 내가 술집에서 유리아 씨한테 직접 물어봤었어. 디바이스가 팔에 없는데 어디 뒀냐고. 그러니까 유리아 씨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
“집에 놓고 왔다더라. 지금 자신은 심란한 상태라 마물이 나타난다 해도 변신하기 싫었대. 만약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세화한테 맡길 생각이었다고 했어.”
“아...”
탄식을 내뱉은 박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추적기를 들킨 것도 모자라 공원에서 내게 했던 이야기가 거짓임이 탄로 난 상태.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렸는데, 그 어떤 누구라도 제정신을 차릴 수 없으리라.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 반응이었다.
여기서 박사를 완전히 몰아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왕 온화하게 나간 것, 끝까지 이 스탠스를 유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버럭 화를 내는 것보단 이런 느낌이 더 잘 먹힐 수도 있으니까.
“내가 공원에서 휴대폰으로 유리아 씨에게 전화해보려고 했던 건, 다시 물어보기 위해서였어. 디바이스를 놓고 온 게 맞는지 재확인하려고. 근데 누나가 냅다 빼앗아가더라. 제 발 저린 거지.”
“.... 지혁아...”
“솔직히 섭섭해. 파일 날짜를 보니까 설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데... 왜 그런 거야?”
박사의 숨소리가 호흡곤란이라도 일으킨 듯 가빠져왔다.
오랜 시간동안 마른 침을 삼키던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설명한다.
“네가... 딴 짓하고 다닐까봐...”
“그래서, 감시하니까 만족했어?”
박사가 흠칫했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니 더욱 겁을 집어먹은 모양.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부, 불편하기만 했어...”
“내가 채보영 씨와 마약을 한 날, 누나가 회사에 찾아와서 날 데리고 연구실로 갔잖아? 그것도 이 추적기 덕분이지?”
“.... 맞아...”
“설치한 보람은 있었네.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내 목소리가 약간 가라앉자, 박사가 내 팔을 잡더니 다급하게 말한다.
“지, 지혁아...!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난 누날 탓하고 있는 게 아니야. 오히려 고마워. 마약에 빠진 날 발견해줘서.”
박사가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근데 진짜 서운하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어...”
“나 봐봐.”
박사는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이빨이 딱딱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구나.
나는 늑대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어린 양 마냥 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누나는 내가 엇나갈까 무서워서 추적기를 설치한 거야. 날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렇지?”
불신과 주의는 한 끗 차이. 그 부분을 툭 건드려주니 박사의 눈에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
날 향한 경외심도 보이는 것 같다.
그녀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이상한 방향으로 샐까봐... 잘못될까봐 두려워서 그랬어...”
“앞으로는 이러지 않을 거지?”
“다, 당장 삭제할게... 내가 전부 깔끔하게 처리하고 확인시켜줄게... 그러니까 용서해줘...”
말을 마친 박사가 소파에 올라가 내게 무릎을 꿇었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얼굴.
원래는 세화와 떡치는 장면을 보게끔 한 뒤, 질투심과 폭력성을 확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이후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정신을 붕괴시킨 다음 사상을 입맛대로 바꾸려고 했는데, 박사가 공원에서 했던... 인간이 죽는 게 뭔 대수냐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 박사의 모습을 보자니 여기서 터뜨린 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확신이 선다.
그래, 박사의 사상은 이미 내게 상당부분 맞춰진 상태니, 굳이 정신을 망가뜨릴 필요는 없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녹여 가면 돼.
또한 추적기가 아니더라도 밀회 장면을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이미 써먹은 카드에 미련을 갖지 말자.
인자하게 웃은 나는 박사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박사가 냅다 내게 달려들었고, 가슴에 얼굴을 비비면서 엉엉 울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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