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6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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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
“아...!”
폴리머스 용접을 실수한 박사가 흠칫했다.
벌써 네 번째. 중요한 디바이스를 만드는데 네 번이나 실수해버렸다.
요가수업을 받을 때도 집중하지 못한다고 강사에게 타박을 들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싶지만 어제의 일이 자꾸 생각나 그럴 수가 없었다.
“괜찮아? 돌아가서 쉴래?”
옆에서 지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벌개진 박사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 난 괜찮아.”
“실수가 잦잖아. 이래선 폴리머스 낭비야.”
“.....”
“마침 유리아 씨 연락도 왔는데, 오늘은 그만하자.”
박사의 귀가 쫑긋했다.
유리아의 연락이라? 어제 일이 마음에 걸리고 있나보다.
헌데 왜 자신이 아닌 지혁에게 연락했을까?
친밀도로 따지자면 지혁보단 자신과 더 친할 텐데.
못내 서운한 감정을 느낀 박사가 물었다.
“유리아한테 연락 온 거랑 쉬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만나자고 하네. 자, 봐봐.”
지혁이 휴대폰을 내밀어 유리아와의 톡 내용을 보여주었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일 때문에 그런데, 지금 단둘이 한대거리에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라는 문장.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심심한 문장이었지만, ‘단둘이’라는 대목이 조금 걸렸다.
하지만 딱히 의심이 갈 만한 부분은 없었기에, 박사가 동의했다.
“알았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근데 여기서 바로 출발하려고?”
“그래야지. 누나는 집에서 푹 쉬어.”
“.... 알았어.”
순순히 대답한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가 황급히 상체를 수그렸다.
아랫배가 쿡쿡 쑤셔왔기 때문.
“아...”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쾌감이라고 해야 옳았다.
어제 했던 격렬한 섹스의 흔적. 박사의 얼굴이 또 다시 붉어졌다.
과장 좀 보태서 자궁이 꽉 찬 느낌을 받은 적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이대로라면 임신도 꿈이 아닐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착상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지혁의 씨앗은 기세가 대단했었다.
“후으...♡”
절로 뜨거운 숨결을 내뱉는 박사.
그런 그녀를 본 지혁이 씨익 웃는다.
“계속 일했으면 어렵게 잡은 디바이스의 뼈대를 망가뜨릴 뻔 했겠네.”
저 미소도 문제다.
볼 때마다 성욕이 솟구친다.
입술을 파리하게 떨던 박사가 대답했다.
“그, 그러게... 집에 가야 될 것 같아...”
“태워다줄게.”
“응...”
지혁과 함께 차에 탄 박사는, 여기서 그와 한 판 하자고 들이대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꾹 참기로 했다. 지혁은 어제 힘을 정말 많이 써주었다.
오늘 낮만큼은 휴식을 줘야했다.
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간 박사는, 지혁에게 잘 다녀오라 키스를 해주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공허한 집. 한 사람이 빠졌을 뿐인데 빈자리가 너무 크다.
급속도로 우울해질 지경. 박사는 그냥 잠을 자기로 했다.
빠르게 씻고 나온 그녀는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하아...”
지혁의 아이를 배게 되면 자신의 성씨를 송으로 바꿔야 하나?
혼인신고를 올리자고 말하면 지혁이 좋아할까?
태명은 뭘로 지을까?
태교에 좋은 음식 재료들도 사놓아야 하는데...
간만에 혼자 침대에 눕게 되니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들었다.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린 박사는, 일어나면 지혁이 와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오늘 얼마 자지도 못한데다 따스한 물로 샤워를 해서인지 수마가 솔솔 찾아왔다.
그렇게 박사는 금방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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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무저갱.
그 안으로 에드워드 파슨스가 떨어지고 있다.
“으아아아아!!”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를 노랫소리삼아, 무저갱의 입구에 선 박사와 지혁은 서로를 껴안아 격정적인 키스를 했다.
그런 두 사람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있었다.
아주 사악한, 그런 미소가.
에드워드가 빠르게 떨어지면서 내뱉던 비명소리는 곧 멎어들었다.
그리고 박사는... 전남편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지혁이 주는 쾌락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허공을 유영하며 3자의 입장에서 자신과 지혁을 지켜보던 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혁과 키스를 하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의 피부가 조금 하얗다고 느꼈기 때문.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하얬다. 퍼런 실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뭐지...?’
저건 분명 자신이 맞다.
헤어스타일, 이목구비, 체형까지 모두 똑같았다.
그런데 왜 피부만 유독 하얀 것일까?
한 번 가까이서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한 박사는 자연스럽게 허공을 날아 지혁의 뒤편으로 갔다.
그때,
번쩍-!
지혁과 키스를 하고 있던 또 다른 자신의 눈이 확 뜨였다.
새빨간 홍채, 그리고 세로로 된 동공.
그 불길한 눈을 정면으로 마주친 박사가 숨을 삼켰다.
“허어억!”
상체를 벌떡 일으킨 그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어둠이었다.
자신이 꿈에서 깼다고 자각한 박사는, 갑작스레 오한이 찾아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은 식은땀으로 인해 흥건해져있었다.
별 거지같은 꿈을 다 꿨다고 투덜거린 박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불에 손을 닦아낸 다음 휴대폰을 찾아 켰다.
[10:23 PM]
화면의 시간을 확인한 박사는 자신이 오래 잤구나 싶었다.
그런데 지혁은 어디 있는 걸까? 지금 시간이면 옆에 누워있어야 하는데...
“편의점에 간 건가...?”
그리 중얼거린 박사는 휴대폰 화면의 잠금을 해제했다.
곧장 지혁에게 전화를 걸려던 그녀는 톡이 하나 와있는 것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조금 늦을 것 같아. 먼저 자.]
오후 4시쯤에 보낸 톡이었고, 다음 톡은 없었다.
원래라면 전화도 했을 터인데... 부재중 전화는 와있지 않았다.
의아해하던 박사는 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계속 가고 응답이 없었다.
두 번을 해봐도, 세 번을 더 해봐도 지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
혓바닥으로 입술을 적신 그녀가 위치추적기를 켰다.
이젠 자주 확인해서인지 양심의 가책이 그나마 덜했다.
‘한대거리...’
지혁의 위치가 그곳임을 확인한 그녀는 문득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연구실에서 지혁이 보여준, 유리아가 보낸 톡.
분명 한대거리에서 만나자고 했었다.
게다가 톡을 한 번만 보내고 연락을 받지 않는 지혁까지... 누가 봐도 의심할만했다.
지혁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니 한대거리의 술집에 있었다.
본능적으로 침대에서 내려온 박사는 옷을 갖춰 입었다.
간단한 티셔츠와 긴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롱 가디건을 걸친 뒤, 집에서 나와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이후 핸들을 잡고 생각해보았다.
‘가는 게 맞을까...?’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이건 옳지 않았다.
만약 들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여자의 감이 대뇌를 콕콕 찌르고 있었다.
어서 가보라고. 뭔가 있을 거라고.
예전, 지혁이 채보영과 마약을 하고 질펀하게 굴렀던 걸 발견하기 전에 받았던 느낌과 같은 느낌이었다.
박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혁이 술집의 룸에서 유리아와 야릇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유리아가 지혁을 꼬시기 위해 술을 먹이는 건 아닐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둘 다 거사를 치르기 위해 달리고 있는 걸까...
머릿속에 온갖 망상이 밀려들었다.
눈을 뜬 박사는 결연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악셀을 밟았다.
‘가자.’
가봐야겠다. 손가락만 빨며 불안해하기보다는 이게 낫다.
저도 모르게 이빨을 뿌드득 간 박사의 오른발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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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거리에 도착한 박사는 공영주차장 가장 구석에 차를 세웠다.
지금 시간은 저녁 11시 5분. 지혁의 위치는 아직도 술집이었다.
차에서 내린 박사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술집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아차 했다.
‘아, 맞다... 모자...’
몰래 감시를 하는 건데도 그냥 나오다니...
자신의 무식함을 한탄한 박사는, 근처 아무 샵에 들어가 모자를 샀다.
편의점에서 마스크까지 구한 그녀는, 술집 앞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시켰다.
이후 휴대폰을 만지는 척하며 슬쩍슬쩍 건물의 입구를 확인했다.
그러길 한 시간. 박사는 술집에서 나오는 지혁과 유리아를 발견했다.
숨을 삼킨 박사는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 둘을 살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제법 밝았다. 술을 많이 마신 듯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입가엔 미소마저 맴돌고 있었다.
역시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한 박사는, 두 사람이 천천히 한대거리를 벗어나자 카페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거리를 두고 둘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둘은 곧 어느 공원으로 들어갔다.
가로등 불빛도 희미한 공원에 무슨 용건이 있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수상한 짓거리를 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박사는 치솟는 분노를 삭이고 또 삭였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을 경우... 지혁은 죽었다고 복창해야 한다.
공원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두 사람은 이내 벤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사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유리아의 기감은 범인을 상회하기 때문.
평범한 자신이 이 이상으로 접근한다면 분명히 눈치챌 것이었다.
결국 박사는 타는 속을 애써 달래며 두 사람의 행동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약 10여 분 정도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곧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려는 모양.
박사는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나려다가, 유리아가 지혁의 목에 팔을 감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저게 무슨...!’
두 사람의 포옹을 본 박사는 충격에 빠졌다.
저건 위로의 포옹이 절대 아니다. 어느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호감이 있을 때나 하는, 서로의 몸을 완전히 밀착하는 진한 포옹이었다.
저게 지금 뭐하는 개짓거리란 말인가?
보기 싫은 꼬락서니.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박사가 주먹을 꽉 쥐고 유리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유리아는 현재 지혁이 세화와 만나고 있는 줄 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지혁이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유리아는 지혁이 임자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저런 식으로 행동한다?
아무래도 자신은 유리아를 너무 고평가했던 것 같았다.
정조를 잘 지키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주 천박하기 짝이 없는 계집이었다.
사실 자신도 똑같이 헤픈 년이었다.
지혁이 세화와 만나는 걸 알고 있었고, 세화에게서부터 그를 빼앗고 싶어 했다.
물론 지혁이 먼저 자신에게 접근했지만, 그를 냉정하게 내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컸다.
‘아냐! 이런 식으로 따지면 끝도 없어!’
자아성찰을 하던 박사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나무에 등을 기댄 그녀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린 뒤 꽉 눌렀다.
가슴이 뜨겁다. 누군가가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것만 같다.
어떻게 얻은 지혁인데... 갑작스레 경쟁자가 생기다니.
박사는 온갖 부정적인 내면의 파도를 뚫고 나온 분노의 감정에 몸을 맡겼다.
너무나도 화가 난다.
당장 해명을 듣지 않으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기분.
박사는 완전히 거칠어진 호흡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두 사람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어...?”
둘은 어느 샌가부터 사라지고 없었다.
의아해하던 박사가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나...?”
멀찍이서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박사가 몸을 크게 떨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아...”
눈앞이 아찔해져와 잠시 비틀거렸다.
지혁이 공원 입구에서부터 박사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망했다...’
박사는 자신이 끝도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완전히 망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한담?
머리가 띵해오지만... 지금은 억지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하는 상황이다.
침착해야 한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분명히 있다.
그리 생각한 박사는 팔짱을 꼈고, 그 상태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지혁을 주시하며 머리를 빠릿하게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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