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5 다시 나타난 마물 #2
악어의 몸통과 사자의 머리를 지닌, 거대한 몸집의 야수형 마물.
키메라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그 마물은, 아르헨티나 서쪽 해안도시의 집을 입으로 깨부수고 씹어 먹었다.
입에서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잘게 부서지는 건물의 파편들.
놈의 주위론 혼비백산하며 달아나는 주민들이 많았다.
-크르르르...
맛있는 별미를 잡수듯 집 한 채를 순식간에 싸그리 먹어버린 마물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고 경계심 어린 눈빛을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쾌청한 하늘에서 키이잉-! 거리며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람이 점점 거세지면서 태풍이 몰아치듯 격렬해졌다.
마물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위협을 분명히 인지했다.
그러나,
퍼어억-!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다가온 집채 만 한 화살을 피하지도 못하고 머리가 꿰뚫렸다.
화려한 등장치고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화살은 마물의 몸통마저도 완전히 작살을 내버리고, 해안가에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사라졌다.
아주 멀찍이서 마물의 미간에 정확히 화살을 꽂아버린 유리아는, 회수한 화살을 화살통에 집어넣고 통신기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끝났어요. 다른 마물은 없나요?
모니터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박사가 대답했다.
“마물은 이제 없어. 시체 회수는 걱정하지 말고 복귀해서 일 봐. 수고했어.”
-네, 박사님.
짧게 대답한 유리아는 곧 포탈을 타고 사라졌다.
큰일이 지나가서 안심했을까? 박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간단하게 끝났네. 부상자나 사망자도 없는 것 같아.”
나는 박사의 말에 맞장구치지 않았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모니터 한곳을 주시하기만 했다.
이런 내 행동에 박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가온다.
“왜 그래?”
“저기 부서진 요트는... 마물이 씹어 먹은 건가?”
“요트? 어디 한 번 봐봐.”
나는 순순히 카메라를 확대해 중앙 몸통부분이 완전히 사라진 제법 큰 요트를 보여주었다.
그걸 잠자코 지켜보던 박사가 중얼거린다.
“마물이 씹은 것 같지는 않은데... 엄청난 힘에 의해 꿰뚫린 걸로 보여.”
“나도 같은 생각이야.”
잠깐 침묵하던 박사는, 저 요트가 유리아의 화살에 의해 꿰뚫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설마...”
말끝을 흐린 박사가 자신의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인간이 죽었을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고요해진 연구실. 먼저 침묵을 깬 건 나였다.
“유리아 씨는 C등급 마물을 죽이는데 너무 과한 힘을 썼어. 타이라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 수도 있고, 오랜만에 변신해서 힘 조절을 못했을 수도 있어. 뭐가 됐든 큰 실수지. 이래서 디바이스 통제가 필요한 거야.”
“.....”
“저건 마물이 먹은 걸로 처리해야 돼. 알지?”
“아, 알아... 요트에 타있던 사람은 탈출했을까...?”
“그랬으면 좋겠네. 일단 생체신호는 잡히지 않아. 근처 바다에도 없고.”
“유리아한테는... 말해야 할까?”
“말해야지.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잖아.”
박사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착잡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말한다.
“조금 돌려서 말하면 어떨까...? 적당히 싸우라고...”
“유리아 씨의 성격상 돌려 말하면 금방 눈치챌 걸? 그냥 거짓말만 조금 섞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나아.”
“하아... 미치겠다...”
나는 시무룩해져있는 박사의 손에 내 손을 포갰다.
“내가 직접 말할게. 누나는 상황을 정리해서 세계연합에 전달해준 다음 집으로 돌아가.”
“나는...”
“누나가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딱 하나야. 뭔지 알지?”
“응, 알아... 그렇게 할게...”
순종적인 대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나는, 박사의 등을 부드럽게 툭툭 쳐준 다음 상황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
[평화가 찾아온 줄 알았던 지구에 비보가 떨어졌습니다. 금일 오후, 아르헨티나의 해안도시에서 나타난 C등급 괴물에 의해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세간에선……]
[괴물은 한화로 80억 원 가량의 재산피해를 입힌 뒤, 비스트 슬레이어에게 처리되었습니다. 세계연합은 빠른 대응을 보여준 비스트 슬레이어 본부에게 감사를 표하며……]
의정부 별채에 도착해 잠시 라디오를 듣던 나는, 현관문이 열리며 실비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정색을 한 채로 날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일제히 보도되고 있는 뉴스를 본 모양. 그녀의 뒤로 똘망똘망한 눈을 한 아델이 보였다.
뒷좌석에 있는 생수세트 두 개를 들고 현관으로 뛰어간 내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와. 뉴스 봤어.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거지?”
“네.”
“손에 든 건... 생수야?”
“네. 그저께인가? 아델이 정수기에 벌레가 들어가면 어떡하냐고 불안해해서 사왔어요.”
그 말에 실비아가 힘없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뒤로 돌려 아델을 흘겼다.
아델은 배시시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말이다.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생수를 구석에 가지런히 놓고 식탁에 앉았다.
그러자 실비아가 정수기에서 얼음물을 떠와 내게 내밀었다.
일회용 빨대를 내민 그녀가 말한다.
“마셔.”
“감사합니다.”
빨대를 컵에 꽂고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들이켠 나는, 본격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먼저, 마물이 나타났는데도 부르지 않아서 서운하셨죠?”
실비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하지만 이해해. 뉴스 보니까 비스트 슬레이어 유리아던가...? 활동명이 유리아 맞지?”
“네, 유리아 씨는 활동명과 본명이 같아요.”
“응, 그분이 나타나자마자 마물을 죽였다는 보도를 듣고 우린 필요 없었겠다 싶었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이것부터 보세요.”
나는 내가 정해놓고 이제 세계 표준이 된 마물의 등급표를 두 사람의 휴대폰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 나타난 마물은 C급이에요. C급은 비스트 슬레이어가 아니라면 처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등급이죠.”
“그래...? 지구인들은 엄청 약하나보네?”
“마물이 강한 거고, 아이테르가 신비한 힘인 거죠. 어쨌든... 지금까지 마물이 많이 나타났었는데, B급까지는 비스트 슬레이어가 혼자서 처리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A급부터는...”
“두 명 이상이 필요해?”
아니, 너 하나면 A급도 죽여. 어쩌면 S급도 가능할지 몰라.
처음 왔을 때 네가 죽인 알로켄이 S급에 근접한 A급이거든.
“네. 다만 저흰 실비아 씨와 아델이 세화나 유리아 씨보다 강할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A급 이상 마물과의 일대일 전투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봅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두 분을 당장 마물과의 전투에 참가시켜드리고 싶지만 디바이스가 아직 완성 전이라...”
실비아가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모두 소모하면 아이테르가 소멸될지도 모르니까, 디바이스가 만들어질 때까지는 우릴 아껴 쓰겠다는 말이야?”
“정확해요. 디바이스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세화와 유리아 씨의 손이 모자랄 때만 부를 겁니다.”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근데 타이라트를 찾지 못하는 이상, 우린 마물을 막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건가?”
“마물은 무한대가 아니라고 봅니다. 저희가 착실하게 지구를 지켜낸다면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해요. 타이라트가 이렇게 깔짝깔짝 간만 보는 건 저희 입장에선 좋은 일이죠.”
“그래... 그런데 왜 그러는 걸까? 전면전을 해도 모자랄 판에...”
왜긴, 너희들을 수중에 넣으려고 그러지.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세화가 여러분들을 뵙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모레 중으로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그에 실비아와 아델의 표정이 무척 밝아졌다.
“우린 괜찮아. 드디어 만나게 되는구나...”
“알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내일 연락드릴게요.”
“응. 바쁠 텐데 신경 써줘서 정말 고마워. 진심으로...”
같은 동료를 만나는 게 정말 기대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나? 세화는 이미 내 권속이자 마계의 왕비가 됐는데.
너희들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난 슬슬 아델의 공략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일단은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쌓아두는 게 먼저.
그 다음엔 실비아와의 관계가 서서히 멀어지도록 할 예정이다.
비스트 슬레이어들 중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을 떨어뜨려놔야 특이사항이 생겨도 어찌 수습할 수 있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남아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는 다 끝난 걸로 알고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빠서요.”
“응, 수고해.”
“네.”
나는 곧장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아델이 후다닥 달려오더니 날 부른다.
“저... 지혁 씨!”
“말씀하세요.”
“너무 피곤해보여서요. 이거...”
그녀가 소심한 몸짓으로 건넨 건 음료수였다.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이천 원짜리 비타민 음료수.
실소를 터뜨린 나는 그걸 받아들고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힘이 나네요.”
“그렇죠? 저 잘했죠?”
“잘하셨어요. 아... 그리고...”
내가 자세를 낮추고 손날을 세워 입으로 가져가자, 아델이 실비아의 눈치를 보더니 내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행동이 귀여웠던 내가 실소를 터뜨리고는 말했다.
“저번에 교리를 알려주고 싶다 하셨잖아요?”
“맞아요.”
“그 로사리오 님의 교리가 정신적으로 힘이 되는 교리인가요?”
그 말에 아델이 눈을 끔벅였다.
그리고는 양쪽 입꼬리를 위로 쫙 올렸다.
내가 설교에 큰 관심이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네, 진실한 믿음만 있다면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제가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드릴게요!”
“그럼... 세화와 만난 이후 자리를 만들어볼까요?”
“네! 약속해요! 지금!”
새끼손가락을 빳빳하게 세우고 날 향해 내미는 아델.
나는 근심이 있는 척, 정신적으로 피곤한 척 연기하며 그녀와 손가락을 걸었다.
그러자 아델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이내 온화한 미소를 띠우며 날 격려했다.
“제가 지혁 씨의 근심과 걱정을 날려버릴 수 있도록 할게요.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테니까요.”
그래, 다 잘 될 거다.
잘 되어야지.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박사에게 다가갔다.
박사의 이마에 저녁 키스를 해준 다음 옆에 앉으니, 그녀가 물티슈를 꺼내 내 손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질문을 던진다.
“유리아는? 만나고 왔어?”
“응.”
“만나고 바로 돌아온 거야?”
재확인을 하려고 하는구나.
네가 이럴수록 추적기를 들켰을 때 수습하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것만 알아라.
“아니. 실비아 씨와 아델도 만났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지 대충 설명해줬고, 세화와의 만남도 주선했어.”
“그런 중요한 얘긴 나한테 먼저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괜히 생각 많아지면 임신하는데 지장이 생길 수도 있잖아.”
“.... 유리아는 뭐래?”
“걱정하더라. 자기가 인간을 쏜 게 아니냐면서... 일단은 아니라고 해줬어. 조심하라고도 경고했고.”
“그렇구나...”
말끝을 흐린 박사는 내 손을 전부 닦아내고는 다시 커피를 홀짝이며 TV를 보았다.
고요해진 방 안. 한동안 TV에서 눈을 떼지 않던 박사가 날 바라본다.
“지혁아.”
“말해.”
“그... 아까 약속한 거...”
우물쭈물하며 관계를 갖자고 제안하는 박사.
나는 은근슬쩍 그녀의 반바지 안으로 손을 넣어 팬티 정중앙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축축한 느낌. 벌써 젖었구나.
내가 없는 동안 욕구를 참아내느라 힘들었나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사를 번쩍 안아든 내가 물었다.
“배란유도제는? 먹었어?”
내 눈을 피한 박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죽 웃은 나는 그녀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오늘부터 며칠간 무척 바빠지겠구나. 몸이 두 개 정도 있으면 좋았으련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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